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우리 민재가 왜 이렇게 화가 난 걸까?
“평소와 다름없단 말이지.”
“네. 아가씨.”
조장미는 망원경으로 수영장을 훔쳐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화를 확인해봐도 스파이 쪽은 영양가 없는 보고만 늘어놓았다.
게다가 소영하 쪽은 연락 하나 남기지 않고 그대로 서울로 돌아가버렸다.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장미는 지금 이 상황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직접 나서면 아빠가 뭐라고 하겠지?”
“절대 안 됩니다.”
“알아. 나도 홍 사장은 무섭거든.”
그 여자 앞에서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홍옥자와 척을 져서 무사히 넘어간 사람이 없다.
처음 그녀가 사장 자리에 올랐을 때 모 국회의원은 일부러 국정감사에 불러다가 제대로 망신을 줬다.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데! 어딜!
당시 암탉 발언으로 헤드라인을 독차지한 그는 그해 국정감사의 스타가 됐다.
하지만 얼마 후 수정일보 정치부의 손에 혼외자의 존재는 물론 해외 원정도박까지 발각되어 지금은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다.
그런 징그러운 인간이 왜 하필이면 석민재를 싸고 도는 건지.
즐겁게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장미는 속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아가씨.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겁을 먹고 도망칠 줄 알았던 석민재는 생각보다 멀쩡한 얼굴로 태연히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분명 소영하와 마주쳤을 텐데, 숨지도 달아나지도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 할 터.
여자쪽에 손을 쓸 수 없다면 이제는 진무혁 본인을 공략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혁 오빠는 짜증낼 때 제일 잘생긴 것 같아.”
“예?”
“사람을 참 오싹하게 만들거든. 저 여자는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겠지?”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을 질문을 혼자 중얼거리며 장미는 행복해 보이는 무혁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래도 그가 대학에 가기 전까지 십 년이 넘게 같은 집에 살았지만, 장미는 진무혁의 웃는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나사가 몇 개는 빠진 사람처럼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참 낯설어서.
장미는 그게 몹시 불만이었다.
***
하루가 순조롭게 지나갔다.
침울할 줄 알았던 민재는 문 변호사의 아이들과 놀아주며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영하가 왔었다고?”
그런 탓에 안 팀장은 저녁을 먹으러 온 후에야 뒤늦게 사정을 들었다.
“객실을 정확히 찾아온 걸 보면 내부 정보가 새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그런 것 치고는 멀쩡하네.”
“제가 있으니까요.”
조금은 오만하기까지 한 진무혁의 태도에 안 팀장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매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결과적으로 석민재는 진무혁과 결혼한 이후로 훨씬 밝아졌다.
지금도 민재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저녁을 먹고 있다.
회사에서는 무표정하니, 제법 냉랭한 기운을 뿜어내곤 했는데 뜻밖에도 아이들 앞에서는 제법 웃기도 잘 웃었다.
“그나저나 애들을 참 잘 다루네. 난 하도 시끄러워서 손도 못 대겠구나 싶었는데.”
“민재 어머니께서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오래 하셔서요. 민재도 자주 따라 다녔습니다.”
“좋은 일 하시는 분이었구만.”
“좋은 분이셨지요.”
가엾은 아이가 눈에 보이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민재는 그런 제 어머니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피곤하지? 애들 슬슬 재우러 데리고 갈 테니까, 민재 씨도 좀 쉬어.”
“싫어! 언니랑 더 놀 거야!”
“또 고집 피운다. 이리 안 와?”
바둥대던 문 변호사의 딸들은 엄마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내일 또 놀자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서 민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자리가 비었네.”
민재 주변 자리가 비고 나서야 두 남자는 겨우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이 먹던 접시를 정리하면서도 민재는 귀찮은 내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애들 맡겨서 미안하다고 문 변호사님이 제가 할 것까지 다 봐 주셨는걸요.”
“어지간해선 안 그러는 사람인데, 그래도 양심은 있네.”
“그래서 말인데요.”
나머지는 문 변호사가 살펴줄 테니 민재는 아이들과 놀며 확인한 것들을 정리해 보고했다.
“수영장 미끄럼 방지 시설 쪽은 점검이 필요할 것 같아요. 키즈 풀 쪽도 아예 따로 섹션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어린이 전용 풀장을 늘리고, 네 곳 중 한 곳은 아예 키즈 프리 존으로 하면 되겠네.”
