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내 행동 어디가 계약위반이라는 건데?
“여기 옷 마음에 든다. 보는 것마다 다 예쁜데, 아예 이 골목을 다 사 버릴까?”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제 귀를 의심했다.
“여기를 다요?”
“그럼. 이 골목을 전부 다 사서 거대 쇼핑몰로 만드는 거야!”
갑자기 법률 자문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민재를 데리고, 홍 사장은 뜬금없이 쇼핑 길에 나섰다.
“진정하세요. 사장님.”
“여기는 거의 십오 년 만에 와 보네. 옛날에 알던 가게는 하나도 안 보이고, 요즘 세상에는 뭐든 다 이렇게 금방금방 바뀌어버리는구나.”
요 몇 년 사이에도 가게들이 여러 번 바뀐 탓에, 홍 사장은 추억할 거리 하나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게 불만이라며, 지금 당장 빌딩 주인을 불러오라는 호통만 봐도 티라노사우루스라는 이명이 왜 붙은 건지 익히 알 만했다.
‘근무시간에 이래도 되는 건가.’
그야말로 전담반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는데.
부담감을 안은 채 민재는 묵묵히 홍 사장의 뒤를 따랐다.
“만약에 진짜 이 골목을 모조리 사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글쎄요.”
무모한 이야기라는 건 알지만, 민재는 차분히 부동산 거래의 요점을 짚어나갔다.
“법인 명의로 구입하실 건가요, 아니면 개인 명의로 구입하실 건가요?”
홍 사장이 아무리 해괴망측한 질문을 던져도 민재는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태도로 성심성의껏 답변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여기를 모조리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역별로 알짜배기들만 골라 사라는 거지?”
“물론 이 지역 자체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위험이 낮긴 하지만, 원래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조곤조곤 이유를 설명해주는 민재의 목소리는 참으로 낭랑했다.
그 괴팍하게 굴던 홍 사장도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듯 설명을 경청하며 차분히 과정을 수긍했다.
“오히려 그게 손해라면 안 하는 게 낫겠네.”
“사장님 뜻이 그러시다면 그러는 편이 맞겠죠.”
“자기처럼 얘기해주면 귀에 쏙쏙 들어오는데, 우리 임원들은 왜 이런 식으로 설명을 못 하는 거지?”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홍 사장의 말에 민재는 쓴웃음만 애써 삼켰다.
뒤를 수행하는 비서들의 곤란한 얼굴을 보니 저 사람들도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민재의 이야기가 퍽 재미있었던 건지, 홍 사장은 아예 카페에다 자리를 잡고서 평소 궁금했던 사항들을 열심히 물어봤다.
“자기야. 내가 만약에 여기서 치한을 만났어. 그놈이 내 엉덩이를 만지고, 내가 그놈 이빨을 두 개 날리면 결과적으로 누가 이기는 거야?”
극단적인 질문은 그렇다 쳐도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비서조차 그만하시라고 말을 보태지만 민재는 침착하게 법리적으로 해석을 풀어나갔다.
“글쎄요. 이기고 지는 걸 나눌 수는 없겠지만 치아 두 개라면 과잉 방어로 결론 날 가능성이 크네요.”
“그놈이 내 엉덩이를 먼저 만졌어도?”
“현재 대법원 판례를 따르자면 그렇긴 하지만, 실질적인 결론은 판결을 받아 봐야 알겠죠.”
모든 판결에는 근거가 필요한 법이다.
눈을 가리고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처럼 단편적인 사실이 아닌, 전체적인 상황을 보게 된다면 사건의 진상은 의외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미성년자도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연약한 여자도 남자를 폭행할 수 있어요. 험상궂은 사람만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선입견은 오히려 법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건 그렇네.”
“그래서 법이 존재하는 거죠. 만약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게 누구든 누구나 똑같은 잣대에서 처벌받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원론적인 이야기를 줄줄 읊는 민재를 보며 홍 사장은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내가 지금까지 본 변호사들은 이런 얘기는 안 해줬는걸.”
“그분들은 전문가시니까요. 저랑은 다르죠.”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하는데, 왜 변호사 시험을 안 본 거야?”
“로스쿨은 학비가 비싸거든요.”
