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너무 좋아서 가끔은 불안해져요.
이쯤 되면 누가 악당인지 긴가민가할 정도건만 진무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음모를 정당화했다.
“민재가 혜성 가의 자식이 아닐까. 그런 의혹이 나올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다가 아닌 게 밝혀지면 어쩌려고?”
“어차피 의심한 건 본인들이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진짜든 가짜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닐 테니까요.”
설령 아니라고 밝혀지게 되더라도 더는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리라.
다른 사람도 아닌 홍옥자의 마음에 든 사람이니까.
설령 진짜 혜성 가의 자식이 아니라 해도 민재를 지켜줄 만한 방패막이 노릇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나쁜 놈.”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저놈을 대체 어찌할까 싶지만 이미 늦었다.
석민재만 있었다면 금방 끝날 일이건만, 안 팀장은 오늘따라 민재의 존재가 오늘따라 너무나 아쉬웠다.
투덜대는 안 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혁은 슬쩍 폰을 확인했다.
[오늘도 저녁 먹고 들어갈게요. 먼저 자요.]
계약 연장 얘기가 나온 이후로 민재는 아예 홍 사장과 저녁을 먹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조차 제 계획의 일환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밀려드는 자기혐오에 무혁은 책상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쉬었다.
***
매번 쇼핑으로 이어지던 홍 사장과의 면담은 며칠 만에 막을 내렸다.
“저, 발이 아파서요.”
잠시만 쉬었다 가면 안 되냐고 말한 것뿐인데.
그날 이후로 민재는 매일 수정일보 사장실로 출퇴근을 하게 됐다.
“매번 차로 데리러 와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부러 집 앞의 회사를 두고 나한테 와 주는 건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기사까지 보내 주는 홍 사장 덕분에 민재는 한동안 무혁과 출근 시간도 겹치지 않게 됐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 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졌다.
처음 홍 사장과 저녁을 먹고 밤늦게 들어간 날부터였을까.
뭐라고 말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무혁은 아예 아침 일찍 아침을 차려놓고 일찌감치 출근해버렸다.
그는 일찍 나가고, 민재는 밤늦게 들어오니 요 며칠은 서로 거의 얼굴도 보기 힘들었었다.
“그래서, 오늘도 집에 일찍 들어가기가 싫어진 거야?”
“그런 건 아니고요.”
“부부싸움이라도 한 거야? 무혁이 놈이 괴롭혀?”
“정말 아니에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무혁이 한 말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 내 행동 어디가 계약위반이라는 건데?
사람과 사람의 문제가 계약서 한 장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계약서의 존재 자체가 때로는 민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혼이라는 건, 일종의 계약인 거잖아요.”
두 사람은 서로의 목적 때문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기한까지 칼같이 정해놓은 시한부 계약서를 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재의 안에서는 점점 품어선 안 될 마음이 커져만 갔다.
“그런가? 내가 결혼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네.”
“특별히 이유가 있으셨던 건가요?”
며칠 사이 제법 친해진 덕분에 이제는 이런 질문까지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질문이 우스웠던 건지, 홍 사장은 깔깔 웃으며 민재의 등을 때렸다.
“그거야 남자가 없어서 못 했지!”
얼마나 세게 친 건지 등이 욱신거려 울상을 지었다.
물론 방금 한 말이 진심은 아닐 테지만, 저 정도로 많은 걸 가진 사람이라면 못 했다기보다는 안 한 게 맞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은 있었지. 하지만 누군가에게 얽매여서 사는 건 내가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
“얽매인다고 하시면…….”
“말 그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한 침대를 쓸 수 있을 만큼 내가 속이 넓은 사람은 아니거든.”
끝까지 사랑할 자신도 없을뿐더러, 중간에 도망치는 건 더더욱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그래서 아예 원인조차 만들지 않겠다는 말에 민재는 할 말을 잃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정말로 평범한 사람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다지만.
한편으로는 민재가 결혼을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과 어느 정도 맥락이 닿아 있기도 했다.
“저도 제가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왜? 무혁이랑 같이 있는 거 보니 참 잘 어울리던데.”
“그 사람은 저한테는 과분한 사람이니까요.”
대학 시절이나 지금이나, 진무혁은 언제나 곧은 눈동자로 민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람과 헤어지며 앞으로 사랑 같은 건 다시 할 수 없을 줄만 알았다.
“차라리 아무 감정이 없다면 적당히 잘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냥 비즈니스로 하는 결혼을 말하는 거야?”
