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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37화 (37/103)

37화. 처음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근데 수영장에 가서 뭘 해야 하는 건데?”

“그거야 가보면 알게 되겠지.”

묘하게 들떠 보이는 무혁이 또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대체 리조트에서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러는 건지.

민재는 얄미운 진무혁의 뺨을 한 번 꾹 찌르는 식으로 괜한 심술을 부렸다.

“음흉해.”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허리에 손을 감질 않나 어깨를 껴안질 않나 은근슬쩍 스킨십 수위가 올라가긴 했다.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얄미운 저 뺨을 한 번 제대로 꼬집어주고 싶은데, 무혁은 운전 중이라는 핑계로 민재의 공격을 원천 차단했다.

“저긴가 봐.”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십 분쯤 더 달리니 곧 이국적인 흰 담벼락이 보였다.

엄중한 경비의 검수를 거치고 드디어 국내 최고급 시설을 자랑하는 우주리조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저기 좀 봐!”

차가 내부에 들어서자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이쪽은 남쪽 지방에서도 워낙 따뜻한 덕분에 일 년 내내 해변을 즐길 수 있다더니, 눈 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여기야!”

로비 입구에는 벌써 먼저 도착한 홍 사장이 무혁의 차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보아하니 저쪽은 완전히 휴가 분위기라, 차가 멈추자마자 홍 사장은 차 문을 열고 민재를 데리고 나왔다.

“짐은 대충 맡겨놓고, 어서 둘러 보자구.”

여기까지 와서도 홍 사장 전담반 임무는 아무래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뒷일은 알아서 하겠노라 손을 흔드는 무혁에게 짐을 맡기고 민재는 별수 없이 홍 사장과 함께 리조트 구경에 나섰다.

“바람이 참 좋네요.”

소금기 섞인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퍽 따뜻했다.

절벽을 깎아 만든 호텔의 풍경과 드넓게 펼쳐진 파도를 보고 있으니 정말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 핑계를 대고 오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휴식은 싫지 않다.

“멀리 여행 가는 것도 요샌 힘들잖아. 이런 데서 며칠 쉬기만 해도 훨씬 나으니까, 한 번 마음껏 즐기고 감상을 들려줬으면 해.”

“그럴게요.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굳이 좋은 의도로 하는 행동을 꼬아볼 필요는 없다.

담백하게 감사를 표하는 민재의 반응이 퍽 마음에 든 건지 홍 사장은 함박웃음을 짓고서 민재를 꼭 껴안았다.

“아, 민재 씨 정말 마음에 들어.”

“네?”

차분한 분위기마저도 언니를 쏙 빼닮았다며 홍 사장은 민재를 퍽 귀여워했다.

격한 스킨십에 어쩔 줄 모르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빈정대며 시비를 걸었다.

“내 새끼 데리고 적당히 하시죠. 홍.옥.자 사장님.”

혼자 오기 좀 그렇다며 안 팀장은 잡무를 떠넘기기 위해 박해영 변호사를 데려왔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안 팀장의 도발에 홍 사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매섭게 받아쳤다.

“루비 홍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텐데. 예나 지금이나 참 기억력이 나빠. 안.봉.구 씨.”

“이제 그 이름 아니라고!”

뜬금없는 얘기에 민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민재를 옆에 두고 박해영 변호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이름, 개명하신 거래요.”

“아.”

왜 개명한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다지만.

지금의 안 팀장을 놓고 봤을 때 그 이름은 어쩐지 아주 조금은.

“석민재. 웃지 마.”

웃기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안 팀장의 으름장에 민재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받아쳤다.

“전 안 웃었는데요.”

뒤따라온 박 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참느라 죽으려고 해도, 원래도 무표정한 민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래도 상사가 불편해하는 이슈가 계속 화두에 올라있는 건 불편할 테니, 민재는 요령 좋게 이야기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저희가 따로 해야 할 게 있을까요?”

“오늘은 말 그대로, 수영하면서 실컷 노는 게 일이야.”

“하지만 이건…….”

리조트 인수와 관련해서 확인할 게 제법 많다고 들었는데. 홍 사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민재의 등을 두드렸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 걸? 민재 씨에겐 내가 주는 특별한 선물도 있고.”

“선물이요?”

찡긋 윙크까지 하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영문도 모르는 채 민재는 카드 키를 건네받았다.

“옷 갈아입고 내려와. 봉구 너는 날 따라오고.”

“이제는 봉구 아니라고!!”

두 사람 다 자기 이름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그런 의미에서 민재는 지금 제 이름이 퍽 마음에 들었다.

