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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38화 (38/103)

38화. 둘이서는 괜찮아.

이대로라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하루 애가 마르던 중 드디어 조장미에게 연락이 왔다.

- 타이밍은 적당히 볼 테니까, 그 여자가 혼자 있을 때 찾아가도록 해요.

내부에서 어떻게 정보를 받은 건지 조장미는 민재가 묵고 있다는 객실 넘버를 알려줬다.

쉬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매니저 하나만 달고 와서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부랴부랴 민재를 찾아왔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연락을 따라 문을 지켜보던 중 정말로 남자가 혼자 먼저 방을 나섰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소영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제 가방이…….”

“민재야.”

오랜만에 마주한 민재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비록 겁에 질렸다고 해도,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진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오랜만이야.”

“이거 놔!”

서둘러 문을 닫으려고 하기에 급하게 막았다.

어떻게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도록 소영하는 그대로 민재를 방 안에 몰아세웠다.

“이렇게 날 피하는 걸 보니, 네가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구나?”

이제라도 돌아올 기회를 줄 만큼, 이토록 도량 깊은 남자가 또 어디 있을까.

아예 바닥에 주저앉은 민재를 내려다보며 소영하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더 예뻐졌네. 얄미울 정도로.”

이 년을 만났어도 둘이서 호텔 한 번 와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언제나 집에서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보는 정도.

평범한 연애를 즐기기에 소영하는 너무나 유명했고, 그의 불규칙한 일정에 맞추기에는 민재에게도 직업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년을 사귀었다고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극도로 적었고, 함께 나눌 추억은 더더욱 없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

“그렇게 끝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 남자랑 아무리 즐거워도,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모두가 자신을 떠받들 때도, 그런 저를 특별히 여기지 않는 민재가 좋았다.

밖에서는 대단한 스타라 해도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소영하 쪽이 훨씬 더 깊은 감정을 품곤 했다.

- 좋아해. 민재야.

언제나 쏟아내던 사랑 고백에도 민재는 덤덤히 그래, 하고만 답했다.

제대로 사랑한다고.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한 번 들어보려면 그녀가 바라는 무언가를 들어줘야만 했다.

결혼 얘기도 그래서 나왔다.

- 나랑 결혼하면 할머니도 좋아하실 거야. 우리나라에 나보다 더 믿음직한 남편감이 어디 있겠어.

- 그거야 그렇겠지.

돈이라면 차고 넘칠 만큼 많다.

그동안 다른 애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값비싼 물건을 안겨봤지만, 민재는 그런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결혼과 할머니. 두 얘기가 나오면 민재도 조금은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봐줬다.

동그란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는 게 좋아서 소영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마음껏 쏟아냈다.

- 우리가 결혼하면 할머니도 우리 집에 모시는 거야.

- 정말 같이 지낼 수 있겠어?

- 그럼. 민재의 할머니는 내 할머니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친손자처럼 잘 알아 모셔야지.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민재는 그를 향해 웃어줬다.

언제나 무표정한 민재가 웃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자신이 걸었던 약속은 모두 민재가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걸었던 공수표였다.

“내가 뭘 어쨌단 거야.”

화를 내는 민재를 앞에 두고 소영하는 크게 웃었다.

처음 도착한 사진을 본 순간 대본에서나 보던 꼭지가 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진심으로 와닿았다.

“민재야. 이제 그만하자. 어차피 결혼할 사람이 따로 있는 남자랑 이러는 건 너무 우습잖아.”

“뭐?”

“그 남자. 어차피 얼마 있으면 다시 돌아갈 거라고 했어.”

조장미의 말을 모두 믿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민재에게는 제대로 통했다.

아니면 아닐 거라고 단호하게 맞받아칠 석민재도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건지 확신에 찬 그의 말을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진무혁의 약혼녀에게 직접 들었으니까.”

“약혼녀?”

“그래. 너 같은 고아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자리까지 올려줄 수 있는 그런 여자.”

민재가 고아였다는 사실도 조장미에게서 처음 들었다.

지금까지 진짜 핏줄도 아닌 할머니 핑계를 그렇게 대더니.

그것조차도 제 마음을 동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면 굳이 죄책감 같은 걸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석민재도 결국은 그런 여자였다면, 그녀 역시 지금까지의 제 행동을 비난할 자격 같은 건 없다.

“그 남자는 어차피 내 대용품일 뿐이잖아. 안 그래, 석민재?”

처음에는 민재가 그 남자 대신 자신을 이용한 줄만 알았다.