결혼은 사랑이 아닌 현실이라고. 로펌의 여자변호사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알콩달콩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문성희 변호사조차도 가끔은 시댁 문제로 남편과 싸웠단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냥 서로 챙길 것만 챙기고. 각자 할 거 하면서 그러면 서로 편할 것 같아서요.”
“그럴 거면 굳이 결혼까지 해야 할 이유도 없지.”
“그건 그렇네요.”
처음에는 적당히 하우스 메이트 정도로만 생각하고 시작한 계약 결혼인데, 함께 지내다 보면 부부란 이름으로 묶이며 유대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나쁜 점이 가득했다면 빨리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혁과 함께 지내다 보니 민재의 안에서도 점점 품어서는 안 될 욕심이 피어났다.
“싫은 건 아니에요. 좋은데, 아니 너무 좋아서 가끔은 불안해져요.”
귀찮은 잔소리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챙겨주는 기분이 싫지 않았다.
매번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함부로 대하던 사람들도 진무혁이라는 방패막이 하나가 생기자 거짓말처럼 태도가 달라졌다.
“그냥 연인이나 뭐 그런 게 아니라, 가족인 거잖아요.”
보호자를 자처하는 진무혁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안정감이 생겼다.
만약 길을 가다 민재에게 교통사고라도 나게 된다면 할머니는 어떻게 되는 걸까.
기댈 곳 하나 없는 민재의 발밑은 갓 부서져 버릴 암벽처럼 불안하기만 했는데.
진무혁이 곁에 있으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혼자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흐응. 무혁이 녀석이 바람이라도 피운대?”
“아니라니까요. 그냥 제가 너무…….”
“왜. 새삼스럽게 남편이 너무 좋아 죽을 것 같아? 이봐요, 석민재 씨. 사람 것 참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혼자인 자신을 우롱하는 거냐며 버럭 화를 내는 통에 민재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제 속내를 삼켰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차마 할 수 없는 교활한 제 마음이 야속하기만 했다.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거구나…….’
하필이면 소영하라는 비교군이 있으니 더더욱, 지금의 이 감정이 더욱 여실히 윤곽을 드러냈다.
매번 말을 바꾸고 자기 위주로만 굴던 그 인간에 비해 진무혁은 언제나 민재를 최우선으로 여겨줬다.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는 다정함에는 배려가 녹아 있었다.
이제는 곤란해하는 자신을 위해 그는 기꺼이 계약 연장 얘기를 먼저 꺼내주기까지 했다.
“제가 선배, 아니 무혁 씨의 발목을 잡은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래요.”
“미안할 게 뭐 있어. 그 녀석, 자기랑 결혼한다고 아주 입이 찢어지게 좋아했었는데.”
“네?”
아무래도 진무혁의 완벽한 남편 연기에 홍 사장도 속아 넘어간 모양이다.
안절부절못하는 민재를 앞에 두고서 그녀는 갑자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전화를 들었다.
“안 되겠네.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어.”
“갑자기 무슨…….”
“어, 진 변. 나 홍 사장인데. 석민재 씨가 갑자기 식중독에 걸려서 쓰러졌지 뭐야?”
“네? 읍…….”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홍 사장의 손에 입이 틀어막혀 소리도 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손발을 버둥거리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딥니까.”
“회사지. 배가 많이 아프대서 지금 사장실에 누워 있어.”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뚝 끊어졌다.
집에서 수정일보까지 달려오려면 차로 이십 분은 걸릴 텐데, 홍 사장은 깔깔 웃으며 시계를 가리켰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 인간, 십오 분도 안 돼서 달려올걸?”
“홍 사장님. 이런 짓을 하시면 어떡해요!”
“알 게 뭐야. 내 마음이지.”
티라노사우루스라는 이명답게 홍 사장은 행동에도 거침이 없었다.
내가 언제 오라고 했냐는 적반하장을 내세우며 홍 사장은 아예 민재의 전화마저 압수해버렸다.
“자, 십 분 지났어.”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제발 그만두라는 민재의 애걸에도 홍 사장은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비서들! 밑에 진무혁 변호사 오면 바로 사장실로 데려오도록 해.”
“네, 사장님.”
잘 훈련된 군인처럼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모습에 민재는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어서 여기 누워.”
“사장님! 이건 진짜…….”
“궁금하지 않아? 진무혁의 진심이 뭔지.”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라며 꼬드긴 뱀의 유혹이 꼭 이런 거였을까.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괴력의 소유자인 홍 사장은 어쩔 줄 모르는 민재를 번쩍 들어서는 그대로 소파 위에 눕혀버렸다.
“자, 여기 물도 좀 마시고.”