개선할 만한 사항들을 정리해나가며 민재는 평소처럼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박 변호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박 변호사님은요?”
“아까부터 배가 아프다면서 방에 뻗어 있어.”
“큰일이네요.”
“큰일은 무슨. 계속 폰만 보면서 딴생각하는 것 같은데. 계속 일할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민재조차 그 일을 겪고도 자기 몫을 다 하고 있건만.
“저래서야 내년 계약 갱신은 어려울걸.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딱 그 말이 맞아.”
말은 그렇게 모질게 하면서도, 안 팀장은 상태를 봐야겠다며 한발 먼저 객실로 올라갔다.
안 팀장까지 자리를 비켜주고 난 후에야 비로소 무혁은 민재와 둘만 남을 수 있었다.
해야 할 말이 많은데 누가 먼저 해야 할지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술이나 한잔할까?”
무혁의 제안에 민재는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좋고.”
어색한 이 공기를 깨기 위해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
요란한 장식이 가득한 복도를 지나 두 사람은 리조트 내부에 있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
민재를 위해 달콤한 리큐르를 주문하고 무혁은 아직 물기가 남은 민재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줬다.
“춥진 않아?”
“괜찮아.”
“다행이네.”
정말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와 달리 민재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반투명한 칵테일을 앞에 두고서 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봤으면 좋겠어?”
무혁의 대답에 민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혁은 태연히 민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날 믿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다른 사람들 눈에야 충분히 다정한 부부로 보이겠지만 어쩐지 손끝이 차가운 건 기분 탓일까.
살짝, 무혁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영하가 뭐라고 했길래 아까부터 저기압이야.”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불편함을 진무혁만은 이리도 매섭게 알아차린다.
어차피 악에 받쳐 한 말이니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지만.
그래도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남아있다.
“약혼까지 했었다면서.”
“장미 얘기인 건가.”
진무혁이 저리도 친근하게 여자 이름을 말하는 건 민재도 처음 봤다.
괜히 속이 울컥해서, 민재는 앞에 놓인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 여자 이름이 장미구나.”
“조원식 딸이야. 조장미. 너보다 한 살 어리지.”
“그래서, 그 여자랑 어디까지 갔는데?”
누구인지도 알고 약혼을 했냐는 물음도 부정하지 않았다.
너무 태연한 그의 대답에 속이 끓어서 민재의 말투도 점점 날카로워져갔다.
“어딜 간 적은 없어. 그냥…….”
“그러면?”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혼자 오피스텔에서 살았으니 민재가 장미와 마주할 일은 없었다.
알음알음 무혁이 조원식의 딸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텐데도, 민재는 어쩐지 장미의 존재를 무척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귓불을 살살 만지며 무혁은 민재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약혼 얘기가 나온 걸 보면, 아무래도 소영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대강 추측이 가능했다.
‘독사 같은 여자.’
함께 사는 동안 장미와의 사이에서 좋은 기억 같은 건 없다.
처음에는 그래도 오빠, 오빠 하며 따르는 그 애를 미워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씩 커지며 장미는 무혁의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끼는 물건이 사라지고 곧 장미가 제 방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 오빠 방을 치워주려다 실수로 건드린 거예요.
-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잖니?
그 집에는 제 편이 아무도 없었다.
외동딸인 장미가 가련한 얼굴로 눈물이라도 한 방울 글썩이면, 그 애가 한 모든 일에 제법 그럴듯한 개연성이 생기곤 했다.
그렇게 장미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서 일부러 그의 물건을 버리고, 망가트리며 실망하는 모습을 즐기곤 했다.
무혁이 화라도 내면, 그때는 모든 게 고아인 무혁의 열등감으로 몰아가기 일쑤였다.
장미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건 돌아가신 아버지의 만년필 때문이었다.
- 키워준 걸 감사하게 여겨도 모자랄 판에, 오빠가 이런 걸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백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혁이 제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꼴을 못 봤다.
망가진 만년필은 어른이 된 후에야 겨우 고쳤지만, 조장미의 저 성질머리는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
비단 무혁뿐만 아니라 장미의 주변에선 늘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조원식의 든든한 뒷배 덕분에 언제나 쉬쉬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같이 살긴 했지.”
