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내 앞에서는 안 그랬는데.
혜성 그룹 선대 회장이 죽고 이사회는 선대 회장의 장남을 회장 자리에 올렸다.
일찌감치 경영 수업을 받던 회장 자리를 물려받자마자 해외 건설 수주로 연이어 대박을 터트렸다.
정계의 맹주로 무섭게 성장하던 그가 결혼 상대로 마음에 둔 건, 당시 대학교 삼학년이었던 수정일보의 장녀였다.
- 절대로 안 돼!
수정일보 측에서는 자식이 딸만 둘이라며, 데릴 사위를 들이기 위해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성 회장은 결국 오랜 구애 끝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당신의 영원한 연인이 되고 싶습니다.]
프러포즈 당시 성 회장이 했던 말은 광고 카피로까지 활용되며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결혼하고 다음 해, 성 회장 부부는 엄마 쪽을 꼭 빼닮은 귀여운 딸을 얻었다.
모두의 축복속에 기쁨만이 가득했던 시기도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성 회장 부부의 아이는 저택에서 홀연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 언니, 제발 정신 차려.
당시 갓 대학생이 됐던 홍옥자는 쉰이 다 된 지금도 그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언제나 완벽하고 우아한 태도를 갖췄던, 제 우상이었던 언니가 그토록 무너져내린 모습은 태어나 처음 봤다.
‘그 사람과 결혼하지만 않았어도.’
혜성 가와 얽힌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철저한 비공개로 진행됐다.
뒤늦게나마 공개수배를 제안했지만 혜성 가의 친족들은 일찌감치 사라진 아이를 포기해버렸다.
이혼이냐, 아니면 양자를 들일 것이냐.
차라리 그때 언니를 놓아줬다면 조금은 무언가 달라졌을 지도 모르지만.
아내를 사랑했던 성 회장은 끝내 언니를 놓아주지 않았다.
“개자식.”
말 많고 탈 많은 혜성 가에 시집간다고 했을 때부터 탐탁지 않았다.
굳이 혜성이 아니더라도 혼인을 원하는 사람이 줄을 섰건만, 그런 남자를 택한 언니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제 조카의 자리를 밀어내고 들어온 성준범은 어린 시절부터 혜성 가를 차지하려는 야욕이 눈에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언니는 병약한 몸으로 미아 찾기 운동은 물론 여러 사회활동에 투신하며 혜성 가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평생을 바쳤다.
‘내가 그걸 두고 볼까 봐?’
지금도 언니가 쓰러진 성 회장 병실에만 붙어 있는 사이, 성준범은 혜성의 이름을 팔아 온갖 사업에 손을 대며 제 개인 명의로 재산을 빼돌리기 바빴다.
이대로 회사를 매각해버리기라도 하면 혜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 테니, 어쩔 수 없이 홍옥자 본인이 나섰다.
“이거, 유전자 분석 맡겨줘. 지난번에 받아온 언니 머리카락이랑 같이 하면 될 거야.”
“하지만 사장님. 당사자 동의도 없이 이렇게 했다가는…….”
“뭐?”
뭐라고 말을 하던 비서도 홍 사장의 한마디에 군말 없이 입을 다물고 미리 준비한 샘플 봉투에 머리카락을 담았다.
“준비하겠습니다.”
봉투를 가져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홍 사장은 민재가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석민재는 보면 볼수록 눈이 갔다.
원래 동정심 같은 걸 품는 성격도 아니건만, 병든 할머니 때문에 제 꿈까지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짠했다.
게다가 표정 변화가 유독 드러나지 않는, 그러면서도 단아한 인상이 제 언니를 쏙 빼닮았다.
“어차피 진짜든 아니든 이젠 상관이 없지만.”
남편인 진무혁은 잠시 판을 흔들 장기말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홍 사장은 달랐다.
민재를 보고 있으면 저 애를 어떻게든 혜성 가의 딸로 만들고 싶었다.
성준범도 양자로 들였는데 석민재를 양녀로 들이지 못할 이유는 또 뭐가 있을까.
잔뜩 일그러질 성준범의 얼굴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그러니 제발 죽지 말아요. 형부.”
다 죽어가는 형부가 진짜 죽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정말로 죽어버리면 제 계획도 모두 쓸모없어질 테니까.
이미 떠나버린 민재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홍 사장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
“후.”
잘 풀린 건지 망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한 짐 덜었다.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겨우 안심한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앞에는 안 팀장과 무혁이 서 있었다.
“어떻게 됐어?”
“잘 풀렸어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민재의 오케이 사인에 안 팀장은 쾌재를 부르며 다시 팀원들에게 돌아갔다.
