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30화 (30/103)

30화. 뭐 어때. 우린 부부인데.

어릴 때야 결혼을 동경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환상을 포기한 후에야 진심으로 남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을 수 있게 됐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처럼.

저런 건 애초에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돈이야 내가 잘 버니까. 애초에 그 화상은 내 말이라면 꼼짝을 못 하는걸.”

문 변의 자랑 섞인 투덜거림도 진짜 행복한 사람이나 부릴 수 있는 여유다.

덤으로 쏟아지는 미성년자 시청 불가의 유부녀 토크를 흥미롭게 듣던 중, 갑자기 뒤에서 진무혁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어, 이게 누구야. 그 사이를 못 견디고 부인 찾으러 온 거야?”

“적당히 놀리십시오. 문 변호사님.”

놀이터에서 낯선 어른이라도 만난 것처럼 무혁은 민재의 손을 잡고서는 떡하니 앞을 막아섰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여자들끼리 하는 얘기에 끼어든 진 변이 더 나쁜 거 아냐?”

“이러실 시간에 지분분할 쪽 부탁드린 것부터 처리해주시죠.”

이쯤 되면 위험인물 취급도 수준급이라, 무혁은 문 변호사가 가버린 후에도 몇 번이나 민재의 안위를 파악했다.

“괜찮아?”

“왜 그래. 아무 일도 없었는데.”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도 아니고 과보호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무혁이 볼일을 보러 옆 사무실에 간 사이 민재는 오 대리의 어깨를 잡고 한숨을 쉬었다.

“아까 우리 하던 얘기 못 들었겠지?”

“왜? 우리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요즘 들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무혁을 볼 때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괜한 기대를 해봐야 어차피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얘기가 나오면 혼자 괜히 설레게 된다.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는 건 이제 지쳤다.

그럴 마음도 없는 사람을 두고 이런 얘기를 한 걸 알면 그도 분명 불쾌할 테니까.

모처럼 좋아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민재는 애써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황을 수습하기 바빴다.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 같은 건 없는데.’

이번 결혼은 어디까지나 진무혁의 호의에서 비롯된 거니까.

이런 감정을 품어 본들, 그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짐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이렇게 좋은 친구처럼, 예전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더 욕심내면 안 돼. 석민재.’

어설프게 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하면 분명 얄팍한 지금의 관계조차 깨져버릴까 두려웠다.

애써 입을 꾹 다문 채 민재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얌전히 제 책상으로 돌아갔다.

***

“이 정도면 되려나.”

일찍 집에 돌아온다는 조건을 붙이긴 했어도 무혁이 직접 다뤄야 할 내용은 제법 많았다.

홍 사장 쪽에서 넘겨준 자료를 검토하고, 밤늦게 은행이며 투자 회사에서 보고 받은 내용도 차례로 살펴봤다.

회신 메일을 쓰고 기지개를 켜니 벌써 열두 시가 훌쩍 넘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거실에 가 보니 민재는 오늘도 요리 방송을 보다가 그대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기특하네, 석민재.”

빈 맥주캔이 몇 개나 쌓여 있는 걸 보니 제법 고민이 많아 보이는데.

요리를 그토록 끔찍하게 싫어하던 석민재가 이렇게 열심히 매달려 줄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혁은 슬그머니 소파 손잡이에 걸터앉아 완전히 취기가 오른 민재의 뺨을 만졌다.

“예쁘다. 내 아내.”

깨어 있을 때는 차마 내보일 수 없는 진심도 지금은 마음 놓고 전할 수 있다.

보들보들한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이대로 밤도 샐 것 같다.

무혁은 배터리가 채 십 퍼센트도 남지 않아 죽어가는 폰을 주워들었다.

“보면 안 되겠지.”

민재의 비밀번호나 패턴을 푸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라지만 그동안은 섣불리 열어볼 생각은 없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걸 열었을 때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열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다.

지이잉.

열어볼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낯선 남자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민재야, 나야.]

프로필 사진을 보니 얼굴도 처음 보는 남자에 애를 안고 있는 걸 보니 유부남 같은데.

기존 대화 내역도 없는 상대는 너무나 친근한 말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김영식이 누구지?”

일부러 못 본 척하고 화면을 꺼버리려는 순간 곧장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야, 영하.]

전화번호는 이미 차단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연락이 안 닿으니 이제는 이런 식으로라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려는 모양이다.

