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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36화 (36/103)

36화. 싫었으면 그렇게 열심히 하진 않았겠지.

환자복을 입고 나타난 안 대표는 민재를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 달려와 말을 걸어댔다.

“일도 바쁠 텐데 여기는 어떻게 왔어? 할머니 뵈러 왔구나.”

이상할 정도로 친한 척하는 저 행동이 심히 수상하긴 한데.

무혁은 일단 잠자코 뭘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안 대표님이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나야 몸이, 몸이 안 좋아서 입원했지 뭐야.”

안 대표 뒤에 선 간호사가 민재에게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만 보아도 꾀병인 게 뻔히 보인다.

하지만 저쪽은 무혁이 함께인 줄도 모르는 건지, 끊임없이 무혁에 대한 험담을 쏟아냈다.

“아무리 봐도 너는 무혁이 그놈에게는 아까워. 아직 늦지 않았으니, 빨리 도망가는 게 좋을 게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다른 얘기는 다 참아도 저런 바람을 넣는 건 곤란하다.

병실에서 무혁이 나오자 안 대표는 화들짝 놀라서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피웠다.

“네놈이 여기엔 왜 온 거냐?”

“그러는 대표님이야 말로 어디가 그리 편찮으셔서 입원까지 하신 겁니까.”

하는 짓만 봐도 꾀병이 분명한데, 자택에 주치의를 들여도 부족함이 없을 안 대표가 굳이 요양병원에 들어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손을 뒤로 숨기고 있는 게 아무래도 수상했다.

“뒤에 그건 뭡니까?”

“아, 아니 이건!”

무혁에게 정곡을 찔린 안 대표가 반사적으로 손을 민재 쪽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화사한 장미 꽃다발은 얼핏 보아도 금방 받아온 것처럼 싱싱했다.

“민재야. 이건 네가 받아라.”

“네?”

엉겁결에 꽃다발을 안겨주고서 안 대표는 그대로 복도 반대쪽, 최고급 일인실로 달아났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며 간호사도 그 뒤를 따르고 민재는 엉겁결에 꽃다발을 든 채 복도에 혼자 남았다.

“이게 대체 뭐야?”

“그러게.”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거라며 민재는 꽃다발을 곧장 병실로 가져갔다.

평소 손녀가 주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할 할머니는, 바깥의 소란을 다 들은 건지 꽃다발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또 그 영감탱이냐?”

“또라뇨?”

주책맞은 안 대표의 행보에 이제 영감탱이라는 호칭은 다들 그러려니 쓰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또’라는 표현은 무혁도 제법 신경쓰였다.

할머니는 이리 좀 와보라며 병실 침대 아래를 가리켰다.

“너희 회사 높은 사람이라기에 내가 그동안 참아주니, 아주 늙은이가 주책이 이만 저만이 아니더구나.”

“이게 다 뭐예요?”

간호사에게 매번 버려달라고 하기도 민망하다며 할머니는 병원 침대 밑에 숨겨둔 말린 꽃들을 보여줬다.

여문 할머니의 손길이 닿아 상한 구석 하나 없는 꽃들은 종류조차 참으로 다양했다.

문득 열어보지도 않은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혁은 꽃다발 틈에 낀 조그마한 봉투를 열어 민재 앞에 보여줬다.

[여사님. 폐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쌍화차 한잔하지 않으시렵니까?]

정갈하게 쓰여진 글씨가 제법 고풍스럽다지만 하필이면 메뉴 선정이 글러먹었다.

“쌍화차…….”

“쌍화차는 무슨. 사람을 아주 방구석 노친네 취급하고 있어.”

심장 때문에 자제하고 있어서 그렇지, 민재네 할머니도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는 꽤 좋아하는 편이라는데.

쌍팔년도 수법으로 들이대는 안 대표의 행동보다도 지겨워하는 할머니의 반응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래서 어느 할망구가 좋아한다고. 글러 먹었어.”

쯧쯧, 쓴소리하면서도 할머니는 편지를 곱게 접어 다시 봉투에 넣고서는 말리는 중인 꽃다발 사이에 끼워 넣었다.

대체 이게 뭔지 긴가민가한 민재와 달리 무혁은 두 분 사이에 오가는 묘한 기류를 정확히 짚어냈다.

“안 대표님이 할머니를 좋아하는 거라고?”

“뭐, 저쪽도 사별이니까. 문제가 될 건 아니야.”

무혁도 장례식에 참석했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십 년 전쯤, 그것도 노환으로 돌아가셨으니 결과적으로 두 노인 모두 싱글이기는 한데.

경악하는 민재와 달리 무혁은 이 일에 대해 철저히 말을 아끼기로 했다.

“팀장님한테 말해야 할까?”

“됐어. 내버려 둬.”

어차피 꽃만 주고 가는 거니 됐다며 할머니도 그냥 입을 다물라고 했다.

병실을 나오면서도 민재는 영 석연찮은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여기로 오신 거지?”