다만 무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는 민재의 머리에 꽂힌 핀을 살폈다.
“이건 웬 거야?”
“아, 사장님이 주셨어.”
원피스와 잘 어울릴 거라고 챙겨줬다는 말에 무혁은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뭔가를 확인해보겠다며 그는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정말로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혼자 안절부절못하는 제 모습이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무혁에게 제 존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를 바득바득 갈며 회의실로 가려는데 직원 하나가 민재에게 말을 걸었다.
“고객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염려가 가득한 직원의 물음에 민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직원은 영문 모를 말을 쏟아냈다.
“어제 많이 넘어지셔서, 아직 속이 안 좋으신 거라면 약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약이라고 하시면…….”
“어제 도수가 너무 높은 칵테일이 제공되어서요. 남편분께 못 들으셨나요?”
가족 휴양지를 표방하는 이곳에서 제공하는 칵테일은 사실상 음료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새로 온 바텐더가 그 점을 잊은 탓에 첫 손님이었던 민재는 일찌감치 뻗고 말았다.
“남편분께서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만 이 일은 매니저인 제 감독 책임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몸도 잘 못 가눈 탓에 몸 여기저기를 부딪치며 넘어졌고 올라간 뒤에도 속이 좋지 않아 한참 고생했다고.
리조트 측에서는 여직원들을 보내 뒷수습을 돕겠다고 했지만, 무혁은 모두 거절하고 혼자 민재의 수발을 들었다고 했다.
- 아내 일은 제가 책임질 테니 괜찮습니다. 가서 볼일들 보세요.
책임 소재도 묻지 않고 알아서 하겠노라 선을 긋는 모습이 퍽 차가워서 매니저는 더욱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저는 괜찮아요. 어젠 저도 좀 급하게 마신 게 있으니, 따질 일은 아니죠.”
“그래도 혹시나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찾아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깍듯이 사과하는 태도에 민재도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대신 수습하는 것도 그렇고, 매니저의 고생이 유독 눈에 띄였다.
해당 내용도 보고서 옆에 메모해두고 민재는 어제 일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그러니까.’
아마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을 공산이 컸다.
옷을 갈아입힌 게 매우 신경이 쓰이긴 해도 결과적으로 진무혁과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란 얘긴데.
“뭐야, 진 변 어디 갔다 온 거야?”
“잠시 볼 일이 있어서요.”
별일 없었다는 듯 손을 털고서 무혁은 곧장 민재의 옆에 와 앉았다.
그러고서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만지작거렸다.
빈 박 변호사 자리를 누구로 채울까 다른 사람들이 논의하는 사이에 민재는 슬그머니 옆에 앉은 무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제, 나 많이 토했어?”
“이제 기억이 나나 보네.”
일부러 말을 안 하고 약을 올린 건 괘씸하지만, 옷까지 갈아입힐 정도면 보통이 아니었단 얘긴데.
무혁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서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뭐?”
“대신 앞으로 술은 절대 금지야. 정말로 꼭 마셔야 하면 내 앞에서만 마셔.”
은근히 와인 같은 건 먼저 권하던 사람이 금주령을 내릴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망가졌단 걸까.
절망하는 민재의 속도 모르고 무혁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웃기만 했다.
정말로 무슨 보호자를 넘어 아빠라도 된 것처럼 구는 그의 속을 이해할 수 없다.
친아빠도 이런 상황에서는 잔소리라도 한 번 했을 것 같은데.
“그럼 일단 보고서 쪽은 나중에 서울 올라가서 하고 우리도 좀 쉬지.”
안 팀장은 술에 떡이 됐던 민재 쪽을 힐끔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그에 질세라, 문성희 변호사 역시 한마디를 보탰다.
“그러니까. 나도 이제 애들 보러 가야 해.”
다들 내색은 안 해도 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서 그런지 업무 이야기는 초스피드로 막을 내렸다.
어차피 일은 알아서들 제 몫을 하는 사람들이니, 다음 주에 출근할 즈음이면 곧 안 팀장 책상 위에 각자 올린 보고서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터였다.
“우리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직 불편하면 방에 올라가서 누워 있어.”
“됐어. 내 건 내가 할 거야.”
무슨 애 취급하는 무혁의 태도에 화가 났다.
어차피 여기는 반쯤 일로 온 거니까 둘째 날은 근처 카페에 노트북을 펴고 둘 다 보고서를 썼다.
분노의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민재는 슬쩍 화면 뒤에 앉은 무혁을 훔쳐봤다.
평소와 달리 안경을 쓰고서 그는 화면 너머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본인은 아는 걸까.
