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33화 (33/103)

33화. 그러니 더욱 민재가 필요한 겁니다.

“왜 기사가 통과가 안 되는 거야!”

김영룡 기자는 울분을 풀지 못하고 애먼 벽만 두드렸다.

그렇게 몸으로 뛰어 특종을 주워왔건만 데스크에서는 매번 반려의 철퇴를 내려찍었다.

지난 번 일은 일반인이 얽혀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소영하의 생방송 건은 분명 큰 이슈가 될 터였다.

“젠장!”

석민재에 대한 내용도 모조리 빼고서, 소영하에게 일반인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멘트조차도 안 된단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매체에서 제대로 된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은 건 물론, 소속사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받아 적은 내용들만이 포털을 온통 장악해버렸다.

“대체 HS엔터에서 뭘 받으셨길래 이러십니까!”

“그쪽은 지금 예민하니 건드리면 안 돼. 혜성 승계 문제는 자네도 알잖나!”

혜성가의 상속 분쟁에 얽히고 싶지 않다며 데스크에서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몸을 사렸다.

그렇게 터트릴까 말까 뜸을 들이는 사이 석민재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다.

“더럽게 얽혔네. 진짜.”

데스크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왜 기사가 반려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석민재의 남편이란 변호사는 재수 없게도 연예매체 스타커넥트의 모회사인 수정일보 사장인 홍옥자와 친분이 있다.

정확히 말해 수정일보 홍옥자의 언니가 혜성가의 사모님에.

그 소송을 담당하는 게 석민재의 남편이고.

석민재를 버린 소영하의 소속사, HS엔터 성준범 이사는 제 양어머니인 혜성 사모님과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에 들어갔다.

‘사실상 홍옥자 사장과 석민재 남편 대 소영하와 성준범 이사란 건데.’

수면 아래에서 피 말리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건만 대중은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역시 수정일보 본사가 관여된 사건이다 보니 이제 석민재 쪽은 아예 건드리고 싶어도 언급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아무래도 뒤가 구리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십 년 넘게 갈고 닦은 동물적인 기자의 촉이 그렇게 말했다.

하필이면 저 갈등의 중심에 아무것도 아닌 석민재가 끼어 있는 걸까.

“뭐해? 오늘도 깨졌어?”

머리를 쥐어뜯는 꼴을 보고 입사 동기인 경제부 부장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반골 기질이 충만해 매번 사고를 치며 윗선의 미움을 받는 그와 달리, 동기는 승승장구 승진을 반복해 일찌감치 부장을 달았다.

“혜성 놈들 소송 때문에 그러지. 그거 때문에 소영하 기사도 반려 당하고. 젠장.”

“오래 준비했다면서. 그러게 실검이나 대충 베껴서 쓰라니까.”

“그게 무슨 기자야!”

목에 핏대를 세워보지만, 실상 그런 식으로 해야만 사람들의 주목을 더 끌수 있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이제는 완전히 구식이 되어버린 제 취재는 이대로 묻혀야 하는 걸까.

힘들게 구한 석민재의 사진을 쥐고서 김영룡 기자는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근데 그 여자는 누구야?”

“그러고 보니 넌 알겠다. 이번 혜성 소송건 말이야.”

워낙 큰 기업의 경영권이 달린 문제니 경제부에서도 이 건에 대해서는 제법 세밀한 취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동기는 김 기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독 사진 속 석민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래서, 홍옥자랑 성준범이 이 여자를 가운데에 두고 대리전 중이라는 거야?”

“참 이상하단 말이지. 이 여자는 진짜 그냥 일반인이란 말이야.”

소영하와 사귄 게 아니라면 애초에 주목 한 번 받을 일이 없던, 그냥 얼굴 좀 반반한 여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동기는 아예 사진까지 받아 들고서는 여자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봤다.

“이 여자, 이제 보니 그 사람을 닮았네.”

“누구?”

심각한 얼굴로 제 폰을 뒤지다가 그는 아주 오래 된 사진 한 장을 찾아내 보여줬다.

“지금 쓰러진 혜성 성 회장 말이야. 그 사람이 결혼을 워낙 늦게 해서 결혼식이 화제였거든.”

“어디 봐.”

이제는 모두 전산화된 옛 자료 DB 안에는 성 회장 부부의 결혼식 소식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는 사이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긴 했다지만 홍옥자의 언니, 즉 혜성 사모님의 이목구비는 분명 보자마자 석민재가 떠오를 만큼 판박이처럼 닮았다.

“그러네. 진짜 닮았어.”

“너 혹시 그 건 기억나냐? 혜성 가 납치 사건 말이야.”

