43화. 꺼져, 이건 내 거니까.
- 그러니까. 내가 분명 그 사람한테 돈을 받은 건 맞지만, 갚으란 말은 못 들었다니까?
검찰 시보 시절, 사수와 함께 맞닥뜨린 첫 용의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분명 그렇게 말 했었다.
- 앞에 자필로 쓴 차용증, 각서, 인감까지 찍은 계약서가 있는데도 그렇게 주장하시는 겁니까?
- 이보시오. 검사 양반. 먹물만 꽉 찬 대가리로는 이해가 안 되나 본데. 몇 시 몇 분 몇 초에, 그걸 내가 직접 썼다는 증거라도 있어?
혐의를 완강히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무고죄로 역고소를 넣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용의자는, 며칠 밤을 새워 정리한 증거자료조차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 이건 다 검찰이 조작한 거야. 응? 영화에도 많이 나오잖아. 네놈들 실적이나 세우려고.
치열한 공방 끝에 범인에게는 법정 최고형을 구형했어도 실제 판결에서는 절반으로 깎였다.
범인은 이미 해외로 재산을 은닉한 지 오래였고, 소송 중 피해자 두 명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 개인적인 감정 같은 건 필요 없어. 사건은 사건일 뿐이야.
사수의 의견은 조원식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과 일치했다.
일은 일일 뿐.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무혁은 애초에 인간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석민재조차 자신을 속일 줄은 몰랐다.
‘짝사랑이라.’
그녀를 떠나보내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무혁은 홀로 민재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보답 같은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네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 선배님.
여전히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그 모습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 제발 살려주세요.
도서관 앞 교정에서, 네가 먼저 내 손을 잡지만 않았더라면.
그때는 나도 너를 놓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제게 손을 뻗어주었던.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 그러니까 죽지 마.
나의 영원.
진무혁은 절대 석민재를 버릴 수 없다.
하지만 석민재는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
“누가 그래요?”
갑자기 나타난 민재를 마주하고서 장미보다 무혁 쪽이 더 놀랐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들은 걸까.
‘오해를 사면 곤란한데.’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지만 이미 늦었다.
민재는 성큼성큼 걸어와 무혁의 앞을 막아섰다.
“그쪽이 조장미 씨군요.”
“날 알아?”
“모르긴 힘들죠. 분명 ‘약혼녀’라고 하셨던가요.”
진무혁은 조원식의 딸과 결혼할 거라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이미 지겹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실물을 직접 만나는 건 민재도 처음이다.
약혼 이야기가 나오자 무혁은 그게 아니라며 눈짓을 보냈지만, 민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미를 마주했다.
“듣던 대로 참 예쁘시네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민재는 차분히 눈으로 조장미를 바라봤다.
잡티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 톡 하고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몸매.
긴 생머리를 늘어트린 청초한 분위기까지.
과연 조원식이 키워낸 완전무결한 공주님이다.
“그래도 진무혁 눈엔 내가 더 예쁘겠지만.”
“뭐?”
노골적인 우월감에 차 있던 장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황당하다는 듯 어이없어하는 그녀를 앞에 두고서 민재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남편이 워낙 죄 많은 남자라 옛날부터 여자들 울리고 다닌 건 익숙해서요. 안 그래?”
“부정하긴 힘들지.”
학생 시절부터 진무혁을 채갔다며 이를 가는 선배들이 한 트럭은 넘었다.
뻔뻔한 무혁의 호응에 힘입어 민재는 옳다구나 한 술 더 떠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어요. 그런데 어쩌죠, 그건 제가 진작 씹다 버린 껌이라서요.”
요 며칠 민재가 받은 거라고는 소영하의 테러밖에 없다.
도발 삼아 한 말이었지만 본인이 배후라는 걸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하의 한류 스타한테 씹던 껌은 좀 너무한 것 같은데?”
아무리 센 척 해봐도 민재 눈에는 아직 어린애다.
남들은 저 가녀린 모습만 보고 봐줬을지 몰라도, 민재는 코웃음을 치며 강하게 맞받아쳤다.
“어차피 단물도 다 빠졌고 휴지로 잘 싸서 쓰레기통에 잘 갖다 버린 걸 굳이 다시 주워다 주셨는데.”
“뭐?”
“이건 친절이 아니라 테러죠. 그런데 제가, 굳이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조원식의 딸이니까 민재는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찾아와 겁박한다고 눈물이나 질질 흘릴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제 아버지가 그랬듯이, 이 여자도 조금만 빈틈을 주면 금세 제 목을 물어뜯으러 달려들 것이다.
한 번은 당해줘도 두 번은 어림도 없다.