그런 인간과 결혼을 할 리가 없지만.
민재가 질투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들어서 무혁은 친절하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알려주기로 했다.
“같이 살았다고?”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민재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무혁은 아예 턱을 괴고서 마티니 한 잔을 더 주문했다.
“함께 산 건 어쩔 수 없지. 나도 그때는 미성년자였으니 선택권이 없었어.”
“아주 사이가 좋았겠네. 친오빠처럼 잘 해줬겠어.”
그걸 사이가 좋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렵겠지만 민재는 장미 앞에서의 냉랭한 제 모습을 모른다.
보여줄 생각도, 보여줘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으니까.
보드랍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무혁은 장난 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뭐, 잘 놀아주긴 했었지.”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는 민재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겨우 제 본심을 내보였다.
옆에 놓인 빈 잔이 점점 늘어가고, 어느새 취기가 오른 건지 민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만 마시고 슬슬 올라가자.”
“싫어, 더 마실래.”
무혁의 앞에 놓인 잔까지 빼앗아 들고서 민재는 얄미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내 마음이거든요. 진무혁 변호사 님.”
눈이 반쯤 풀린 걸 보니 반쯤 맛이 갔다.
너무 놀렸더니 오히려 역효과가 난 모양인데, 투덜대는 모습마저 너무 귀여워서 무혁은 그런 민재를 마냥 흥미롭게 바라만 봤다.
“우리 민재가 왜 이렇게 화가 난 걸까?”
입이 무거운 민재는 이런 상황이 아니고서야 절대 제 속내를 말해주지 않을 거다.
함정 수사를 펼친 덕분인지 드디어 굳게 닫혀 있던 민재의 입이 열렸다.
“나랑 헤어지면, 그땐 그 여자한테 가버릴 거야?”
“헤어질 생각 없는데.”
딱 잘라 말하는 그의 말에 민재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병실에 누운 민재의 할머니와 제법 오래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무혁은 비로소 민재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무서운 거겠지.’
할머니의 걱정처럼, 민재는 다시 혼자가 되는 상황을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약한 말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여자니까, 손은 많이 가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내가 그 여자한테 갔으면 좋겠어?”
빈말이라도 좋으니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다행히 민재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대로 무혁을 꼭 껴안았다.
“선배는 내 거야.”
두 사람이 사귀는 동안에도 민재는 그를 꼬박꼬박 선배라고 불렀다.
이렇게 본인이 편하게 느끼는 걸 보면, 아무래도 호칭 문제는 더는 건드리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이미 석민재 남편이니까. 다른 여자가 오라고 해도 안 갈 건데.”
“가지 마.”
울먹이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워서, 무혁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제 품에 안긴 민재의 등을 토닥여줬다.
“내가 안 갔으면 좋겠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민재를 무릎에 앉히고 살짝 입을 맞췄다.
진득한 키스의 여운이 이어졌다.
민재는 좀처럼 보기 힘든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빤히 바라봤다.
“선배.”
“응.”
“있잖아.”
낯선 장소에 온다면 관계가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을 거라는 그의 계산이 맞아드는 순간이 찾아온 모양이다.
눈부신 미소를 머금은 무혁을 앞에 두고 민재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속이…….”
“어?”
풀썩 쓰러지는 민재를 받아 안고서 무혁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작전 실패, 아무래도 이 방법은 더 쓰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
깨질듯한 두통이 이어졌다.
얼굴도 모르는 조원식의 딸과 진무혁이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 나랑 헤어지면, 그땐 그 여자한테 가버릴 거야?
- ……생각 없는데.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가지 말라고 제대로 말을 해야 했는데.
이토록 용기 없는 자신이 혐오스럽다.
“가지 마.”
소영하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마음 놓고 그 인간을 쫓아버릴 수 있었던 것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불구로 만들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라면 언제까지나 제 편이 되어줄 것 같아서.
민재는 점점 멀어져가는 무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간다고 했을 텐데.”
이마에 딱밤을 맞는 바람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깨질듯한 통증에 겨우 눈을 뜬 순간 셔츠 한 장 입지 않은 무혁이 제 앞에 누워 있다.
“어?”
폭신폭신한 호텔 베개와 푸근한 이불 아래가 어쩐지 허전하다.
온몸에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민재는 지금 제 꼴을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