민재의 의문은 당연한 거였다. 안 대표의 행동에 반쯤 정신이 나간 민재와 달리 무혁은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민재 때문에 참아주던 할머니도 날이 갈수록 도를 넘어가는 안 대표의 행동을 더는 묵과할 수 없었을 거였다.

“병원을 옮겨야 하나?”

“여기만 한 곳이 없었다며.”

“그거야 그렇긴 한데.”

서울에서 이 정도 거리에 민재의 월급으로 감당할 만한 입원비가 책정된 것도 여기뿐이고.

밤에도 의사가 상주하고 있어서 여차하면 위험한 상황에도 즉각 응대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병원을 옮길 수도 없는데.

민재는 갑자기 쳐들어와 이런 짓을 하는 안 대표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아주 싫으신 눈치는 아니었잖아.”

굳이 한마디를 보태는 무혁의 말을 차마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거야 그렇긴 한데.”

할머니 성격상 정말로 싫었다면 진작 연락해 병원을 옮기겠다고 했을테니까.

그런데 꽃다발을 침대 밑에서 곱게 말려둔 걸 보면 아무리 봐도 아주 싫으신 눈치는 아니었다.

저쪽도 민재에게 대신 선물을 넘기고 간 걸 보면 할머니의 눈치를 적잖이 살피고 있고.

당장은 걱정할 게 없다지만 그래도 손녀의 관점에서 자기 할머니를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등장은 적잖이 충격인 모양이었다.

“뭐, 병원에서 심심하지 않고 두 분이 재미있게 지내시는 거면 그것도 괜찮지.”

“그래도 그렇지. 재혼이라도 하신다고 하면 어떡해.”

“재혼이라.”

안 대표의 성격상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긴 한데.

어차피 저쪽 집안은 안 팀장 외에는 모두 가정을 꾸려서 딱히 말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안 팀장의 큰 형이 작년에 손주를 봤다고 들었고 진작에 재산 문제도 교통정리가 끝나서 왈가왈부할 거리가 없다.

두 사람만 좋다고 하면 마음대로 하면 될 문제라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민재는 이 상황이 꽤 곤란한 듯싶었다.

“그런 건 어차피 일어나고 나서 고민해도 되는 거니까. 너무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

“나한텐 심각한 문제야.”

할머니 얘기만 나오면 민재는 언제나 심각했다.

하나 남은 가족 문제는 돌덩어리라 불리는 민재의 표정을 시시각각 변하게 했다.

그런 할머니조차 질투하게 되는 제 마음은 안 보이는 걸까.

무혁은 아쉬움을 안은 채 풀이 죽은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를 빼앗기는 것 같아서 질투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입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민재는 정곡을 찔린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할머니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서도 싫고 안 팀장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도 싫다.

유치한 이기심이라는 건 알지만 정말로 달갑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라서.

“두 분이 서로 좋아하시는 거면 응원해야지.”

이럴 때는 옳은 말만 하는 진무혁이 너무 미워서 견딜 수 없다.

이성은 그 말을 이해하지만, 감정은 전혀 수긍할 수 없다.

민재는 날카롭게 눈을 흘기며 빈정거렸다.

“어째 신나 보인다?”

“할머님이 내 편이시니까, 나도 할머님 편을 들어야지.”

지난번에 따로 연락해 레시피까지 배운 것도 그렇고 할머니는 이제 무혁을 진짜 친손자처럼 아끼는 게 눈에 보였다.

마치 진짜 손자처럼 살갑게 구는 그의 모습이 대견하고 고맙긴 하지만.

민재만 쏙 빼놓고 둘이 더 친해 보이는 걸 보면 어딘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봤자 선배는 내 남편이잖아.”

무혁의 도발에 넘어간 순간 아차 싶었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는데 그는 이미 다 들었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민재를 놀렸다.

“암, 내가 석민재 남편이지.”

“좀!”

틈만 나면 놀려먹을 생각만 가득한 저 인간이 정말 얄미워 견딜 수 없다.

은근슬쩍 자신의 귓불을 만지는 손을 그냥 내버려 두고서 민재는 홀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정말 할머니가 안 대표님이랑 결혼이라도 하면, 우리 팀장님이 내 삼촌이 되는 거야?”

“그거 괜찮네.”

“말도 안 돼!”

뭔가 상상이 안 되는데.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적극적인 안 대표가 어디로 튈지는 감이 잡히지 않아서 정체 모를 두통이 밀려왔다.

***

“수영복 챙겼어?”

무혁의 잔소리에 민재는 서둘러 짐가방부터 살폈다.

“챙겼어.”

리조트에 가는 날까지 안 팀장에게는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리조트 같은 곳에 놀러 갈 기분은 더더욱 아니지만, 이것도 일 때문에 가는 거니 민재는 주섬주섬 짐을 싸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뭐야.’

그냥 하루 묵고 자료 레포트만 내면 되겠지 싶었는데 홍 사장은 화끈하게 서비스를 하겠노라며 이박 삼일이나 예약했다고 한다.

