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신혼부부니까 그럴 수도 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재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무혁의 자칭 약혼녀라는 그 여자 이야기가 나온 뒤로 적잖이 속이 뒤틀렸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 안 하던 짓을 수시로 하게 되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석민재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소영하가 제아무리 예쁜 여배우와 합을 맞춰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질투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키스 신 이야기를 할 때도, 솔직히 적당히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다.
“저기…….”
“그럼 슬슬 일어나볼까.”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고서 무혁은 바지만 적당히 걸쳤다.
다행히 속옷은 다 잘 입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뭔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게 다 뭐야.”
시트를 걷어 보니 팔과 다리 여기저기에 멍자국이 남았다.
반쯤 얼이 빠져 있는데, 그 사이 타올을 목에 두른 무혁은 냉장고에서 갓 꺼낸 생수를 가져와 침대 위에 앉은 민재에게 던져줬다.
“목마를 텐데, 이것부터 마셔.”
“어, 어떻게 알았어?”
“온몸에 수분이 다 빠졌을 텐데. 당연히 그렇겠지.”
혼이 빠져버리기 직전인 민재와 달리 무혁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그대로 샤워를 하러 들어가 버렸다.
분명 두 사람은 예전에 사귀었다지만 그래도 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뭐야 이게.”
일단 물을 마시고 민재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수영장에서 그렇게 놀았으니 몸이 피곤한 건 당연한 거긴 한데.
“내 옷이 없어.”
어제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 입고 있던 옷이 하나도 없다.
지금 입고 있는 것도 어제 입은 건 아니었던 걸 봐선.
아무래도 진무혁이 직접 갈아입힌 게 분명했다.
“거기 앉아서 뭐 해?”
“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씻어. 안 팀장이 아홉 시까지 내려오라고 했어.”
아마 오늘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야 할 테니 이렇게 놀고 있을 틈이 없긴 하다지만.
한없이 의식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무혁의 태도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더운물로 샤워를 하는 와중에도 제 몸에 남은 자국들이 영 심상치 않다.
“이건 키스 마크보단 어디 부딪친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많지 않아 세심하게 관찰할 시간은 없다지만 아직은 확실히 뭐가 뭔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부랴부랴 머리부터 말리고 내려가니 안 팀장은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불쾌한 기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늦었어.”
“죄송합니다. 팀장님.”
“신혼부부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안 팀장도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마.”
뒤에서 얄밉게 한마디를 보태는 문성희 변호사가 참으로 원망스럽다.
저런 말을 들어도 무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박 변호사의 행방을 물었다.
“박 변호사는 어디를 간 겁니까?”
“말도 마. 그 자식, 어제 내 가방에 있던 자료들 사진 찍다가 현장에서 걸렸어.”
“자료를요?”
“내부 스파이가 그놈이었다고!”
어차피 이 바닥에는 도덕 같은 건 없으니, 서로의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지만.
A&Z의 자료가 성준범 이사 쪽으로 유출되는 일만은 피하려 했는데 기어코 박 변호사가 사고를 치고 말았다.
“뭐라고 꼬여낸 건진 몰라도, 면허까지 걸고 그런 짓을 하다니 제정신이야?”
“조원식 변호사라면 그러고도 남을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손에서 자란 무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박 변호사 하나 따위야 면허가 날아가든 말든, 본인이 원하는 것만 얻어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조원식이라면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내고서 쓸모가 없어지면 다 쓴 휴지처럼 얼마든지 쓰다 버리고 남을 위인이다.
아버지는 어째서 그런 사람과 친구로 지냈던 걸까.
“뭐 어차피 대단한 건 없으니까. 그래도 우리가 여기 와 있다는 것까진 이미 다 새어나간 모양이야.”
“골치 아프게 됐네요.”
이쪽에서 인수 움직임이 보이면 성준범 이사가 또 어떤 훼방을 놓을지 모른다.
그 이전에, 홍 사장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을 터.
골치 아픈 상황이다. 조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안 팀장은 결국 민재에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홍 사장한테 얘기를 잘해봐야 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죠.”
아무래도 티라노사우루스의 조련사 역할이 돌아온 모양이다.
정말 박 변호사가 내부 정보를 유출한 거라면, 성준범 쪽 사람인 소영하가 민재의 객실을 정확히 알고 찾아온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일이 참 더럽게 꼬여버렸다고 해야 할지.
