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민재 씨라면 잘할 겁니다.
진무혁과 만난 날 이후로 소영하는 며칠 째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원래 매니저가 떠나고 스케줄이 비는 사이, 회사에서는 또 허튼 짓을 할까 싶어 아예 임시 매니저를 두명이나 붙였다.
“결혼하면 보통 뭐 해?”
갓 이직한 초보 아빠 매니저와 사회 초년생 로드매니저.
두 사람 다 소영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적당히 생각나는 대로 자기 의견을 읊었다.
“신혼이면 역시 그거 아닌가.”
“그거? 하긴, 그땐 그거지 보통.”
“그게 뭔데?”
“그거 있잖아요. 그거. 형님도 남자면서 왜 그러십니까.”
제 속도 모르고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매니저들을 보니 더욱 분통이 터졌다.
“저리 가! 불결한 것들 같으니라고.”
“형님!”
애꿎은 스태프들에게 화풀이를 하고서 소영하는 밴 뒷자리에 아예 드러누워 담요를 뒤집어 썼다.
“그럴 리가 없어.”
석민재가 다른 남자와 그런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예전에도 스킨십을 노골적으로 불편해한 데다, 키스도 한참 졸라야 겨우 해줄까 말까였다.
‘어째서 그 남자랑은…….’
손잡는 것조차 누가 볼까 겁내야 하는 자신과 달리 그 남자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일반인이다.
마음껏 키스하고 사진을 남겨도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라.
“젠장.”
민재가 보낸 사진을 보고 난 후에야 조금씩 현실이 와닿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런 사진이 돈다 한들 둘은 결혼한 사이니까 석민재에는 무엇 하나 흠이 되지 않는다.
정말로 그 남자와 입을 맞추고, 아니 그 이상도 하는 거라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 없다.
“화보 촬영 들어온 거 있는데, 어쩌실 거예요?”
“안 해.”
“형, 진짜 일 안 하실 거예요?”
“안 한다고 했잖아!”
전 국민이 다 아는 배우 소영하 앞에서 실장급 매니저면 모를까 일반 매니저들은 대답조차 조심스럽다.
오늘도 그렇게 스케줄을 모조리 펑크내고서 집에 돌아온 후에도, 소영하는 새벽에 민재가 보낸 사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게 대체 뭐라고.”
기껏해야 변호사 나부랭이 주제에. 저 남자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CF 한 건에 몇 억씩 받는 자신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니다.
나이도 젊으니 별 대단한 인간도 아닐 터, 소영하는 오만상을 쓴 채 민재에게 받은 사진을 매니저들 앞에 내밀었다.
“이 남자 어때?”
“우리 회사 배우예요? 와, 진짜 반듯하게 생겼다.”
외모만 보면 어지간한 배우만큼 잘생기긴 했다지만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다.
그런데 갑자기 갓 들어온 신참 로드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는 척을 했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네가 이 인간을 알아?”
소영하의 추궁에 매니저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남자의 정체를 떠올렸다.
“아마 맞을 거예요. 진무혁. 분명 진무혁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너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건데?”
“저쪽은 제가 누군지 모르죠. 저만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니까요.”
일찌감치 연예계에 큰 뜻을 품은 자신과 달리, 신참 매니저의 누나는 전교 1등을 휩쓸며 서원대 법대에 진학했다.
“우리 누나 법대 동기라고 했어요. 사진을 하도 보여줘서 분명 기억이 나요.”
“변호사라고 했어.”
좀 더 알아내 보라는 추궁에 못 이겨 매니저는 누나에게 서둘러 메시지를 보냈다.
미친 듯이 울리는 전화에 누나는 짜증을 부리며 동생의 물음에 답했다.
“나 지금 회사에 있는 거 알아, 몰라. 이 미친 망아지야.”
“그러지 말고 누나. 진무혁이란 사람이 혹시 누나네 대학 동기 맞아?”
진무혁의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누나는 뭐가 그리도 분통한지 갑자기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아, 말도 꺼내지 마. 안 그래도 석민재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데.”
“석민재?”
진무혁에 이어 석민재까지. 이야기가 나온 걸 보니 저쪽은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
소영하의 추궁에 매니저는 필사적으로 누나를 닦달해 속사정을 알아내기 바빴다.
“진무혁 걔, 동기고 후배고 고백 같은 건 절대 안 받아줬단 말이야.”
법대의 대마왕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진무혁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차갑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미 약혼녀가 있다는 소문까지 파다하게 돌았던 터라 다들 눈요기로만 삼고 고백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는데.
“그 인간을 뜬금없이 낚아챈 게 그 돌덩어리냐고.”
