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저는 석민재 씨를 추천합니다.
홍 사장의 장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안 팀장의 간곡한 요청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 민재는 오랜만에 본사로 출근하게 됐다.
“석민재!!”
평소라면 그저 왔냐고, 무심하기 짝이 없을 텐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안 팀장은 너무나 반가워하며 민재를 부둥켜안기까지 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꽃이 지기 전에는 봄인 줄 모른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어.”
뒤에 쌓인 서류 더미만 봐도 안 팀장 혼자 귀찮은 일을 생으로 떠맡은 흔적이 역력했다.
워낙에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처음 봤을 때는 다른 사람한테는 아예 맡기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도 민재만은 완벽하게 신뢰하며 자신의 업무를 부담시켰다.
“제가 없어서 많이 힘드셨나봐요.”
“힘든 정도가 아니야. 석민재 너. 결혼이고 자시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회사에 말뚝 박아.”
연봉은 부르는 대로 다 줄 테니 아무 데도 가지 말라는 제안이 제법 솔깃했다.
그런 민재의 낌새를 알아차린 건지 무혁은 징징대는 안 팀장을 저 멀리 떼놔버렸다.
“남의 부인한테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네 부인이기 전에 내 직원이야!”
“부하 직원한테 함부로 손대는 버릇, 빨리 고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정당한 남편의 권한으로 무혁은 끈적끈적하게 빌붙으려 드는 안 팀장에게 매서운 경고를 날렸다.
지난번부터 느낀 거지만, 스스럼없이 머리를 쓰다듬거나 껴안는 모습이 심히 눈에 거슬렸다.
‘너무 그러지 마.’
차라리 본인이 싫어하기라도 하면 당당히 하지 말라고 할 수라도 있을 테지만.
민재는 전혀 불쾌하지 않다며 무혁을 말렸다.
그녀가 왜 저러는 건지 머리로는 이유를 알고 있다.
석민재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궁지에 몰린 그녀를 이 회사에 있게 해준 건 전적으로 안 팀장이었다.
다른 사람 일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안 팀장도 석민재의 문제만큼은 예외였다.
칠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호흡을 맞추며, 두 사람 사이에는 제법 큰 유대감이 쌓였다.
무혁은 그 사실이 무척 불만이었다.
“약속은 지켜줘.”
유치한 독점욕이라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명목이라며 무혁은 민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생판 남인 안 팀장에게조차 허락되는 것들이 무혁은 결혼한 남편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한없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바보같이.”
견제하는 무혁의 모습이 우스웠던 건지 민재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앞머리를 만져줬다.
습관처럼 넥타이를 고쳐 매주는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무혁은 겨우 미소를 머금었다.
“저녁은 뭐 먹고 싶어?”
“그러게. 뭘 먹으면 좋을까.”
“일찍 끝나면, 오랜만에 할머님한테 가보는 것도 좋고.”
“그래도 돼?”
“미리 연락드려놓지 뭐. 내가 연락해둘 테니까 미리 준비만 하고 있어.”
“응.”
할머니 얘기만 나오면 민재는 꼭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곤 했다.
일종의 치트키나 다름없다지만 무혁은 그런 할머니가 제 편이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 자네가 있어서 안심이야.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까.
하루하루 병약해져 가는 할머니의 심장이 얼마나 버텨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할머니가 제 편이 되어주는 한 민재는 언제까지고 제 곁에 머물러줄 것이다.
비겁한 진무혁.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안도하는 제 모습이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다.
“안심할 수 있게 만들어야지.”
친구인 한용식까지 적절히 활용해나가며 무혁은 HS엔터의 입지를 차차 줄여나갔다.
뒷조사 전문답게 용식은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발휘해 성준범 이사의 수상한 징후를 파악해냈다.
하지만 터트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잠깐만, 회의 좀 하자.”
안 팀장의 주최로 이번 혜성 소송 건과 관련된 담당자들이 한데 모였다.
각자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와중에도 무혁은 일부러 자신의 손에 든 패를 내놓지 않았다.
민재의 맞은편에 앉아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 변호사가 눈에 띄었다.
분명 자신과 동갑인 박해영 변호사.
지난번 안 팀장에게까지 찾아와 불만을 토로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뭐 더 있다고 한 거 아니었어?”
“그건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사직서까지 제출했던 사람이 언제 기밀을 들고 배신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제일 중요한 요소들은 기밀 유지를 위해 파트너 변호사들끼리 따로 공유했다.
박 변호사는 그게 영 불만인 것처럼 보였다.
“민재 씨. 그래서 홍 사장 쪽에서는 뭘 믿고 저러는 건데요?”
“그러게요. 저도 팀장님이 말씀해 주시기 전에는 잘 모르겠어요.”