“납치라면……. 그 애가 집에서 없어졌다는 그거?”

워낙 옛날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그래도 신문사 내에서는 보도 규제를 강하게 걸었던 사례로 간간히 언급되곤 했다.

대기업 회장의 자식이, 그것도 자택에서 홀연히 사라진 후 행방조차 알지 못한 채 벌써 삼십 년이 지났다.

“그 애는 결국 못 찾았다잖아. 이 여자가 설마 그 앤가?”

“에이 설마. 석민재는 분명…….”

부모가 모두 죽어 고아가 되긴 했지만 가족관계등록부 자체는 깨끗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쩐지 사진 속 성 회장 부인과 석민재의 얼굴이 유독 겹쳐 보이는 건 사실이다.

“입양은 기록이 남지 않나?”

“보통은 그렇긴 한데, 사라진 애가 분명 돌도 안 됐던 걸로 기억해.”

혜성 가의 비극은 이번 상속 분쟁의 핵심 원인 중 하나였다.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성준범이 양자가 되는 일도 없었을 거였다.

“그렇단 말이지.”

아무래도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오라기보다 못한 실마리를 손에 쥐고서 그는 차 키를 들고 회사를 나섰다.

***

민재가 홍 사장 쪽에 가 있는 사이 안 팀장은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석민…….”

하루에도 몇 번씩, 습관처럼 민재를 찾다 다시 주저했다.

다른 부서의 패럴리걸(법률 사무 보조원)이 잠시 업무를 대신하려고 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 손을 직접 키운 민재만큼 입맛에 맞출 수는 없었다.

“젠장.”

홍 사장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건지 아예 민재를 빼갈 속셈이 가득해 보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안 된다고 단칼에 거절해 버렸어야 했는데.

어쩐지 민재를 제일 싸고돌아야 할 진무혁은 잠자코 이 모든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야, 진무혁!”

이대로 있다가는 제 손으로 곱게 키운 부하를 남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분기탱천한 안 팀장은 결국 바로 옆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진무혁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뭡니까.”

“너 대체 속셈이 뭐야?”

민재 대신 업무를 보던 패럴리걸이 듣지 못하게, 그는 문을 꽉 닫고서 무혁을 추궁했다.

“속셈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나한테 석민재를 맡아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홍 사장한테 넘기겠다는 건데?”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사실은 물론, 지금까지 민재의 근황을 전해준 뻐꾸기는 다름 아닌 안 팀장이었다.

처음 민재가 취업하겠다고 나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무혁은 안 팀장에게 먼저 연락해 직접 머리를 숙였다.

“그 얘기는 이제 없었던 일로 하자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네 옛날 여자친구인 걸 알았으면 애초에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결과적으로 민재가 마음에 드셨던 거 아닙니까. 선배님.”

더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으면서.

같은 서원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무혁은 꼭 자기가 불리할 때만 선배님이란 말을 붙였다.

그 역시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닌 진무혁의 부탁이니까.

며칠 써보고 금방 울며 뛰쳐나갈 줄 알았던 석민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 팀장의 괴롭힘을 묵묵히 견뎠다.

‘마음에 들긴 들었지.’

잘 웃지도, 잘 울지도 않는 그 무심함이 마음에 들어서 곁에 둔 지도 벌써 칠 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법대 졸업생을 이제 좀 한 사람 몫을 하게 키워놨건만.

홍옥자 그 인간은 아주 신이 나서는 온종일 민재를 잡고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 오래 두진 않을 겁니다. 어쨌든 석민재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니까요.”

“그럴 거면 왜 갑자기 홍옥자 그 여자 옆에 붙여놓은 건데?”

“부부싸움을 좀 해서요.”

“부부싸움?”

불을 뿜는 안 팀장을 앞에 두고 무혁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아꼈다.

말로 적당히 둘러대긴 했다지만, 민재가 계약 종료에 대해 먼저 언급해 왔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동안 너무 옆에 붙어 있었으니 가끔은 멀어져 있어야 제 소중함을 알겠죠.”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고작 그따위 이유로 석민재를 홍옥자 옆에 데려다 놨단 말이야?”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 일 이후로 민재는 어색하게 눈을 피하며 좀처럼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본인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지금은 홍옥자 옆에서 그 존재를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 눈에 새겨 두는 편이 나았다.

“아마 조만간 기자든, 증권가든 말이 돌 겁니다. 홍옥자 옆에 붙어 다니는 저 여자의 정체가 뭐냐고.”

“석민재가 왜, 설마 소영하?”

“그럴 리가요. 소영하 건은 우리가 건드리지 않아도 저쪽이 알아서 잘 막아줄 겁니다.”