어제는 애 보기에 이제는 어른 보기라.
조식을 마치고 민재는 어제 가방에 들어 있던 원피스로 갈아입은 후, 홍 사장의 객실로 찾아갔다.
“내가 같이 갈까?”
“괜찮아. 혼자 갈게.”
습관처럼 무혁이 손을 뻗자 갑자기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괜히 두 뺨이 화끈거려서 평소처럼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어디까지나 목적이 있어서 시작된 관계니까.
진무혁에게는 이조차도 의무인 걸지도 모른다.
“뭐 이래.”
혼자 잔뜩 의식하고 민망해하는 자신만 바보가 된 것 같다.
습관처럼 하는 스킨십조차도 사이가 좋아 보이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이토록 그를 남자로 의식하게 되는 건 정말 민재 혼자뿐인 걸지도 모른다.
“홍 사장님을 보러 왔는데요.”
차라리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비서들은 민재가 오자 반색하며 서둘러 문을 열어줬다.
객실 안은 조용했다. 아직 자는 건지 방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조심스레 노크하고 침실 문을 열자 침대에는 홍 사장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슬슬 일어나실 시간인데 저희가 깨우면 화를 내셔서요.”
홍 사장이 민재를 특별히 예뻐하는 건 진작 다들 알고 있으니까.
난감해 보이는 비서들의 눈초리에 한숨이 절로 났다.
어쩔 수 없이 민재는 조심스레 홍 사장 곁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사장님. 이제 슬슬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으……. 내가 깨우지 말라고!”
예상대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 비몽사몽 하는 홍 사장은 짜증이 가득 섞인 채 신경질을 부렸다.
뭐라고 화를 내려던 그녀는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민재를 마주 봤다.
“민재?”
“네. 저 석민재입니다.”
문밖에서 눈치만 보는 비서들을 한 번 째려보고 홍 사장은 민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같은 여자니 별로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곤란한 얼굴로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옷 갈아입고 나갈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줘.”
“네. 사장님.”
막무가내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한 대응이 놀라웠다.
소파에 앉아 홍 사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래 걸릴 것 같아?]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물어볼까 말까.
차라리 얼굴을 안 보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민재는 화면을 앞에 두고 잠시 고뇌에 빠졌다.
한숨을 푹푹 쉬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시간이 참 잘만 갔다.
삼십 분쯤 후, 홍 사장은 완벽한 정장 차림으로 나와 민재 앞에 앉았다.
“그래, 날 보자고 했다고?”
“그게 말이죠.”
차라리 어제처럼 푼수 같이 굴면 나았을 텐데.
갑자기 일 얘기를 꺼내자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평소 민재를 참 예뻐라 하던 홍 사장이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찾아온 속셈을 벌써 진작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실은……. 어제 그 일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일단은 소영하가 찾아온 연유부터 설명해야 한다.
심각한 민재의 표정을 보며 홍 사장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어제 그 일은 나도 유감이야.”
“네.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전부 저 때문인 것 같아서 입장이 많이 난처하네요.”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내부 정보가 새어나간 원인은 성준범 본인보다는 소영하가 수소문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물며 성준범 이사는 민재라면 치를 떨 정도로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했다.
좋든 싫든 저쪽과의 악연에 불을 붙인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게 왜 민재 씨 잘못이야?”
“저 때문에 사장님께도 폐를 끼친 것 같아서, 일단은 저희 내부에서도 다시 한번 인원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저쪽과 얽히게 되는 거라면 민재는 이 사건에서 빠지는 게 나을 것이다.
그래서 한 말이었는데 홍 사장은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거야?”
“네?”
“어제 가방 가지고 장난친 것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그렇다고 일에서 빠진다는 게 어딨어?”
아주 잠깐, 이 상황이 뭔가 고민했지만 금방 오해라는 걸 알아차렸다.
다행히 민재의 포커페이스는 당황한 기색 하나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평정을 찾고 있다.
“그게 말이죠.”
어디서부터 얘기를 하면 좋을까.
어쩐지 약삭빠른 직장인이 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지만, 민재는 요령 좋게 임기응변을 펼쳐나갔다.
“소영하 씨가 그렇게 찾아온 것도 그렇고, 성준범 쪽에서 저희 내부 사람을 빼가려고 하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요.”
“그놈이 원래 그런 놈이야. 민재 씨한테도 뭐라고 해코지한 거야?”
