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죽음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 날까지.
“다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어서야 민재는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고생했네. 저녁은 어쩔래?”
“천천히 먹지, 뭐.”
일찌감치 마무리해버린 민재와 달리, 모처럼의 휴일이라 회사 사람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져 쉬고 있었다.
선베드에서 완전히 곯아떨어진 안 팀장을 보고 민재는 얌전히 산책이나 가기로 했다.
“같이 가.”
“아직 할 거 남은 거 아니었어?”
“이따가 밤에 하지 뭐.”
무혁은 노트북이 들어 있는 가방을 받아들고서 서둘러 뒤를 따라나섰다.
그런 그를 보고 민재는 뭐라고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밤에…….”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아니라며 민재는 혼자 괜히 손사래를 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지만 억지로 말하게 할 생각은 없다.
“저쪽 길로 가 보자.”
이제는 자연스럽게 손부터 잡았다.
예전처럼 경계하는 기색도 많이 사라진 걸 보며 그는 새삼 미소를 머금었다.
“피곤하지.”
“응. 오늘은 일찍 자려고.”
아침부터 기진맥진한 기색이 역력한데, 오기로 보고서까지 다 끝낸 탓에 얼굴에 피곤이 서렸다.
“편하게 자. 내가 있는 게 불편하면 소파에서 잘 테니까.”
“괜찮아. 같이 자도 돼.”
어차피 밤에는 또 슬그머니 침대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너무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놀라는 무혁을 앞에 두고서 민재는 부끄러운 듯 눈을 피했다.
“어제 나 때문에 고생했다면서. 너무 그렇게 내외 안 해도 괜찮아.”
“뭐, 그래 준다면야 나야 좋지.”
어느새 굳게 닫혀 있던 민재의 마음에도 조금씩 빈틈이 생겼다.
내친 김에 무혁은 조금씩 이야기를 진전시켰다.
“소영하 건은 조만간 해결될 거야.”
“어떻게 할 건데?”
“정식으로 접근금지 명령이라도 받게 되면 더는 조용히 넘어가지 못할 거야.”
지난번, 민재의 집에 왔을 때부터 결혼식장에 찾아온 일, 그리고 오늘 객실에 찾아온 것까지.
소영하가 경솔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무혁의 손에 남는 카드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난다.
“고생이 많네. 우리 남편.”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민재가 그렇게 말해주니 퍽 기분이 좋다.
막 돌아왔을 때, 잔뜩 경계하며 날이 섰던 때를 생각하면야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다.
“그리고 이번달 말부터 할머님 병원비는 내 쪽에서 낼 거야.”
“그걸 왜?”
“인센티브. 홍 사장 건 정리를 잘했으니 상을 줘야지.”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쉽게 넘어갈 사건이 아닌데.
홍 사장은 민재가 마음에 들어 적당히 넘겨준 감이 없잖아 있다.
“손주 사위 노릇을 제대로 하네.”
“원래 부인이 좋으면, 처갓집 섬돌에도 절을 하는 법이니까.”
“말은 잘해요.”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한 말인데, 민재는 오늘도 자신의 고백을 이리도 쉽게 웃어넘겼다.
폭소하는 그녀를 보며 속이 상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속을 드러낼 수는 없다.
한 걸음씩 천천히, 온전히 새장 속으로 걸어올 수 있도록.
어차피 시간은 제 편일 테니 무혁은 서두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진심이야. 퇴원하실 만큼 회복하시면 집으로 모셔와도 괜찮아.”
“진심이야?”
의심하는 민재를 보며 무혁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대신 우리는 한 침대를 써야겠지만.”
“아, 정말!”
슬쩍, 엉큼한 속내를 드러내자 민재의 두 뺨이 빨개졌다.
어차피 처음도 아니면서.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무혁의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소영하가 객실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내 쪽에서 따로 알아볼게.”
“알아볼 수 있어?”
“그러니까 민재 너는 아무런 걱정 안 해도 돼.”
“믿음직해서 좋네.”
그동안 쌓인 신뢰 덕분인지 민재는 진심으로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그 남자와 직접 만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으니까.
무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슬그머니 한마디를 보탰다.
“그럼. 난 좋은 남편이니까.”
자화자찬하는 그를 보며 민재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칭찬 아니거든?”
“오늘은 칭찬 좀 해줘.”
눈웃음까지 쳐가며 노트북 두 대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민재가 일찌감치 잠들 준비를 하는 사이 무혁은 제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알아냈어.]