“돌덩어리?”
“잘 웃지도 않고 맨날 뚱해가지고. 별것도 아닌 주제에. 아 몰라, 짜증나.”
석민재가 진무혁을 차버린 것도 어이가 없는데, 이제는 갑자기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소식에 동문회가 발칵 뒤집혔다.
“완전 미친 거 아니야?”
당장 욕부터 쏟아내는 매니저 누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영하는 차분히 내용을 정리해나갔다.
그러니까 소영하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두 사람은 이미 사귀었다는 건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헤어지게 됐다.
그리고 이 년 전, 진무혁은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고.
‘내가 민재를 만난 건…….’
그것도 마찬가지로 이 년 전.
소영하 쪽에서 먼저 민재에게 반해 사귀자고 매달렸던 것도 분명 이 년 전이다.
“어이가 없네.”
제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석민재는 오랜 설득 끝에야 겨우 자신을 받아들여 줬었다.
입이 무거운 민재는 결코 남의 얘기를 쉽게 옮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눈치 같은 건 보지 않고 주저 없이 이야기해줬다.
성 이사조차 오냐오냐하는 톱스타인 제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민재만은 그를 평범한 남자친구처럼 대해줬다.
‘처음이었지.’
연예인이 되고 적지 않은 여자를 만났지만, 그들에게 자신은 언제나 배우 소영하였다.
하지만 민재만은 달랐다.
- 배우들은 얼굴이 팔리는 직업이니까. 아무리 욕을 먹어도 소송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고.
민재는 로펌에서 일하며 다양한 케이스를 봤다고 했다.
몸 로비를 하고 다닌다는 루머에 시달리는 아이돌에 형제가 사기를 치고 달아나는 바람에 덩달아 욕을 먹은 배우까지.
그들 역시 사람이건만, 대중은 정확한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너무나 손쉽게 돌팔매를 휘두르곤 했다.
- 그냥 좀, 그런 걸 보면 안타까워서 그래.
엔터 쪽 소송을 몇 번이나 접해 봐서 그런지, 민재는 연예계 생활의 힘든 점도 충분히 이해해줬다.
그래서인지 민재와 만나고 난 날이면 매니저에게 짜증을 내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제는 아무리 화가 나도 민재의 목소리만 들으면 별일이 아닌 것 같아서.
힘들 때면 언제나 제일 먼저 그녀를 찾곤 했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제 곁에 있어 줄 것만 같던 여자는 자신을 버리고 옛 애인을 만나 이제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다.
다시 매달리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걸지도 모른다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다.
“어, 잠시만요.”
사무실에서 급한 연락을 받고 메인 매니저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매니저는 처음 보는 여자를 소영하의 집으로 데려왔다.
“소영하 씨, 맞으시죠?”
새하얀 피부와 까만 생머리.
건드리면 금방 부서질 것처럼 청초하고 연약한 여자는 한 떨기 백합처럼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소영하를 마주했다.
“넌 누구야?”
“제 소개가 늦었네요.”
어지간한 백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벌일 수 없다지만, 여자의 뒷배는 소영하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법무법인 조조의 대표, 조원식의 딸이라는 여자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제 이름은 조장미, 진무혁의 전 약혼녀예요.”
***
“홍 사장 쪽 요청으로 우리 쪽에서도 몇 명이 파견 근무를 가봐야 할 것 같아.”
안 팀장은 이번 건에 투입되는 변호사들을 소집해서는 각자의 업무를 나눠줬다.
“내부에서 조율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요샌 도통 쓸 만한 사람이 없단 말이야.”
박 변호사의 쿠데타는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게 됐다.
사표까지 쓰는 바람에 주니어들 사이에서도 제법 말이 돌긴 했었다.
하지만 잡을 생각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이는 안 팀장의 강경한 태도에 박 변호사도 제법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잠잠해졌다지만 이번 일로 안 팀장의 신뢰는 완전히 잃어버린 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렇지. 제가 괜히 A&Z 이름에 먹칠을 할까 걱정이네요.”
안 팀장의 파격적인 조치로, 이번 파견 팀은 무혁의 친구인 한용식 변호사를 중심으로 꾸려졌다.
변호사 경력이 칠 년이지만 외모만 보면 어느 회사 부장 정도로 보이는 중후함이 돋보인 덕분이었을까.
그는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사람처럼 놀라운 속도로 적응에 성공했다.
“텃세 같은 건 없었어요?”
“텃세는 무슨, 무혁이 놈이 시비 거는 놈을 다 끌어가서 그런지 다들 나한테는 관심도 안 줍디다.”