제 앞에서는 마냥 웃고만 있지만 원래 살뜰하거나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내 앞에서는 안 그랬는데.’
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런 식이었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진무혁도, 제 앞에서는 유독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엉뚱한 면모를 보여주곤 했다.
- 결혼하자. 민재야. 내가 정말 잘할게.
처음 밤을 보낸 날, 엉엉 우는 제 손을 잡고 쩔쩔매던 모습은 제법 귀여웠다.
굳이 졸업도 하기 전에 사법 고시를 서두른 것도 민재와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합격만 하면 청혼할 거라고, 일찌감치 프러포즈 준비에 여념 없었던 그를 매섭게 차버린 건 자신이었다.
“미안해.”
“뭘 그런 걸 가지고.”
차라리 화라도 냈다면 덜 미안했을 텐데.
무혁은 예전 그 일도, 어제의 사건 사고조차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자기 일에 집중했다.
***
오늘도 병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안 대표는 환자복을 단정히 가다듬고서 손에 들린 꽃다발을 곱게 폈다.
“여사님. 저 안 아무개입니다.”
“들어오세요.”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안 대표의 기행은 이제 병원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재미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병원 안의 유일한 웃을 일이나 다름없다 보니 다른 환자들도 이제는 이 상황을 퍽 즐기고 있었다.
민재의 결혼 이후 건강이 퍽 좋아진 할머니는 이제 침대에서 거동도 제법 할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많이 건강해진 덕분에 할머니는 그동안 안 대표가 전해준 말린 꽃을 모아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비누며 양초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거 저희가 만든 비누예요. 영감님도 한 번 써보세요.”
“어허, 이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꽃은 가지고 오지 마세요. 볼일이 있으면 그냥 말로 하시고.”
여지없이 잘라버리는 할머니의 말에 안 대표도 풀이 죽었다.
그래도 말은 섞게 허락해줬으니 그는 할머니의 침대 옆에 앉아서는 옆에 붙은 심전도 기계를 살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우리 손주 사위 덕분에 많이 좋아졌지요.”
매번 약혼자의 존재를 말하면서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던 손녀가 미덥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차라리 이 늙은이가 빨리 죽어야지 싶으면서도, 그랬다가는 혼자 남을 손녀 걱정에 차마 쉬이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애는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릴 테니까.
그 고생을 하는 걸 알면서도 차마 말리지 못한 건 민재 본인을 위해서였다.
“그 청년이라면 나도 믿을 수 있어요. 둘이 학교 다닐 때부터 종종 바래다주러 왔었으니까, 나도 몇 번 봤었지.”
“그러셨군요.”
“곧 민재 부모한테도 소개하기로 했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사고가 나서 그만.”
만약 부모님께 인사만 했었더라도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아니, 민재가 그토록 쉽게 물러나는 일은 없었을 거였다.
“아무 말도 안 하고서,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알고 보니 그날, 민재는 그토록 좋아했던 제 남자친구에게 제 입으로 이별을 고했다.
첫사랑이었으니까. 그 이후 유난히도 말수가 적어진 손녀는 더욱 쉽게 웃지도 울지도 않게 됐다.
“몹쓸 것이라도 만나면 어쩔까 싶었는데. 그래도 둘이 다시 만난다니 다행이었지요.”
그러던 아이가 제 남편 앞에서는 그나마 조금은 웃기도 했다.
못 본 사이 무혁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제법 믿음직한 성인 사내로 자랐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아이들인데, 이제 와서 헤어지라고요?”
“여사님. 제 뜻은 그런 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봐 온 탓에 장난을 친 거라고 변명해본다 한들 이미 늦었다.
풀이 죽은 안 대표를 앞에 두고서 할머니는 지난번 무혁이 한 말을 떠올렸다.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민재만 봐도 둘 사이에 아직 애가 생길 기미는 보이지 않는데.
제법 서두를 줄 알았던 무혁은 아무래도 그런 쪽으로는 욕심이 없어 보였다.
- 저는 민재의 애인이 아니라, 가족이 되고 싶었던 거니까요.
본인이 일찍 가족을 잃었으니 으레 서두르지 않을까 싶었건만, 무혁은 고개를 젓고서 저 멀리 가버리는 민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원래도 서로 볼꼴 못 볼 꼴을 다 본 사이라 어지간한 허물도 덮어주리라.
“그러니 우리 손주 사위한테 못되게 구는 건 그만두세요.”
사랑이 고픈 민재를 외롭게 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는 합격점을 주고도 남는다.
할머니의 단언에 안 대표는 풀이 죽어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