사법고시를 회사에 다니면서 준비하기에는 여력이 없고, 이제는 그마저도 아예 사라졌으니 변호사가 되려면 로스쿨에 지원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막대한 학비가 드는 로스쿨은 가난뱅이 민재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편찮으신 할머니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는데, 언감생심 공부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학비 대주면, 공부할 생각은 있고?”
“네?”
“말 그대로. 내가 민재 씨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겠단 얘기야.”
혜성 사모님이라는 언니와 닮아서 그런 건지,
남들에게는 무자비한 홍 사장도 민재는 남들이 봐도 알아볼 정도로 티 나게 예뻐했다.
지금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홍 사장은 제 조카뻘인 민재를 바라보며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내가 자식이 없어서 민재 씨 보고 있으면 남 같지 않고, 그래서 그래.”
“그래도 사장님. 그건 좀…….”
“옆에서 보고 있자니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 것 같고. 돈이 문제인 거면 내가 얼마든지 대 줄 수 있다는 얘기야.”
가진 건 돈뿐이라며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 농담이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도 무턱대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한 번 생각해봐. 손해 볼 제안은 아닐 테니까.”
자신만만한 홍 사장의 말에 민재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
온종일 함께 쇼핑하러 다니느라 진이 빠져서, 민재는 저녁 늦게서야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다.
“다녀왔어요.”
식사까지 하고 가라는 걸 한사코 거절하고 집에 온 이유는 진무혁 때문이다.
구두를 벗고 주방으로 달려가자 무혁은 오늘도 앞치마를 두르고서 저녁 준비를 마쳤다.
“손 씻고 와. 밥 먹자.”
“진짜 맛있겠다.”
맑게 끓인 생태탕이 나오자 군침이 절로 돌았다. 신나게 숟가락부터 드는 민재를 보며 무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어?”
“할머니 입원하시고는 엄두가 안 나서, 우리 할머니처럼 끓이는 곳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단 말이야.”
오랜만에 생각난다는 말을 얼핏 흘렸는데, 놀랍게도 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까지 걸어 레시피를 배우기까지 했다.
손이 많이 가는 요리임에도 불구하고 불만 하나 없이 그는 할머니의 손맛을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맛있어.”
정신없이 맛을 보다 고개를 들어 보니, 무혁은 아빠처럼 인자한 얼굴로 그런 민재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번 일이 생각이 나서 양심이 찔리긴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뻔뻔스러워지는 쪽을 택했다.
“홍 사장은 어땠어?”
“그냥 그렇지, 뭐.”
업무적인 내용은 공유하면서도 홍 사장의 제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만약 정말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당장 눈앞의 문제가 벽처럼 남았다.
이 불안한 결혼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데. 새로운 시도도 그 이후에나 생각해 볼 일이다.
“티라노사우루스라는 말이 왜 나온 건지 이제는 좀 알 것 같아.”
온종일 별 해괴한 질문 세례에 시달리느라 진이 빠졌다.
그렇게 별일이 아닌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무혁은 컵에 물을 따라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홍 사장이 네 학비를 대주고 싶단 얘기를 하던데.”
“어?”
이미 다 알고 물어보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민재는 아까 오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별건 아니야. 로스쿨 가고 싶으면 도와주실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가고야 싶지.”
공부에 미련이 남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부모님이 안 계신 지금, 연세 드신 할머니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급한 대로 보험금으로 병원비를 대고 민재는 시험 준비 대신 서둘러 취업하는 쪽을 택했다.
진무혁이 말한 금액을 듣고 마음이 흔들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연세 드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면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적인 문제가 민재의 발목에 족쇄처럼 엉겨들었다.
“나도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한 게 아니야.”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게 본심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초라해지는 제 모습이 싫어서 민재는 입술을 깨문 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알아. 그러니까 마저 편하게 먹어.”
“그러니까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미운 말이 튀어 나가는 건지.
앞에 앉은 무혁을 바라보며 민재는 얼어붙은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선배가 잘 해주는 거, 별 의미 없다는 거 알고 있어.”
“민재야.”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근데 있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그와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마음의 벽이 무너지다 못해 흘러내리는 수준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진무혁은 석민재가 아니라도 괜찮을지 몰라도, 민재에게 진무혁은 너무나 특별한 존재였다.
“내가 뭐 잘못했어?”
“그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해주는 게 문제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서.