서울에 있는 용식이 뭔가 낌새를 잡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물밑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에 대해 그녀가 굳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무혁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
의심 하나 없이 민재는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줬다.
꿈처럼 완벽한 이 일상이 깨지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객실 문을 닫고 무혁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도 함께 사라졌다.
애초에 그의 헤픈 미소는 모두 석민재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차가운 목소리로 무혁은 용식에게 물었다.
“최근 소영하의 매니저가 바뀌었어. 원래 일하던 실장급 매니저가 못 하겠다고 탈주한 모양이야.”
“탈주?”
“그래. 일정도 내리 펑크를 내버리는 바람에, 요즘 일할 생각이 없나 봐.”
“그렇겠지.”
언제까지나 제 것인 줄 알았던 석민재를 눈앞에서 놓쳐버렸으니까.
물처럼 공기처럼 제 곁에 머물던 사람 하나가 사라진 순간 밀려오던 공허함은 진무혁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며 울던 민재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쓰렸다.
그 마음 한 자락조차 알아주지 못한 건 전적으로 무혁 자신의 불찰이다.
그렇게 쉽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라는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제게서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돌아왔다.
“알아서 자멸해주니 다행이네.”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리석은 남자. 잠시나마 대용품 노릇을 한 게 누구 쪽이라고 생각한 건지.
누가 어디에서부터 어떤 식으로 입을 놀리고 다닌 건지는 지금부터 파헤치면 될 일이다.
“그래서, 누구 짓이야.”
“누구겠냐. 당연히 그 거머리 짓이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어떻게든 무혁의 관심을 끌고자 안달이 나 있는 여자.
조장미라면 한용식조차도 치가 떨렸다.
“그렇단 말이지.”
“근데 지금 좀 이상해. 그저께까진 분명 서울에서 포착이 됐는데, 그 이후로 행적이 묘연하다는 것 같아.”
“그래?”
“응. 만약 내 예감이 맞는다면…….”
지금쯤 거기에 가 있을지도 몰라.
용식의 중얼거림은 한발 늦었다. 저 복도 너머를 걸어오는 하얀 원피스의 여자가 낯이 익었다.
“안녕, 오빠.”
뒤에 경호원을 둘이나 대동한 귀한 집 아가씨께서 친히 여기까지 강림하실 줄이야.
객실을 정확히 알고 찾아온 걸 보니 소영하를 보낸 게 누구인지는 이제 안 봐도 명확해졌다.
“벌써 여기 와 있네.”
“뭐야, 너 설마 만난 거야?”
“나중에 얘기해.”
전화를 끊고 무혁은 제 앞까지 온 장미를 마주했다. 언제나 이런 패턴이었다. 그가 어디에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알려주지 않아도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감시하곤 했다.
“오랜만이네.”
“조장미.”
“보고 싶었어.”
연인을 향하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다가오는 손을 매섭게 뿌리치자 뒤에 선 경호원들 역시 함께 움직였다.
“그러지 마. 오빠가 싫어하잖아.”
“주의하겠습니다. 아가씨.”
“그 여자는 벌써 자? 오빠가 고생이 많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 건지 혼자 후후훗, 하며 웃기까지 했다.
잘 정돈된 손톱으로 굳이 민재가 있는 객실 쪽을 가리키는 것만 보아도 조장미는 벌써 객실의 위치까지 모두 파악한 듯 보였다.
“애초에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약혼자를 보러온 게 죄는 아니잖아. 아니, 지금은 전 약혼녀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조장미.”
“오빠의 계획은 성공이야. 아빠는 벌써 노발대발 화를 내고 난리거든.”
마치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처럼 장미는 일방적인 대화를 쏟아냈다.
그녀의 특기다. 여기서 대답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분명 어떤 형태로든 활용하고도 남는다.
“나는 너와 한 번도 약혼한 적이 없어. 그 점부터 정정해.”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는걸?”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수습할 수 없다고. 장미의 일방적인 주장은 조원식의 이름값에 얹혀 사방팔방 퍼져 나간 지 오래였다.
이래서야 서동요와 뭐가 다를까. 일국의 공주가 외간 사내와 매일 밤 배를 맞춘다는 더러운 노래는 결국 그녀의 이름값을 떨어트리고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주었다.
무혁 역시 마찬가지다.
장미의 망상에 가까운 말들은 일방적으로 퍼져 나가며 어느샌가 무혁의 발목에 붙은 족쇄가 됐다.