하지만 조장미에게 들은 전말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민재가 먼저 사법고시에 합격한 진무혁에게 이별을 고하고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졌다고 했다.

- 그 여자는 겁쟁이라서, 도망치는 법밖에 모르거든요.

예전 진무혁에게서 도망쳤듯, 이번에는 제 품에서 달아나려는 것뿐이다.

그 못된 버릇을 고쳐놓을 겸 소영하는 떨리는 민재의 손목을 꽉 거머쥐었다.

“실망이 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네 애인은 그 남자가 아니라 나잖아.”

“그래서 방송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인 거야?”

“봤구나?”

따져 묻는 민재의 말에 소영하는 오히려 기뻐했다.

환희에 젖은 얼굴로 그는 민재의 뺨에 손을 얹었다.

“CF가 몇 개 날아가긴 했다지만 뭐 어때, 난 소영하인걸.”

자아도취에 빠져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민재는 서둘러 가방에 든 제 폰부터 찾았다.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할 수는 없지.”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보다 소영하 쪽이 한 발 더 빨랐다.

순식간에 내동댕이 쳐진 폰은 어느새 벽 너머에 내동댕이쳐졌다.

“사랑해, 민재야.”

끔찍하기만 한 저 고백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잊을 만하면 되살아나 제 목을 조이는 악몽도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가 왔다.

“제발 좀 그만해!”

만약을 대비해 배워둔 호신술을 실전에서 써보는 건 처음이었다.

급소를 있는 힘껏 걷어차는 순간 소영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방에서 쫓겨난 무혁은 일층의 편의점에 들려 딸기 우유를 샀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지만, 그는 민재의 화를 풀어줄 방법을 이미 여럿 알고 있었다.

방 근처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객실에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카드키를 찍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 무혁의 눈 앞에는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으, 으윽…….”

바닥에 쓰러져 새하얗게 질린 소영하의 뒤로 바닥에 주저앉은 민재가 있었다.

“민재야. 괜찮아?”

“난 괜찮아. 이 인간이 문제지.”

경멸 섞인 눈으로 옛 연인을 노려보며 민재는 바닥에서 일어나 그에게 물었다.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는 날 덮치려고 했어. 이 정도는 정당방위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뭐.”

흉기를 쓴 것도 아니니 과잉 방위까지는 되지 않을 거였다.

겨우 고통에서 벗어난 소영하는 이를 악물고서 눈앞에 선 두 사람을 노려봤다.

“내가 누군지 몰라?”

“잘 알지요. 소영하 씨.”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무혁은 지갑에서 제 명함을 꺼내 그의 앞에 들이밀었다.

A&Z 파트너 변호사 진무혁.

정갈하게 쓰인 그의 이름 석 자와 연락처가 또렷하게 박혀 있는 명함은 소영하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물건이다.

“치료비든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제 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이건 가는 데 차비 하시고요.”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무혁은 제 지갑에 들어 있던 오만원 권 지폐를 모두 꺼내 소영하의 머리 위에 흩뿌렸다.

아래쪽에서 치미는 고통보다도 자존심을 잘근잘근 짓밟는 저 경멸 서린 눈빛 쪽이 훨씬 잔인하다.

“이, 이것들이 진짜!!”

소리를 지르며 멱살을 잡으려는데 뒤에서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왜 이렇게 안 내려오는 거야!”

우렁찬 외침과 함께 등장한 홍 사장의 얼굴은, 소영하도 익히 알고 있었다.

피디나 작가들에게는 함부로 굴어도 수정일보 홍옥자 사장의 눈 밖에 났다가는 앞으로 연예계 생활이 몹시 피곤해진다.

“아, 안녕하십니까. 루비 홍 사장님.”

“아니 이게 누구야. 준범이네 똥개가 남의 방에는 왜 쳐들어온 거래?”

예상대로 홍 사장은 대놓고 무안을 주며 소영하를 향해 가시돋힌 말을 쏟아냈다.

소영하는 HS엔터 소속, 성준범 쪽 사람이니까.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는 홍 사장 앞에서 괜히 책 잡힐 짓을 했다가는 그 여파는 지난번 생방송에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민재 씨와 따로 할 말이 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말입니다.”

“준범이 놈이 시켰어? 우리가 뭘 하는지 보고 오라고?”

“아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오해에 그는 두 손을 저으며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홍 사장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는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때 민재는 무혁의 어깨에 기댄 채 그대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저는 싫다고 했는데.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그만…….”