소속 변호사만 백 명 단위인데, 그 안에서도 유독 튀는 진무혁이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한용식은 참으로 편하게 A&Z에 입성한 셈이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어차피 내 특기는 뒷조사니까, 이번 기회에 작정하고 뒤를 다 파보려고 해요.”
성 이사도 파보면 뒤가 구린 것들이 제법 나올 테니 자기 특기를 살리겠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업무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민재에게도 예상치 못한 미션 하나가 떨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민재 씨는 홍 사장 쪽을 좀 맡아주셨으면 해요.”
“제가요?”
내로라하는 변호사들을 내버려 두고 왜 하필이면 자신이란 말인가.
두 눈이 동그래진 민재를 두고 용식은 제법 그럴듯한 이유를 들려주었다.
“워낙에 까다로운 분이라서요. 아예 사람 하나를 끼고 이것저것 다 편하게 물어보고 싶으시다는데 그분 성격이 좀…….”
개성 넘치는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장난이 아닌 타입이라는 건 민재도 능히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홍 사장의 페이스에 휘말려 정신이 없을 테지만, 민재라면 차분히 길을 잃지 않고 언제든 본론으로 돌아올 자신이 있다.
“애초에 홍옥자 그 여자는 그놈의 성질머리가 문제야. 너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글쎄요.”
아마 언니와 닮았다던 것 때문일 테지만.
홍 사장 쪽에서도 민재라면 괜찮다고 한 모양인데, 정작 안 팀장은 보내고 싶지 않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자자, 안 팀장님도 민재 씨라면 중재를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보다 못한 용식이 중재에 나섰다.
주니어급 변호사는 일을 너무 모르고, 그렇다고 시니어나 파트너급을 붙이자니 수지가 안 맞다.
그러던 중 안 팀장 밑에서 오래 구른 민재라면, 분명 그 유난스러운 사람도 어떻게든 무난히 견뎌내리라.
논리정연한 설명이 이어지자 안 팀장도 입술이 댓발로 나올지언정 무조건 안 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제가 맡아도 되는 건가요?”
“넌 내가 키웠으니까. 실력만은 확실하지.”
홍 사장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겉핥기일 테니 민재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용식은 믿는 구석이 앉아 있는 사무실 쪽으로 힐끔 곁눈질했다.
“좀 실수해도 저놈이 어떻게든 수습할 테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그거야 그럴 테지만, 이렇게 보니 평생 곁가지였던 민재에게도 든든한 뒷배 하나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이래도 될까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진무혁이 없어도 저 정도라면 무난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모르는 건 팀장님께 여쭤보면서 할게요.”
“암. 네 뒤에 내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누가 뭐라 그래?”
원조 뒷배 안 팀장이 큰소리를 빵빵 칠 때쯤 진무혁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일이 잘 풀린 건지 그는 홀가분한 얼굴로 체결된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어떻게 됐어?”
“잘될 것 같아.”
소영하의 실언 이후 수정일보 쪽에서는 재빨리 배우 기획사 하나를 인수해 본격적인 확장에 들어갔다.
기존 광고주들을 설득해 소영하 대신 위험성이 적은 다른 배우를 소개하는 것도 성 이사를 궁지로 모는 방법의 하나였다.
“간판인 소영하가 흔들리게 되면, 당장 주식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할 거야.”
연이은 소영하의 돌발행동은 나아가 성 이사의 관리 소홀 책임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아직 젊은 성 이사를 못 미더워하는 다른 대주주들과 노조를 설득하기 위해, 이쪽 역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골치 아픈 건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민재 씨는 모쪼록 홍옥자 사장 쪽만 잘 막아줘요.”
그런 말을 하면서 용식은 슬쩍 무혁의 눈치를 봤다.
결혼식 날 굳이 데려가 소개까지 한 이유도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상대는 재벌, 그것도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예민한 상대다.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잘못 새어나가면 사달이 날 테니, 이번 건만은 입 무거운 민재만큼 적임인 인재가 없다.
“민재 씨라면 잘할 겁니다.”
확신에 찬 무혁의 말에 누구 하나 토를 다는 사람이 없다.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와중에도 민재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나저나 막는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암만 용을 쓰면 뭘 해. 그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인간이 갑자기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그간 공들인 게 말짱 도루묵인데.”
티라노사우루스. 학명의 어원은 폭군 도마뱀.
무슨 우리에서 탈출한 코끼리도 아니고. 인간 재해 취급은 좀 너무하는 것 같은데.
진짜 고삐가 풀린 홍 사장을 마주하고 나서야 민재는 비로소 안 팀장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