“처음 문제가 됐을 때, 제일 먼저 절 자르라고 했었습니다. 지금도 저희 내부 인원을 빼가려고 하는 것 같고요.”
“뭐?”
자세한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홍 사장이 먼저 묻기 전에는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홍 사장은 성준범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며 슬쩍 제 허물을 덮기 바빴다.
“어제 그건 그냥 귀여운 장난이니까. 민재 씨도 너무 화내지 마. 응?”
“그러면 저는 남고, 다른 팀원들을 개편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응. 그건 안 팀장이 알아서 하라고 해.”
다행히 홍 사장은 이런 사태도 이미 헤아린 모양이었다.
일단 최종 결재권자의 결정이니 추후 투입 인원이 바뀐 문제가 될 일은 없을 터.
자세한 사항은 안 팀장에게 모두 떠넘기기로 하고 홍 사장은 원피스를 입은 민재를 빤히 바라봤다.
“그나저나 원피스가 참 잘 어울리네.”
“네. 저한테 딱 맞아서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아린이가 잘 자랐으면 딱 민재 씨만 한 나이였을 텐데.”
홍 사장은 일부러 민재의 옆자리에 앉아 애틋한 눈빛을 보냈다.
본인은 미혼이니 자식은 아닐 테고, 아마 행방불명됐다는 그 아기에 관한 얘기인가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그 애도 어디선가 잘살고 있겠지?”
“세상엔 아직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혜성 건을 조사하며 민재도 제법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그 일 이후 혜성에서는 따로 재단을 만들어 실종 아동 찾기 캠페인은 물론, 가출 아동 쉼터 등 다양한 복지 지원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쁜 사람 안 만나고. 이렇게 예쁘게 잘 자라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홍 사장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서 민재가 먼저 손을 뻗어 손을 꼭 잡아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부모와 생이별을 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인데.
‘그 애는 좋겠다.’
보육원 앞에 버려진 자신과 달리, 사라진 아기를 이날 이때까지도 찾아 헤매는 부모도 있다.
그래서일까, 뒤늦게라도 찾아보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 친부모가 아주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분도 이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걸 안다면 돌아오고 싶을 거예요.”
“그럴까?”
“네. 분명 그럴 거예요.”
가식 하나 얹지 않은 진심으로 홍 사장을 위로했다.
조카가 많이 보고 싶은 건지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민재를 꼭 안았다.
“그 애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
“사장님.”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울고 나서야 홍 사장은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못 보일 꼴을 보이네. 머리도 나 때문에 다 헝클어지고.”
“저는 괜찮아요.”
“잠시만 기다려봐. 빗을 가지고 올게.”
머리가 조금 흐트러진 정도는 괜찮은데, 홍 사장은 굳이 빗을 가져와서는 민재의 머리를 곱게 빗었다.
정말로 머리만 빗고 넘어가려나 싶었는데,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홍 사장은 민재의 머리에 핀을 꽂아줬다.
“사실은 이것도 주고 싶었는데, 부담스럽다고 할까 봐 못 넣었지 뭐야.”
“예쁘네요.”
다소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홍 사장의 손길은 참 섬세했다.
가볍게 머리카락의 절반 정도를 틀어 올려 핀을 꽂으니 단아함이 배가 됐다.
거울을 보니 큐빅이 박힌 리본 머리핀은 원피스의 색과 딱 맞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야. 예쁘게 써줘.”
아무래도 혼쭐이 날 뻔했는데 홍 사장은 정말로 민재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까지 받고서 민재는 안심하고 현재 상황을 가볍게 브리핑했다.
조사 자체는 순조롭고, 이미 인수 자체가 불발된 성준범 쪽에서 이쪽에 훼방을 놓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응. 잘하고 있어. 믿음직스럽네.”
“저희 내부에서도 보안 부분은 더욱 강화할 테니, 이번 건 최종 보고는 안 팀장 통해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쉬엄쉬엄하고 저녁엔 재밌게 놀기도 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무를 마치고 민재는 이만 실례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 사장은 끝까지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아무래도 안 팀장이 일부러 민재를 보낸 수가 뻔히 보이긴 했지만, 이쪽도 무혁이 없는 자리에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빗에 남은 민재의 머리카락 몇 올을 거머쥐고서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혁이 녀석은 아닐 거라고 했지만.’
소름 끼칠 정도로 언니를 빼다 박은 저 아이를 볼 때마다 의심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