이름을 보는 순간 약 열 가지 정도의 대처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접근 금지 명령을 걸자니 유명 연예인이 얽혔다고 말이 샐 것이고, 하는 짓을 보니 소속사도 소영하를 말리는 건 진작 포기한 것 같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긴 하지만.

저 거머리 같은 남자에게는 어느 쪽도 통할 거라고 확신할 수 없다.

상식이 먹히는 상대가 아니다 보니 무혁도 소영하를 상대로는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방법은 통하려나.’

문득 머릿속에 사악한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껏 태어나서 셀카 같은 건 단 한 번도 찍어본 적이 없지만 오늘 만은 예외다.

무혁은 친절하게 달린 전면부 카메라로 민재를 꼭 껴안은 채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면 완전히 속겠군.’

각도만 봐서는 키스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

결혼 생활을 증명하기 위한 스킨십 조항을 넣어둔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던 걸지도 모른다.

“으응…….”

오늘은 술이 들어간 탓인지, 왠일로 민재가 잠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몸이 기울어지지 않게 허리를 잡아주다 그만 사진의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실수. 정말 실수라고 하고 싶지만.

“응?”

[김영식 님이 나가셨습니다.]

상대의 반응이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끝낼 줄이야.

말로 아무리 얘기해도 귓등으로 듣는 척도 안 할 때는 언제고.

아무래도 머리가 나빠서 말귀는 못 알아들어도, 이렇게 제 눈으로 똑똑히 본 후에야 좀 현실감이 든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완전 범죄를 위해 대화창을 삭제하고 무혁은 민재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굳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소영하가 하는 짓을 보니 그동안 혼자서 어지간히도 속이 썩었을 것이다.

“그냥 말을 하지.”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우는소리라도 한 번 해주길 바라며 무혁은 민재의 폰에 충전케이블을 꽂았다.

잘 자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이만 나가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그의 옷자락을 꽉 거머쥐었다.

“음?”

“가지 마…….”

취한 채로 꿈을 꾸는 건지, 민재는 울상을 지은 채 몸을 웅크렸다.

그다지 즐거운 꿈이 아닌 모양인데, 이러면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네가 먼저 날 잡은 거야.”

조심조심 몸을 빼고서 곁에 누웠더니 민재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굴려 그의 품에 꼭 안겼다.

“아빠…….”

울먹이는 걸 보니 돌아가신 부모님의 꿈을 꾸는 것 같다.

분명 민재가 먼저 안겨 오긴 했는데. 이래서야 나쁜 짓일랑 차마 꿈도 꿀 수 없다.

“누가 네 아빠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마에 아주 살짝 꿀밤을 먹이고서 무혁은 울먹이는 민재를 꼭 안아줬다.

일부러 딱 맞춘 것처럼 제 두 팔 안에 몸을 기댄 채 새근새근 여린 숨결을 내쉬고 있다.

무슨 꿈을 저리도 서럽게 꾸는 걸까.

꿀밤을 먹였던 자리에 살짝 입을 맞추고서, 무혁은 잠든 민재의 얼굴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그시 바라만 봤다.

***

- 석민재 씨 되십니까?

모르는 번호의 낯선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광고겠거니 하고 끊으려던 순간, 전화 너머의 상대는 난데없이 민재에게 부모님의 부고를 알렸다.

- 아빠. 엄마.

차갑게 식어버린 부모님의 시신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민재는 주저앉아 홀로 눈물만 흘렸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민재를 친 자식처럼 진심으로 아껴줬다.

쉰 살이 넘어서도 장난기 많았던 아빠와 결혼 전부터 삼십 년 가까이 봉사활동을 이어온 정 많은 엄마.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두 분을 보며 민재는 제 결혼 생활 역시 그럴 것이라 믿었다.

-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 학교 선배라잖아요.

집 앞까지 데려다줬던 날, 하필이면 할머니와 맞닥뜨리는 바람에 가족들에게도 무혁의 존재를 들켜버렸다.

너무너무 잘생긴 청년이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바람에 아빠는 난감한 얼굴로 심통을 부렸다.

- 잘생긴 놈들은 언제나 얼굴값을 한다던데. 아빠만 봐도 그렇잖아.

- 주책! 이놈의 주책!

엄마의 스매시로 등짝을 두들겨 맞고 난 후에야 아빠는 민재를 꼭 안고서 몇 번이고 투덜거림을 이어나갔다.

- 제깟 놈이 아무리 잘생겼으면 뭘 해. 내 딸이 열 배, 스무 배, 아니 백만 배는 더 아깝지.

- 그거야 그렇긴 하지.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 다들 왜 그래요. 진짜!