적어도 거기까지는 무엇 하나 거짓말이 없는 진실이다.

바닥에 뿌려진 돈다발과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진 민재의 옷차림도 그렇고.

남편의 품에 안긴 채 울먹이는 민재를 보며 홍 사장의 눈도 함께 돌아버렸다.

“이 훤한 대낮에. 유부녀를 데려다 몹쓸 짓을 하려고 했단 말이지?”

“아닙니다. 사장님. 저는 그저 얘기를…….”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안 팀장도 못 말릴 티라노사우루스의 분노가 소영하를 향했다.

“감히 정당하게 겨뤄도 모자랄 판에, 미남계로 내 사람을 빼가려고 들어?”

“아닙니다. 그게 아닌…….”

“사람들이 잘생겼다, 잘생겼다고 해주니까 진짜 네가 잘생긴 줄 알았어? 얼굴은 꼭 기생 오라비같이 히멀게가지고는, 못생긴 게!”

그동안 발연기네, 흐름을 못 잡네 온갖 이야기는 다 들어봤어도 못생겼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충격에 빠진 소영하는 내버려두고 홍 사장은 냉큼 달려와 울먹이는 민재의 눈물을 닦아줬다.

“왜 울고 그래. 저놈은 내가 다시는 얼씬도 못 하게 해줄게.”

“자꾸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이제 다시는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반쯤은 일부러 운 거겠지만 목소리에는 진심이 서렸다.

이젠 이런 짓도 할 줄 알게 된 민재를 꼭 안고서 무혁은 자존심이 짓밟힐 대로 짓밟힌 소영하 쪽을 바라봤다.

“형,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소란을 알아차린 매니저가 그를 데리러 왔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소영하는 민재 쪽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매니저의 손에 이끌려 그대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뚝, 울지 마. 저놈은 내가 단단히 손 봐줄 테니까 나만 믿어.”

급소를 걷어차인 탓에 소영하는 여전히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있건만.

민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홍 사장의 품에 폭 안겼다.

“저, 실례합니다.”

뒤늦게 눈치를 살피던 직원이 뒤바뀐 민재의 가방을 가져다줬다.

무혁이 대신 받아서 들고오자 민재는 가방 쪽을 힐끔 보고서 홍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근데 제 가방이 왜 갑자기 바뀐 건지 혹시 아세요?”

“어? 그, 그게. 그게 말이지.”

“저는 분명히 제 짐을 다 챙겨왔는데. 바뀐 가방 안에 신기하게도 제 사이즈에 딱 맞는 옷들만 골라서 들어 있더라고요.”

“미, 민재 씨가 착한 아이라서. 하늘에서 선물이라도 준 거 아닐까?”

평생 거짓말을 해야 할 일이 없었던 탓인지, 홍 사장은 애써 눈알을 굴리며 티나게 변명 거리를 찾았다.

어서 어떻게든 둘러대라는 눈빛을 애타게 보냈지만 무혁은 두 손을 들고 항복의 의사를 표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모두 자백했습니다.”

“뭐, 이 배신자가!”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됐다.

대체 왜 그러신 거냐는 민재의 추궁에 홍 사장은 결국 삼십육계 줄행랑을 택했다.

“방해 안 할게. 방해 안 할 테니까 둘이서 재밌게 놀아.”

“진심이시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저 멀리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 버렸다.

소영하에 홍 사장까지.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참 휑했다.

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주우며 민재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소영하가 나 고소하면 어떡해?”

“변호사 남편 둬서 어디 쓰려고. 무단 침입에, 협박에. 마음만 먹으면 우리 쪽이 훨씬 유리해.”

“그랬었지, 참.”

분명 상처받은 건 민재 쪽인데, 소영하는 끝까지 민재를 가해자 취급하며 스스로를 가엾게 여겼다.

그런 식의 말을 계속 들으니 정말 제 쪽이 더 잘못 한 것 같았는데.

무혁의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내가 잘못한 거 아니지.”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

“그런 거였지.”

홍 사장까지 연루된 이상 이제는 정말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알고 온 건지는 몰라도 이제 더는 저 인간이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걸 용납할 생각이 없다.

“가자.”

그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적당히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고서 민재는 그대로 무혁에게 팔짱을 꼈다.

“수영하기 싫은 거 아니었어?”

“둘이서는 괜찮아.”

비록 제 손으로 악당을 해치우긴 했지만, 그래도 무혁이 있어 후환이 두렵지 않다.

민재는 여전히 시원한 딸기 우유를 꼭 거머쥐고서 그와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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