이래서야 빼도 박도 못 하게 놀러 가는 꼴이니 어쩔 수 없이 마지막 하루는 연차까지 쓰게 됐다.

“우리가 뭘 챙길 건 없어. 어지간한 건 다 있으니 그냥 옷하고 기본적인 것만 챙기면 돼.”

“그런가.”

그 말만 믿고 정말 화장품과 옷 정도만 적당히 챙겼는데.

수영복을 챙기고 나니 이제 슬슬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근데 수영은 꼭 해야 하는 거야?”

할머니 생각을 하느라 다이어트도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꺼낸 수영복이 배를 가려주는 디자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수영이라니.

“수영할 줄 알잖아.”

“그건 그런데…….”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니 어설픈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요즘 들어 진무혁의 야식 공세가 거셌던 탓에 알게 모르게 수영복을 입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수영장은 무혁 씨가 보고 난 그냥 방이랑 다른 시설만 체크하면 안 될까?”

“오늘 홍 사장이 직접 시찰 온다고 했어.”

일이 걸리니 어설프게 넘어가려던 핑계는 씨알도 먹히지 않게 됐다.

본인은 아무 걱정 없다 이거겠지.

지극히도 사무적이기만 한 진무혁을 힐끔 훔쳐봤다.

태어날 때부터 원래 그랬던 것처럼 슈트가 잘 어울리는 진무혁에게도 일상복이 있긴 했다.

단정한 셔츠에 얇은 니트를 겹쳐 입고, 베이지색 면바지까지 갖춰 입으니 꼭 대학 시절의 그를 보는 것 같았다.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 그냥.”

운전대를 잡은 옆얼굴은 정말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만 같다.

앳된 기색은 거의 사라졌는데도 이렇게 단둘이 되면 때때로 자꾸 옛날 기억들이 되살아나 민재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다이어트 안 했나 보네.”

“어?”

“비키니 입고 싶다고, 삼 일을 굶다가 기절한 거 기억 안 나?”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안다는 건, 지나버린 흑역사마저도 함께 발굴 당할 위험이 있다.

이제는 잊고 싶은 옛이야기를 발굴 당하는 건 사실상 고문에 가깝다.

머리 좋은 진무혁은 정말로 쓸데없는 디테일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갑자기 비틀거려서 얼마나 놀랐는데. 응급실로 뛰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네 친구 바나나 우유를 뺏어 들고 말이야.”

“딸기 우유였거든.”

너무 배가 고파서 눈이 뒤집힌 나머지 친구가 먹다 만 딸기 우유 한 통을 그 자리에서 비우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새 우유를 사주고 넘어가 주긴 했다지만 그때는 정말로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안 하느니만 못한 옹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민재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말이나 꺼내지 말걸.’

그날 이후로 진무혁은 요리까지 배워가며 민재의 끼니를 직접 챙겼다.

1차 시험 때도, 2차 시험 때도 무혁은 제 도시락을 직접 싸며 굳이 민재의 것까지 함께 만들었다.

- 이거 먹으면서 날 응원해줘.

고사장 밖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민재는 무혁의 시험이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아무리 진무혁이라도 첫해에는 힘들 거라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

반쯤은 마음을 비우고 풀이 죽은 그를 위로해줄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런 귀여운 면이라도 있었다면 좀 나았을 테지만 진무혁은 기어코 그 많은 사람을 제치고서 매번 수석 자리를 거머쥐었다.

- 민재야. 시험 결과 나오면 할 말이 있어.

한없이 들뜬 그를 보면서도 민재는 어딘지 모르게 무혁이 멀어져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함께 걷던 그 사람은 어느새 너무나 빨리 계단을 올라가 아득히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져갔다.

우리는 왜 헤어졌던 걸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제는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제게서 버림받았던 이십 대의 진무혁은 속으로 석민재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매번 요리하는 거 귀찮지 않아?”

“싫었으면 그렇게 열심히 하진 않았겠지.”

그건 그렇다지만, 결과적으로 어미 새처럼 잘 먹인 결과 민재의 다이어트 역시도 푸른 바다 저 멀리 남의 일이 되고 말았다.

“나 살쪘다고 놀리지 마. 이게 다 누가 너무 잘 먹여서 그런 거니까.”

“뭐가 문제야. 난 만지기 좋아서 마음에 드는데.”

“뭐?”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제 쪽을 보는 미소가 심히 사악하다.

꼭 입으로 매를 버는 저 얄미운 인간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만지긴 뭘 만져!”

“신혼부부가 수영장에서 남처럼 떨어져 있자는 거야?”

“그건 아니긴 하지만.”

스킨십 조항이 떡하니 박혀 있는 이상, 아니 그게 아니라도 이제는 굳이 밀어내야 할 이유가 없긴 하다지만.

손길이 닿을 때마다 설레는 제 심장이 폭발하려는 걸 저 남자는 알기나 하는 걸까.

어쩌면 이토록 민망한 것도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만 같아서 민재는 무혁이 더욱 원망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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