“석민재!”
노크도 없이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놀란 탓에 홍 사장이 입에 거의 떠넘기다시피 한 물이 입가에 흘러내렸다.
“선, 콜록, 콜록.”
“거봐. 내가 무리하지 말랬잖아.”
갑자기 머금은 물에 사레가 들려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콜록대는 민재를 보는 무혁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렸다.
아예 무릎까지 꿇고서 등을 두드려주던 그는 이마까지 짚어가며 열까지 체크했다.
“대체 뭘 먹었길래 이러는 거야.”
“나 괜찮아요. 진짜 아무 일도 아닌걸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리 와, 집에 가자.”
무혁은 홍 사장을 죽일듯한 눈으로 노려보고서는 그대로 민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러려고 한 일이 아닌데.
무혁의 품에 공주님처럼 안긴 채 고개를 돌리자 저 뒤에 홍 사장이 배가 찢어질 듯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홍 사장과 휘말리면 뭔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기분이 들어서 속이 쓰리다.
“나 진짜 괜찮으니까, 이만 내려줘요.”
“네 괜찮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무혁이 너무 진지한 탓에 차마 장난이었다고 밝히기도 곤란해졌다.
차에 탄 후에도 그는 손수 안전띠까지 매주고서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바로 병원으로 갈까?”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냥 집으로 가요.”
“정말 괜찮겠어?”
“괜찮다니까요.”
아무래도 무혁의 눈에 민재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보다도 못한 모양이다.
몇 번을 말리고 나서야 무혁은 핸들을 꺾어 집 방향으로 차를 틀었다.
“홍 사장 옆에 있는 게 많이 힘들어?”
“힘들긴 뭐가 힘들어요. 별로 하는 것도 없고, 그냥 홍 사장님하고 놀아주는 것 같아서 양심이 찔리는걸요.”
“힘들면 말해. 언제든 그만두게 해줄 테니까.”
그만둔다는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얼핏 들으면 홍 사장을 상대하는 일을 말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한 말 같기도 했다.
다분히 중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 다 정확하게 무엇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힘들면, 정말 그만둬도 되는 거예요?”
“네가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지는 않을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저건 진심일 거다.
확고한 그의 뜻을 앞에 두고 민재도 나름의 결심을 내렸다.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진심이야?”
“난 지금이 좋은걸. 홍 사장님도 좋고, 여차하면 선배도 와 줄 거잖아.”
차에서 내리기 전에 이 문제만은 매듭짓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 습관 때문에 또 선배라고 불러버렸는데.
어쩐지 오늘따라 무혁은 그 부분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다.
“지금이 좋단 거지.”
“굳이 싫어해야 할 이유가 없는걸.”
하도 고생만 하며 살다 보니 힘든 것에 익숙해져서.
편하고 좋은 것을 너무 멀리한 감도 없지 않았다.
막무가내 홍 사장이 판을 깔아준 덕분에 민재도 이렇게나마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냥 좀 불안해서 그런 거니까. 딱히 싫다거나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불안할 게 뭐가 있어. 내가 있는데.”
아주 잠깐, 그래도 갑자기 달려와 준 모습을 보고 감동할 뻔했는데 진무혁은 또 이런 식으로 초를 쳤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저 자기애의 원천이 뭘까.
아연실색하는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은 얄미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남편 같지 않아?”
“뭐라는 거야. 저리 가!”
리모콘으로 차를 잠그고서 무혁은 괜히 민재를 뒤에서 안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도 민재는 굳이 무혁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녁은 집에서 먹어. 혼자 밥 먹으려니까 양도 남고, 요리할 맛도 안 나.”
“매번 번거롭지 않아? 난 귀찮을까 싶어서 일부러 먹고 들어가는 건데.”
“혼자 밥 먹는 건 나도 괴로워. 안 팀장한테 같이 먹자고 할 수도 없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을 꼭 잡은 채 민재도 솔직하게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말을 꺼냈다.
“우린 둘 다 참 외로웠나 보다.”
어쩌면 또 제 생각만 하다가, 무혁의 마음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느새 익숙해진 그의 집은 어느 곳보다 편안한 공간이 됐다.
“속은 좀 괜찮아? 디저트로 와플 아이스크림이나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와플 기계 새로 산 거야?”
언제 또 지르신 건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와플 기계가 주방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반죽도 다 해놨으니까. 어서 씻고 나와.”
아무래도 벌써 식성을 파악 당한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좋다.
따끈따끈한 와플 생각에 군침을 삼키며 민재는 서둘러 욕실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