***

석민재. 앙증맞고 귀여운 이름과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제 이름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남자 같은 이름이라서, 메일 하나를 보내도 상대방 중 백에 구십은 민재를 남자라고 확신하곤 했다.

나머지 십도 외국인이라 사실상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로비 쪽으로 돌아오니 무혁은 짐을 다 올려보내고 민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응.”

카드키를 들고 로비로 들어서자 곧 로비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두 사람을 정중히 안내했다.

“진무혁 님, 석민재 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늘 잠입 콘셉트는 바빠서 신혼여행을 못 간 부부가 대신 리조트 숙박을 택했다는 시나리오였다.

분명 거짓말은 아니긴 한데 그런 것치고 직원들의 대접이 너무나 융숭했다.

“여기입니다.”

굽이굽이 길을 돌아서 도착한 객실에서 민재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길이 없었다.

“와…….”

직원이 가져다 놓은 가방을 대충 밀어놓고 민재는 제일 먼저 테라스로 향했다.

네 개의 수영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객실 테라스 너머로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최고의 뷰를 자랑하는 테라스와 응접실이 딸린 특대형 스위트 룸까지.

민재도 자료로만 봤지 실제로 와 본 건 처음이었다.

“여기는 예약하기도 쉽지 않다던데, 홍 사장은 민재 네가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네.”

깜짝 선물을 준비해놨다더니 정말로 깜짝 놀랐다.

멋진 방에 감동하던 중 민재는 뒤늦게서야 정말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근데 침대가 왜 붙어 있어요?”

예전 출장을 갔을 때는 문성희 변호사와 한방을 썼다.

그때는 분명히 침대가 두 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침실의 침대는 크고 아름다운 킹 사이즈 더블베드다.

“신혼부부용이니 그런가 보지. 이것도 봐.”

수건을 접어 새 모양을 만들어 둔 장식 아래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카드까지 준비되어 있다.

정말로 신경을 세심하게 써줬다는 건 알겠지만 그러니까 이건 결국.

“여기서 같이 자야 한다는 거예요?”

“처음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짐부터 풀어.”

아무리 넓은 침대라고 해도 진무혁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한다니.

그래도 방이 워낙 넓은 덕분에 널찍한 소파도 준비되어 있다.

여차하면 저기서 자면 되겠지. 민재는 한숨을 쉬며 가방을 열었다.

“이게 뭐야.”

분명히 대충 주워 넣었던 제 옷들은 온데간데없고 처음 보는 새 옷이 가득 들어있다.

속옷에 잠옷, 휴양지에서나 입을 법한 원피스와 조금은 부끄러운 디자인의 비키니까지.

“진무혁!”

하다 하다 이제는 가방을 바꿔치기하다니.

언성을 높이는 데 마침 무혁은 문 앞까지 찾아온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서, 저녁까지 찾아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내에게 전하죠.”

“뭐야?”

“실수로 네 가방을 다른 방에 줬다는데?”

“뭐?”

홍 사장이 선물로 똑같은 가방을 준비한 것까지는 사실인데.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다가 그만 헷갈린 직원이 다른 곳에 가져다 놓았다고 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관여한 바가 없다는 무혁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다.

“홍 사장님이 내 가방을 어떻게 아는 건데?”

“거기까진 내가 알려줬지만, 뭐 이건 과실치사 정도로 넘어가자고.”

“지금 그걸 나더러 믿으란 거야?”

하다 하다 이젠 쌍으로 이런 짓까지 하다니. 아무래도 이 일은 홍 사장과 진무혁의 합작 사기극이 틀림이 없다.

“몰라. 안 갈 거니까 혼자 가.”

“진짜 안 갈 거야?”

“싫어.”

그동안은 잠자코 휘말려줬더니 이건 심했다.

홍 사장의 짓궂은 장난이 도를 넘은 건 사실이라, 무혁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수영장으로 가기로 했다.

“직원이 가방 가지고 오면 천천히 내려와. 밑에서 기다릴 테니까.”

“됐네요.”

“심술부리지 말고.”

이제는 습관처럼 무혁은 토라진 민재와 시선을 맞추고서 슬그머니 뺨을 만지작거렸다.

보아하니 그도 홍 사장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만만한 게 진무혁이라서.

민재는 냉큼 그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깨물어버렸다.

“고양이 흉내라도 내는 거야?”

다 알면서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진무혁은 요즘 들어 이 결혼 놀이에 제대로 재미가 들렸다.

아무래도 제대로 선을 그어두지 않으면 무한정 그에게 끌려다닐 것 같아서 민재는 아예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렸다.