이따위 가짜 결혼에 매달릴 필요가 없을 만큼 빛이 나는 그와 달리 초라한 제 처지에 속이 쓰렸다.
“나는 네 남편이야. 이런 걸 물어보는 게 월권이란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법적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보호자고, 결혼한 이상 나는 남편의 의무를 다할 생각인데.”
자신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주장에 할 말이 없어졌다.
분명히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어느 부분부터 짚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내 행동 어디가 계약위반이라는 건데?”
확실히 계약서에 그런 조항이 없긴 했었다.
다만 감정적으로,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애매한 곳이 불편한 것뿐.
“계속 이렇게 잘 해주면…….”
헤어진 이후에 내가 너무 비참할 것 같다는 말을 제 입으로 어떻게 할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잘해서 문제란 거야?”
진무혁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처음에는 자신을 차버린 민재에게 복수하려는 건 줄만 알았는데, 사뭇 진지한 그의 태도에 오히려 두려움이 앞섰다.
“이건 내 문제니까, 선배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자존심 같은 건 진작에 모래처럼 갈려 사라진 지 오래다.
민재는 씁쓸한 마음을 애써 삼키며 무혁을 마주 봤다.
“선배가 아니라 남편이겠지.”
“지금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잖아.”
뭐가 문제냐는 무혁의 물음에 딱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진무혁은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존재가 커질수록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두려워졌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매번 그렇게 혼자 담아두지 말고.”
“그게 아니라.”
진무혁은 완벽하다.
결혼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제게는 너무나 과분할 정도로 그는 민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마음을 터놓을 상대가 있다는 건 정말로 즐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가끔은 기댈 수도 있으니까. 무혁의 곁에 있으면 어깨의 짐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래.”
이 시한부 결혼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라고 조건을 달았다.
장례를 치르고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민재는 다시 외톨이가 될 거였다.
소영하와 만날 때는 차라리 혼자 있는 게 편하기만 했는데.
누군가 집에서 기다려주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불 꺼진 집에 혼자 돌아가는 것도 겁이 났다.
“미안해. 나 먼저 일어날게.”
“헤어지지 않으면 되잖아.”
방으로 돌아가려는 민재의 등 뒤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무혁은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민재에게 다가왔다.
“네가 소영하에게 미련이 남은 것만 아니면, 난 얼마든지 이 계약을 연장할 생각이 있어.”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끈질기던 소영하의 연락이 거짓말처럼 끊기긴 했다.
지난번 그 일도 어떻게든 넘어갔어도 두 번 다시 그런 불안한 기분을 겪고 싶지 않다.
“미련 같은 건…….”
“아니, 미련이 남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안 돼.”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내가 그 인간을 다시 만날 일은 없어.”
설령 세계가 멸망해 지구상에 단둘이 남는다고 해도 소영하만은 싫다.
그토록 이기적인 인간을 어떻게 믿고 결혼까지 결심했던 건지.
우스울 정도로 마지막 남은 감정 자투리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럼 이제 뭐가 문제야?”
이게 무슨 전세 계약을 연장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계약을 이대로 연장하는 데 무슨 걸림돌이 있냐는 물음에 할 말이 없어졌다.
평소처럼 오만한 얼굴로 무혁은 민재에게 강경히 요구했다.
“이 결혼을 끝내고 싶으면 그에 합당한 이유를 가져와.”
분명 일 년 기한으로 정해진 계약서에 서명했는데 이제는 이 계약을 연장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하라니.
“내가 언제 먼저 끝내고 싶다고 했어?”
“그럼 상호 합의에 의해 자동 연장이네.”
태연히 디저트를 내오는 무혁을 보고 있자니 심각했던 고민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오늘의 디저트는 자몽 셔벗, 진무혁이 직접 만든 수제 자몽 청을 넣어서 그런지 파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맛있었다.
“이게 뭐야.”
“맛이 없어?”
“아니, 그건 아니고.”
진무혁 쪽에서 연장 얘기를 먼저 해준다면야 민재가 굳이 이 판을 깨트려야 할 이유가 없긴 하다.
그거야 그렇다지만,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모자라면 얘기해. 더 줄 테니까.”
심각한 민재와 달리 진무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소매까지 동동 걷고서 설거지에 들어갔다.
새콤달콤한 셔벗을 떠먹으며 민재는 사뭇 진지했던 제 고뇌가 참으로 덧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