엄마까지 저렇게 말할 줄이야.

팔불출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모님 앞에서 민망함이 폭발했다.

부모님의 성화에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야 아빠는 심각한 얼굴로 민재의 어깨를 다잡았다.

- 안 되겠다. 그러지 말고 내가 그 녀석을 한 번 직접 봐야겠어.

- 어디서 이런 실한 녀석을 주워온 걸까. 우리 딸 능력 좋네.

- 집에 한 번 데리고 와. 응? 아빠는 영 안심이 안 돼.

- 당신은 좀,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리 가 있어요!

며칠만 더 살아 계셨어도 부모님과 만날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유난스럽게만 느껴졌던 아빠의 호들갑이 이제는 오히려 그리워질 줄은 미처 몰랐다.

여자 혼자 부모님 없이 버티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 냉혹했고, 그때의 민재는 모든 걸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 어렸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민재는 정말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평생 품어왔던 꿈도 제게는 사치일 뿐.

마음과 의지만으로 버텨나갈 수 있을 만큼 현실은 절대로 만만치 않았다.

그 사실을 배우는 데 너무 큰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아빠가 계셨다면, 아니 엄마만 있었더라도 뻔뻔한 조원식의 면상에 소금 한 주먹을 뿌려주고도 남았다.

그랬더라면 무혁과 헤어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다정도 병이란 말처럼, 지나버린 시간을 돌이킬 때마다 때늦은 후회가 심장을 조여왔다.

“선배…….”

“그래. 민재야.”

이건 분명 꿈인데. 눈앞에 어른이 된 진무혁이 누워 있다.

현실에서는 아마 절대로 하지 못할 말도 어쩐지 꿈속에서라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배가 싫어서 헤어진 거 아니야.”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도, 그런 식으로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오래 후회할 줄 알았더라면 더더욱, 아니 이제는 두 번 다시 후회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보고 싶었어.”

“그랬어?”

“정말로 보고 싶었단 말이야.”

“아직도 날 좋아해?”

눈물을 훌쩍이며 민재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말하지 못한 채 삼켜왔던 이 마음을 어떻게든 털어놓고 싶어서.

이건 어차피 꿈이니까, 그는 평소 꿈에 나오던 모습처럼 환하게 웃으며 안아줄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쩐지 무혁의 미소가 평소와 달랐다.

“방금 그 말, 절대 무르기 없기야.”

장난기 섞인 조금은 사악한 미소.

저건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의 진무혁이 짓던 바로 그 표정인데.

맨손으로 눈물을 닦자 손목 어귀가 벌써 축축해졌다.

“어?”

그제야 뭔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여기는 분명 광활하기 그지없는 제 방이다.

그리고 진무혁은 드넓은 침대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서 느슨한 잠옷 차림으로 민재의 곁에 누워 있었다.

“밤새 놓아주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뜨거운 고백이라…….”

“선배, 아니 진무혁 씨. 그러니까 이건…….”

그러고 보니 어제 맥주를 잔뜩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났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곧장 두통이 밀려왔다.

숙취 때문인 것 같은데, 아직 술이 덜 깨서 그런지 뭐가 뭔지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지금 시간부터 확인하려고 버튼을 누르다 실수로 손이 미끄러져 사진첩을 눌렀다.

‘이게 뭐야!’

화면 안에 찍은 기억이 없는 사진의 섬네일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혹시나 진무혁이 볼까 봐 얼른 화면을 꺼버렸다.

“우리 민재가 날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결혼 계약서에 시한부 조항 같은 건 넣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그, 그만!!!”

저 얄미운 인간을 대체 어떻게 해치워야 할까.

분노를 담아 베개를 내던져 보지만 무혁은 재빨리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해냈다.

“뭐 어때. 우린 부부인데.”

“몰라. 난 몰라. 기억 안 난단 말이야!”

적어도 진무혁의 자신만만한 태도로 보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그동안 덮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덮치고도 남았을 테지만, 진무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민재에게 먼저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렇지, 먼저 덮친 것도 모자라 키스까지 해버렸을 줄이야.’

그러니 이건 분명 제 손으로 뭔가 저질렀다는 건데.

얄미운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 사실만큼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슬슬 출근 준비해야 하니까 이만 일어나는 게 좋을걸.”

“방금 한 말 취소. 아니 무효야. 이런 게 어딨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민재와 달리 무혁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어서 씻고 나와. 아침 먹게.”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민재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오늘 아침 서울의 하늘은 더없이 상쾌하고 청명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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