하물며 다른 여자가 진무혁을 건드리는 꼴을 보는 건 역시 심히 불쾌하다.
“오빠, 저 여자 이상해.”
“멋있는 거겠지. 내 아내거든.”
사랑을 담뿍 담아 무혁은 민재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남들 앞에서 수없이 연습한 덕분에 이제는 부부 행세도 이토록 자연스럽다.
“그래서 조장미 씨, 제 남편에게는 무슨 볼일이시죠?”
시시한 약혼 얘기를 들먹이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이번 기회에 똑똑히 알려줘야 한다.
제 손에 물 한 번 묻혀본 적 없을 만큼 곱게 자란 아가씨의 투정질까지 받아줄 만한 인내심 따위는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습게만 보던 석민재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줄은 몰랐을 것이다.
잔뜩 화가 난 건지 조장미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소송만 끝나면 헤어질 거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확신에 찬 말에 민재는 속으로 뜨끔했다.
이 여자가 어떻게 계약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굳이 제 속내를 훤히 내보일 필요는 없다.
민재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한 채 무혁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난 아직 헤어질 생각이 없는데. 무혁 씨는?”
“그러게. 나도 헤어진다는 건 생각도 해본 적 없는데.”
무기한 계약 연장 합의가 이루어진 현시점에서 조장미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별의 아픔은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최소 진무혁이 직접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은 이제는 민재도 딱히 헤어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이 사람, 내가 버려서 당신에게 가는 걸 보느니, 그냥 내가 평생 데리고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진무혁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남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민재는 대놓고 손을 뻗어 무혁의 콧날을 어루만졌다.
“어차피 다른 사람한테 주긴 아깝거든. 이렇게 예쁘니까.”
일부러 빚어보려고 해도 이렇게 잘 만들기는 쉽지 않을 명품이다.
대놓고 액세서리 취급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피식 웃으며 태연히 민재의 손길을 즐겼다.
“영광이네.”
“네까짓 게 뭔데!”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뺨에 불이 일었다.
조장미는 이를 악물고서 경멸이 서린 눈으로 민재를 노려봤다.
민재는 얼얼한 뺨에 손을 얹고 되려 웃어버렸다.
“쳤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민재를 탓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아마 진무혁을 상대로 했다면 이 방법이 통했을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상대를 잘못 만났다.
“그러는 넌 뭐가 그렇게 많은데?”
한 번 더 때리려고 손을 들기에 민재는 바로 손목부터 잡았다.
제 분을 못 이겨 먼저 쳤으니 폭행으로 가면 민재가 백 퍼센트 유리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저러는 걸 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얕보인 모양이다.
“그렇게 많이 가진 너는 남의 물건에 손대면 안 된다는 건 못 배웠나 보지?”
민재도 미인이지만 표정이 없는 얼굴은 섬뜩하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억지로 웃고 싶진 않았다.
억지로 웃으면 분명 얕보일 테니까.
이 얼굴도 이럴 때는 참 쓸모가 있다.
“유치원생도 아는 걸 안 가르쳐준 네 부모도 대단하네.”
“이게 진짜!”
아무리 울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민재를 두고 조장미가 분을 못 이겨 달려들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가씨!”
다행히 몸싸움까지 번지진 않았지만 애초에 승패는 명확하다.
이쪽도 참 더럽게 얽혔구나. 곱게 자란 아가씨 하나에 휘둘려 대체 몇 명이나 고생하는 건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런 여우 같은 짓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민재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꺼져, 이건 내 거니까.”
완전히 얼어버린 조장미를 짓밟았으니 용무는 끝났다.
민재는 제 곁에선 무혁의 손을 잡고서 그대로 객실 문을 닫아버렸다.
제까짓 게 아무리 조원식을 등에 업었다 한들 멋대로 객실로 쳐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바로 주거침입죄다.
“으…….”
손목이 가늘어도 손이 매워서 그런지 뺨이 붓기 시작했다.
“아프지.”
“이건 됐고, 저 여자랑 만나려고 나갔던 거야?”
분명 또 제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애초에 진무혁이 저런 타입과 싸우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소 잡는 칼을 어떻게 과일 깎는 데 쓸까.
만약 저 여자가 울면서 난동을 피우기라도 하면 그건 모두 진무혁 혼자 덮어쓰게 될 거다.
“용식이랑 통화 중이었어. 갑자기 찾아와서 전화도 급하게 끊은걸.”
“진짜야?”
“그럼. 확인해 봐.”
한용식이 선명하게 찍힌 통화기록을 확인하고도 민재는 쉽사리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 맡겨만 뒀다면 분명 또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을 테지만.