“난 침대에서 잘 거니까 선배가 소파에서 자.”

“거기서 자면 허리 아픈데. 이번만 봐주면 안 될까?”

민재라면 쏙 들어갈 소파도 키가 큰 진무혁에게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침대에서 괜히 잠들었다가는 아무래도 후환이 두렵다.

‘내가 또 덮치기라도 하면…….’

담백한 진무혁이야 잠만 잘 잔다고 치더라도 민재가 잠든 그를 가만히 둘 자신이 없다.

슬그머니 눈웃음까지 치며 무혁은 어느새 민재의 허리를 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줬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응?”

절대로, 절대로 아무 짓도 안 할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속을 긁었다.

“안 하긴 뭘 안 한 단 거야.”

“그게 왜?”

“됐고, 어서 가!”

문답무용에 즉결 심판으로 넘어갔다.

괘씸죄를 더해 민재는 무혁을 방 밖으로 냉큼 쫓아내 버렸다.

그가 먼저 내려가고 난 후에야 민재는 가방에 든 새 옷을 하나하나 살폈다.

“디자인은 귀엽네.”

누가 고른 건지는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드레스를 입으러 갔을 때 고른 취향과 비슷한 걸 보니 이것도 홍 사장이 준비한 건 맞는 것 같은데.

처음에는 마냥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이제 보니 겉에 걸치는 시스루에 반바지도 있어서 체형이 모조리 드러나는 무자비한 비키니는 아니었다.

거울 앞에 서서 몇 번을 돌아봐도 이 정도면 제법 나쁘지 않다.

세트로 갖춰진 걸 다 챙겨 입으니 확실히 원래 챙겨온 스포츠 센터용 수영복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잘 어울리긴 했다.

“괜히 화를 낸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이번 기회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둬야 하니 민재는 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매번 오냐오냐 넘어갔다가는 정말로 이런 것에 익숙해져 버릴 테니까.

차라리 이런 즐거움 같은 걸 몰랐을 때가 나았는데.

다시 혼자가 됐을 때, 그 공허함을 견디는 것 역시 온전히 제 몫이라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로 몰랐나 보네.”

진짜 홍 사장 혼자 저지른 일인가 본데, 영문도 모르고 쫓겨났을 무혁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물론 이런 일로 화를 내진 않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소파가 아닌 침대에서 자게 해주면 이 정도 실수는 분명 눈감아 줄 거였다.

“진정해. 석민재.”

아무리 진무혁이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 있다 해도 절대 이성을 잃고 덮치면 안 된다.

하는 짓으로 봐서는 본인은 절대 먼저 손을 대지 않겠다고 했지만, 무혁이 진심으로 자신을 유혹하려고 든다면.

솔직히 말해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나 미쳤나 봐, 진짜.”

그와 함께 보낸 수많은 밤의 기억들이 하나 둘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서로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봤던 사이라 그런지 무엇을 상상해도 오늘은 그 선을 넘어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딩동.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직원이 제 가방을 가지고 온 모양이라 민재는 의심 없이 바로 문을 열었다.

“제 가방이…….”

“민재야.”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에 선글라스만 꼈다지만 누가 봐도 금방 소영하라고 알아볼 수 있을 차림이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다 아는 수가 있지.”

기자에게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서둘러 문을 닫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뭐라고 내쫓을 틈도 없이 소영하는 힘으로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진무혁의 취향이 담뿍 담긴 것 같은 그녀를 마주하고 소영하는 애써 쓴웃음을 머금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네.’

조원식의 딸이라는, 자칭 진무혁의 약혼녀는 직접 소영하를 찾아와 동맹을 제안했다.

- 나는 무혁 오빠를 되찾고, 그쪽은 그 여자를 되찾는 거죠. 이 정도면 제법 공정한 거래잖아요?

처음부터 그 남자는 자기 거였다고.

예쁜 손가락을 까딱이는 모습이 어째 아름답다기보다는 소름이 끼쳤다.

언제든 깨져버릴 유리 장식처럼 조장미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데가 있어서 소영하는 찝찝한 기색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 그래서,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 건데?

- 다 방법이 있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소영하의 말에 조장미는 조금만 기다려보라며 말을 꺼냈다.

주소는 손쉽게 알아냈다지만 민재를 마주하는 건 쉽지 않았다.

평소에는 회사와 집만 오가는 데다, 최근 들어 민재는 A&Z가 아닌 수정일보 쪽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하며 이제는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젠장.’

대스타 소영하의 자존심도 구기고 남몰래 민재의 뒤를 쫓아봤지만, 민재의 옆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절대로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진무혁은 절대 석민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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