기사는 어떻게든 막았다지만 HS엔터 주주들 사이에는 이미 소영하의 일탈 행동에 대한 소문이 제법 퍼진 지 오래였다.

새 영화가 그럭저럭 잘되기는 했다지만 기대한 수준 만큼은 아니다 보니 내부에서도 슬슬 소영하를 대체할 신인을 키우는 게 낫지 않겠냐는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소영하를 전면에 내세웠던 성 이사가 그리 쉽게 제 손에 든 패를 내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성준범 이사가 민재를 그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이유가 뭔지, 아마 안 팀장님도 잘 아실 텐데요.”

“그거야…….”

다른 사람들 눈에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유라지만 당사자에게는 제법 심각한 문제다.

굳이 조원식 본인을 직접 보내면서까지 민재를 짓밟으려고 한 이유는.

“홍 여사랑 닮아서 그런 거겠지. 기분이 나쁘니까.”

그나마 성준범을 귀여워하던 성 회장은 의식을 잃은 지 오래고, 부인 쪽은 오래전부터 반강제로 들인 양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다.

두 사람의 불화도 이번 분쟁도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성준범 쪽이 우세일 거라 예상하던 이들도 고요한 사모님 쪽의 반격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이 바닥에서 홍옥자랑 척을 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텐데. 하필이면 그 홍 사장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꼼짝 못 하는 사람이 그 언니니 말입니다.”

“그래서, 석민재를 홍 사장이랑 어떻게 엮겠다는 건데?”

“그건 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조원식이 던져준 빌미가 오히려 무기가 됐다.

만약 민재가 입양아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호사가들은 분명 실종된 아이가 사실은 민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유전자 검사 한 방이면 밝혀질 일이라지만 검사 전에는 누구도 결과를 확신할 수 없다.

표면상으로 아니라고 부정하며 사람들 마음속의 의심과 불안에 불을 지피게 된다면.

석민재 본인을 지키는 건 물론이고, 이번 소송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전에 나눠놓은 지분은 사모님과 성 이사, 두 사람의 싸움을 대등하게 만들었지만, 거기에 친자식 하나가 더 끼어들면 얘기가 다르죠.”

“유류분을 청구할 테니까, 전체 지분의 이십오 퍼센트면 제법 비중이 크겠네.”

아무리 양아들이라고 해도 성준범은 정식 입양 과정을 거쳤기에 당연히 상속에 대한 권리 역시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만약, 성 회장의 친자식이 등장하게 되면 그가 물려받을 몫이 줄어들어 경영권 확보에도 먹구름이 끼게 된다.

“만약 홍옥자가 이제 와서 성 회장의 자식을 찾아냈다고 하면, 성준범 쪽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점점 불안해지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핏줄인 자식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막말로 뒤에 숨은 제 부모만 챙기고 있는 양자를 누가 반가이 여기겠습니까.”

만약 평범한 입양아였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경영권 문제가 불거지며 성준범의 만행도 하나하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고 제게 실권이 넘어오자 성준범은 슬며시 손을 써 제 생부와 생모 쪽에 여러 이권 사업을 차명으로 넘겨 재산을 빼돌린 정황이 포착됐다.

“결국, 믿을 건 자기 핏줄밖에 없다. 그런 판단이었겠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까요.”

제 아들이 장차 혜성이 주인이 될 거라며 벌써 갑질을 해대고 있다고.

아무리 쉬쉬한다 해도 뒷조사 전문 한용식의 매서운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성준범이 제 핏줄을 챙기는 것도 나이 지긋한 대주주들 눈에는 어쩌면 당연하게 보이겠지.”

“그러니 더욱 민재가 필요한 겁니다.”

아무리 성준범이 무능하다 해도 이미 결정한 승계 문제를 왜 이제 와서 반대하는 거냐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석민재라는 와일드카드가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삼십 년 넘게 행방조차 모르던 자식이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제 딸 몫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소송까지 불사하는 건 충분히 미담이 될 수 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말하는 무혁을 앞에 두고 안 팀장은 질렸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다 석민재가 다치면?”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허, 그거 참.”

하늘을 찌르는 저 오만함의 근거가 뭔가 싶지만, 진무혁이 말하면 그조차도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패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그런 안 팀장을 힐끗 보고서 무혁은 제 곁에 놓인 서류 더미를 그의 손에 들려줬다.

“유능한 부하가 없으니 이제는 안 팀장님이 혼자 다 알아서 하셔야 할 일들입니다.”

“이걸 내가 다 어떻게 봐. 석민재한테 요점만 정리해오라고 하면…….”

“적당히 부려먹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팀장님 부하이기 이전에 제 아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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