“그래. 이제는 내가 유부남이라는 것도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이고.”
“그거야 이혼하면 그만인걸. 요즘 세상에 한 번 다녀온 게 흠도 아니고.”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저리도 확신하며 떠드는 것도 어찌 보면 재주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무혁을 앞에 두고도 장미는 까르륵 웃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참 잘 골랐어. 그 여자라면 아빠가 아무리 괴롭혀도 쉽게 안 떨어져 나갈 테니까. 성준범이 발작하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쓸모가…….”
“넌 여전하구나.”
경멸을 담은 한마디에 재잘대던 장미의 입술이 멈췄다.
힐난하고 화를 내고 그만하라고 소리칠수록 조장미의 행각은 더욱 악랄해졌다.
장미는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
솔직히 말해, 제정신이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넌 좀 병원에 가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내가 병원에 왜 가.”
“너희 어머니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
제 엄마 얘기가 나오자마자 장미의 눈빛이 돌변했다.
딸 얘기라면 그저 오냐오냐하는 제 아빠와 달리, 엄마 쪽은 조장미의 유일한 천적이나 다름없다.
매번 폭주하는 딸의 뒤치다꺼리는 모두 그 사람의 몫이었으니까.
적어도 딸을 애완동물처럼 여기는 조원식에 비하면야, 제 자식의 민낯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저 여자는 얼마나 갈 것 같은데?”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영광송까지 인용해가며 무혁은 장미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단 한 마디의 빌미라도 줬다가는 어떻게든 흠을 잡아 없던 문제도 만들어 낼 위인이다.
빈틈 하나 없는 무혁의 대답에 화가 난 건지 미소를 머금은 입 끝이 점점 파르르 떨려왔다.
“기대되네.”
소영하까지 들이밀었는데 더한 짓은 왜 안 할까.
남의 인생이야 망가지든 말든 아비나 딸이나 원하는 것을 위해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는 건 똑같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 날까지.”
이제는 석민재가 보내 달라고 해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무혁은 싱긋 웃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조장미의 속을 뒤집어놨다.
***
민재가 대화를 듣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배고파.”
침대에 누워 영화라도 보려다 문득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자기에는 뭔가 출출한데, 어째 오늘따라 어미 새처럼 굴던 진무혁이 잠잠했다.
“잠깐 편의점이라도 다녀와야겠다.”
통화가 길어지는 건지 무혁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민재는 지갑을 챙기고 객실 문에 손을 뻗었다.
“참 잘 골랐어. 그 여자라면 아빠가…….”
문밖에서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완전히 열기 전 민재는 밖에서 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저 여자는 얼마나 갈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만이 참 잘 들렸다. 아주 살짝 문을 열자 그제야 문 밖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음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 날까지.”
“지금 나랑 장난해?”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감미로운 무혁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여유조차 느껴지는 목소리에 대충 뒤통수만 봐도 저건 분명 제 남편인데.
앞에 선 여자는 뒤에 검은 양복 입은 남자를 둘이나 대동하고서 그를 향해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아, 넌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뭐?”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법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구나.”
아. 저게 그 사람이구나. 건드리면 톡 부러질 것처럼 가녀린 여자를 앞에 두고 무혁은 신랄한 말을 쏟아부었다.
애초에 약자라고 봐주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무리는 아니다.
민재 앞에서는 애써 숨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진무혁은 원래 그리 상냥한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석민재 하나밖에 없으니까.”
자신이 엿듣고 있다는 걸 알고 한 말 같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일단 문부터 닫고서 민재는 벌렁대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무슨 말을 저렇게 진짜처럼 하는 거야…….”
무혁이 조원식의 집에서 자랐으니까, 두 사람이 같이 살았다는 건 반쯤 놀리려고 한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약혼 얘기가 나왔을 때 날을 세운 것도 반쯤은 질투에 가까웠다.
“여전히 비참한 짝사랑 중인가 보네, 진무혁.”
신경이 박박 긁힌 탓에 그녀의 가냘픈 가면이 깨졌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저쪽은 이제 민재를 걸고넘어졌다.
“그럼 뭐해, 저 여자는 어차피 오빠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데.”
“누가 그래요?”
듣다 듣다 저 말만은 그냥 넘길 수 없어서 민재는 문을 박차고 나섰다.
진무혁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다.
소영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제 감정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에게는 이 결혼이 비즈니스였다고 해도 석민재 자신에게는 아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