‘나한테 당한 건 충격이겠지.’
진무혁이 뭐라고 그러는 데는 익숙해도 민재 본인이 직접 나와 무안을 줄 줄은 몰랐을 거다.
아마 지난번, 밤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도 저 여자가 아니었을까.
민재가 소영하를 쉽게 떼어내지 못한 것처럼 아무래도 무혁 역시 저 여자를 쉽사리 떼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원래 제멋대로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데, 아까는 꽤 충격이 큰 모양이더라고.”
“곱게 자란 진무혁 씨가 감당하긴 힘들겠지. 좋게좋게 말한다고 듣는 상대가 아니거든.”
아무리 안하무인이라도 둘 다 온실 속의 화초라, 상상을 초월하는 진상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을 거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민재와 달리 무혁은 흐뭇한 얼굴로 슬그머니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우리 와이프. 오늘 정말 멋있었어.”
“웃기지 마. 뭐 저런 금붕어 똥 하나 처리 못 하고 다니면서 큰 소리야?”
적어도 이 바닥에 조원식의 이름은 무겁다.
사랑하는 딸이 원하는 거라면, 조원식은 어떻게든 상대를 회유해 그 바람을 이루어주곤 했다.
돈이든, 명예든, 지위든.
제 앞에서 굽신대는 사람들만 보던 장미도 오늘은 상대를 제대로 만난 셈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정말 멋졌어. 석민재.”
“알았으니까 밥부터 먹어. 배고파서 죽을 것 같으니까.”
“그럼 룸서비스나 시켜볼까?”
배가 고프면 흉포해진다는 걸 본인은 정말 모르는 걸까.
여전히 씩씩대는 민재를 보며 무혁은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지켜만 줘야 하는 여린 공주님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반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석민재. 좋아해.”
“알았으니까 저리 가.”
엉겨 붙는 무혁을 밀어내면서도 민재는 끝내 그를 침대에서 내쫓지 못했다.
***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매니저들은 살얼음판 같은 공기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 어디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
절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성 이사의 말을 듣고도 소영하는 정말로, 제 마음대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형.”
“말 시키지 마.”
대체 무슨 소동이 있었던 건지 매니저들조차도 말을 걸지 못했다.
오늘의 소영하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업계에서는 이미 소영하가 결혼까지 한 구 여친을 잊지 못해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형도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하셔야죠. 애초에 형은 연예인이고 그 여자는 그냥 일반인…….”
“그만하라고 했지.”
듣기 싫다는 소영하의 엄포에 매니저들도 입을 다물었다.
하필이면 홍 사장과 맞닥뜨린 탓에 일이 곤란해졌다.
벌써 본사에 연락이 들어간 건지, 소영하는 곧장 성 이사에게 호출당했다.
‘망했네.’
줄곧 제 분을 못 이겨 화를 참지 못했지만, 그도 양재IC를 지날 즈음에야 슬슬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몇 시간을 꼬박 달려 도착하니 사무실에선 밤늦은 시간에도 누구 하나 퇴근을 못 했다.
“화 많이 났어?”
소영하의 물음에 비서들은 가득 썩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 부딪칠 수밖에. 그는 인기척을 내며 똑똑, 가볍게 두 번 노크했다.
“들어와.”
성준범 이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스탠드 조명만 켜놓은 채 그는 빌딩 창문 아래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유난히 높은 빌딩 덕분에 아래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꼭 개미처럼 보였다.
“리조트에 다녀왔다면서.”
“어, 머리 좀 식히고 싶어서.”
“오늘은 분명 새 영화 대본 리딩하는 날이었을 텐데.”
그런 게 있었던가.
지금 잡힌 스케줄은 모조리 취소하라고 했던 탓에 매니저들은 제 앞에서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아니 얼핏 들은 기억이 있긴 한걸 보면 매니저가 아예 얘기를 안 한 건 아니겠지만.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아서 금세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건 어차피 우리 회사 거잖아. 며칠 미룬다고 문제 될 건 없…….”
“그건 네 생각이고.”
HS엔터 내부 제작사에서 넘어가는 거니 평소라면 분명 적당히 눈감고 넘어가줬을 일이다.
하지만 성 이사는 차가운 눈을 하고서 방 구석에 둔 골프채를 집어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널 참아줘야 할까.”
“형, 왜 그래.”
어설프게 웃어 넘겨보려 했지만, 성 이사는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날이 서 있다.
그간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건지 그는 골프채로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을 그대로 후려 갈겼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이 흩어졌다.
어둠 속에서 성준범은 골프채를 소영하에게 겨누며 차갑게 웃었다.
“참 잘하고 있어. 과연 HS의 얼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