주요 기밀을 줄줄이 꿰고 있는 민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제 앞에서나 울고 웃는 일이 빈번했지, 민재는 애초에 별명이 돌부처일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희박했다.
속 모를 석민재를 보며 답답해하는 걸 보며 조금은 고소해지는 걸 보면 자신도 인간이 되기는 글렀다.
태연히 다른 남자들에게 철벽을 치는 민재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어서 무혁은 미소를 머금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번에 홍 사장 쪽에서 이번에 새로 요청 들어온 건이 있어서요.”
무혁의 뒤를 이어 안 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에 M&A 얘기 나온 우주 리조트 말인데, 성 이사 쪽에서 물밑으로 작업하다 불발된 모양이야.”
긴급한 자금난에 우주 그룹 본사는 눈물을 머금고 최고급 VIP를 상대로 개장했던 우주 리조트를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우선 협상 대상으로 선정된 혜성 쪽 성 이사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미는 탓에 계약 자체가 불발될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돌았다.
“감정이 상해버린 건지 우주 쪽에서는 혜성만 아니면 된다고 노발대발하고 있긴 하지만, 다들 탐이 나도 좀처럼 나서진 못하는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홍 사장님 쪽에서 매입하려는 겁니까?”
“저쪽이야 언론을 꽉 쥐고 있으니 홍보 쪽은 문제가 없을 테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손해는 없단 생각이겠지만 그래도 상태는 좀 봐줬으면 한다나 봐.”
표면상으로 순조롭게 진행 중인 혜성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포상 휴가라는 이름을 걸고, 우주 리조트에 직접 방문해 내부 사정을 분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무턱대고 나서기에는 워낙 큰 건이다 보니 홍 사장도 외부 전문가의 조언을 빌어 안전하게 가고 싶다는 뜻을 대신 전해왔다.
“어차피 알 만한 전문가들은 우리가 말만 꺼내도 바로 눈치챌 테니까 이번에는 우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해. 자원할 사람 있나?”
안 팀장의 물음에 취미가 호캉스인 문성희 변호사가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쪽이야 워낙 아는 게 많은 사람이니 다른 곳들과 비교해도 분석할 거리가 많을 거라 다들 그러려니 했다.
“제가 자원한 거랑 별개로,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또 추천해도 될까요?”
“도움이 될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홍 사장 쪽에서는 최대한 일반인에 가까운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어.”
업계에 대해 너무 잘 알아도 선입견 때문에 놓치는 부분이 생길 수 있다.
가급적 이런 것과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도 좋지 않겠냐는 의견에 문성희 변호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서 민재를 가리켰다.
“저는 석민재 씨를 추천합니다.”
“저요?”
“어차피 여기 남편도 있겠다, 두 사람이 부부 투숙객으로 들어가서 진짜 부부들이 어떤 체험을 하게 되는지 생생한 후기를 들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녀와서 귀찮은 레포트를 써야 할 테니 고급 리조트 숙박도 다들 그다지 반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내심 한 사람을 지목해준 문 변호사의 논리에 감탄하며 다들 너도나도 민재와 무혁을 추천하고 나섰다.
“하지만 저희는…….”
“그래. 이번에 일이 많아서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레포트를 써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포상휴가라고 생각해.”
“맞아. 민재 씨는 그런 곳 가본 적 없다고 했었으니까 초보자의 시선. 딱 좋네.”
누가 봐도 일감을 떠넘기는 느낌이긴 하다지만 굳이 마다해야 할 이유는 없다.
민재에게 고개를 끄덕, 하고 신호를 보내고서 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면 일단 문 변호사님 가족과 저, 그리고 석민재 씨. 그 외에도 사내에서 따로 몇 사람 더 추천을 받아보겠습니다.”
“거기 수영장이 네 개라면서? 온수 풀이 그렇게 좋다더라고.”
벌써 신이 난 문 변호사는 내버려 두고 안 팀장은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을 살폈다.
저 멀리 앉아 혼자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박 변호사가 아무래도 눈에 밟혔다.
“일단은 나도 동행할 거니까. 박 변, 자네도 갈 거야?”
“제, 제가요?”
“그래. 나 혼자 가기는 좀 그러니까 자네도 따라와.”
졸지에 안 팀장의 수발을 들게 생긴 박 변호사의 얼굴에 더욱 그늘이 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회의록을 작성하는데 집중한 민재를 힐끔 보고서 무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명단이 완성되는 대로 홍 사장 쪽에 넘기기로 하고 회의는 무사히 끝났다.
***
“그래서 있죠. 요즘 너무 바빠서 못 들렸어요.”
평소에는 그다지 말이 없는 민재도 오랜만에 만나는 할머니 앞에서는 수다쟁이가 됐다.
어쩐지 훨씬 더 밝아진 손녀의 손을 꼭 잡고서 할머니는 은근히 눈치를 줬다.
“녀석. 바쁘다곤 해도 뺨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걸 보니 진 서방이 잘 챙겨주는 모양이구나.”
“그게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저녁에 자꾸 맛있는 걸 주니까…….”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스커트가 조금 타이트해진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소영하 때문에 한참 고생할 때는 허리가 남을 정도로 헐렁했었는데.
정작 자신을 살찌운 주범 진무혁은 할머니의 곁에 앉아 새로운 레시피를 캐내기에 골몰했다.
“지난번에 생태탕을 잘 먹길래, 다음에는 삼계탕도 직접 끓여볼까 합니다.”
“자네 손이 여물어서 다행이지. 민재 저 애는 영 쓸모가 없어.”
민재에게 주방을 맡겼다가는 분명 둘 다 굶어 죽거나 식중독에 걸렸을 거라고.
라면을 끓이다가도 냄비를 태워 먹은 전적이 있는 탓에, 민재는 무어라 변명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은 아직 없고?”
“좋은 소식이라뇨?”
“그거야 당연히 증손주 소식이지. 이 할미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야.”
갑자기 아이 얘기를 꺼내자 민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음료수 좀 사올게요!”
줄행랑을 쳐버린 민재 대신, 혼자 남은 무혁은 겸연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은 신혼이니까요. 아이 문제는 민재가 원할 때 천천히 논의해보고 가질까 합니다.”
“자네는 아이를 서둘러 갖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그 문제는 민재의 뜻을 따르려고 합니다.”
“설마 민재를 뺏길까 봐 질투하는 건 아니고?”
할머니의 촌철살인에도 무혁은 그저 웃기만 했다.
처음에는 조금은 어색하던 두 사람의 사이도 지금은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나중에 증손주도 보셔야 하니까. 앞으로도 오래오래 함께하셔야죠.”
“내가 죽기 전에, 민재 부모를 찾아줘야 할 텐데.”
친부모를 찾을 만한 징표는 민재에게 모두 넘겨줬건만, 정작 본인은 친부모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혁은 할머니에게 되물었다.
“처음 민재가 발견된 곳이 보육원이 맞습니까?”
“그래. 민재 어미 말로는 그날 새벽, 보육원에서 경비 보던 사람이 제일 처음 발견했다더군.”
제법 추운 새벽 날씨 때문에, 버려진 아기는 조금만 늦게 발견됐어도 그대로 얼어 죽을 뻔했다.
“그때는 드물게나마 집에서 아이 낳고 그러는 집도 있어서, 동네 어른들이 적당히 보증만 서주면 출생 등록도 할 수 있었지.”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친자식으로 등록된 거였군요.”
“평생 모르고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장어른이 계실 때만 해도 다들 그러지는 못했을 텐데, 삼촌이 그렇게 모질게 굴 줄은 나도 몰랐지.”
죽은 여동생 몫의 유산을 나눠주지 않기 위해, 외가 삼촌들은 민재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밝히며 재산을 저들끼리 나눠 가졌다.
그 돈만 있었어도 민재가 공부를 포기하는 일이 없었을 텐데.
노인과 학생이 상대하기에 민재의 외삼촌들은 너무나 대단하고 거대한 존재였다.
“대학교수까지 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할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저들이 필요할 때는 민재가 똑똑하다고 이것저것 부려먹을 때는 언제고.”
그 사실은 무혁 역시 알고 있었다.
하버드에서 유학하던 시절, 민재의 외삼촌은 무혁에게 말을 붙여 보기 위해 당당하게 민재의 존재를 팔았다.
서원대 출신 조카가 지금은 A&Z 로펌에 다니고 있다고.
그 애가 정말로 힘들 때 손 한 번 내밀지 않은 주제에.
이제는 그런 조카를 팔아서라도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 그의 환심을 사려 들었다.
“그런 거였군요.”
곤란한 듯 시선을 피하는 민재의 불안이 뭐였는지 무혁도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부모님의 죽음. 친척들의 배신. 병든 할머니까지. 석민재의 어깨에는 너무나 많은 짐이 올려져 있었다.
어쩌면 가장 그녀의 곁을 지켜야 할 순간에 무혁마저도 민재를 놓아버렸다.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때늦은 후회가 폐부를 찔렀다.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제 앞에서 민재를 상처입히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제가 민재를 지킬 겁니다.”
그녀가 잃은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찾아 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는데, 어쩐지 늦은 시간에 문밖이 소란스럽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민재 아니냐!”
다 늦은 시간에, 힘이 넘치는 노인의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병실 밖을 나서자 민재 옆에 서 있는 환자복 위에 반짝이 카디건을 걸친 노인.
누가 봐도 꾀병 같아 보이는 저 영감탱이가 어째 낯이 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