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민재 너한테서 달콤한 냄새가 나.
호텔을 나온 뒤 무혁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어때. 얘기는 잘 됐어?”
해맑은 홍 사장의 물음에 그는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전달했다.
“아무래도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한류스타라는 자리에 취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 같은 건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생방송에서의 돌발 행동에 당장 광고주들은 스캔들에 대한 대비부터 들어갔다.
한류 스타라는 대단하신 자리도 언제 위태로워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정작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소영하 본인만 몰랐다.
“그래서 어쩔 거야, 설마 그냥 봐줄 생각은 아니지?”
결혼을 깬 건 저쪽이었건만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피해자 행세를 하는 건 엄연한 룰 위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혁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 년이라고 했지.’
저 남자는 무혁이 갖지 못한 민재의 지난 이 년의 시간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보냈다.
숨넘어갈 듯 울던 민재의 반응만 봐도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내심 짐작할 수 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버릴 것처럼 울던 민재를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아파왔다.
법으로 정해둔 울타리 안에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배우자라는 수단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설령 민재에게는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계약이었을지 몰라도, 그는 이제 두 번 다시 민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혼자 불안해하고 있을 민재를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막히는 도로를 뚫고 엑셀을 밟아 아슬아슬하게 일곱 시 즈음에야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이 늦진 않았네.’
연락이 따로 없었던 걸 보면 무슨 일은 없는 것 같다.
혹시나 또 울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서, 무혁은 서둘러 현관문부터 열었다.
“으악!!”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혁은 서둘러 서류가방을 내던지고 곧장 안으로 달려들었다.
“민재야!”
그런데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코에 생크림까지 묻힌 채 민재는 울상을 짓고서 무혁을 원망하듯 올려다 봤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어?”
민재 손에 들린 식칼이 번뜩였다. 벌건 물이 든 칼날 아래에는 얼기설기 썰어놓은 딸기가 한 무더기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케이크를 직접 굽기엔 실력이 모자라니 스펀지케이크만 사와 장식하려고 한 모양인데.
얼핏 봐도 상태가 말이 아니다. 설탕이 덜 녹아 서걱거리는 생크림에, 딸기는 너무 잘게 잘라 한없이 뭉개졌다.
석민재는 옛날부터 요리에는 전혀 소질 같은 게 없었다.
라면도 잘 안 끓여 먹었으면서, 갑자기 주방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라면 분명 하나뿐이다.
“나 때문에 일부러 준비한 거야?”
“선배, 아니 무혁 씨는 이거 좋아하니까…….”
호기롭게 시작한 것 치고는 너무나 처참한 결과물에 차마 본인도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면목이 없는 건지 민재는 손을 뒤로 숨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조차 피해버렸다.
“먹어볼래.”
“아, 아직은 안 돼!”
예상대로 덜 녹은 설탕이 뭉쳐서 서걱거리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지만 지금의 무혁에게는 그 정도의 달콤함이 필요했다.
코에 묻은 생크림을 슬쩍 핥고서, 무혁은 짓궂게 민재를 꼭 품에 끌어안았다.
“민재 너한테서 달콤한 냄새가 나.”
“무, 무혁 씨.”
목덜미 언저리에 입술을 대자 민재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여전히 제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굳게 잠긴 줄만 알았던 문이 아주 조금씩 열리려는 모양이다.
“결혼하길 정말 잘한 것 같네. 이렇게 집에서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고.”
언제나 음흉한 꿍꿍이를 품고 있는 조원식의 집에서는 단 한 번도 마음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그 후로도 무혁은 줄곧 혼자였다.
민재의 앞에서라면 제 약점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
곱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민재의 뺨도 덩달아 붉어졌다.
“어제는 못난 꼴만 보여서 미안해.”
“어디가 못났단 건지 잘 모르겠는데.”
불편하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니,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만다.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석민재가 제 발로 주방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견스럽다.
장난스레 뺨을 꼬집은 후에야 민재도 슬슬 약이 오른 건지 눈을 흘겼다.
“이렇게 함부로 만져도 돼?”
“너 말고 다른 여자한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어.”
“거짓말.”
“진짜야.”
어디까지나 시한부를 걸고 있다 보니 민재는 좀처럼 믿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무혁을 밀어내고서 민재는 허겁지겁 망가진 주방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케이크는 어떻게 마무리하려고?”
“좋은 걸 샀거든.”
오 대리에게 배운 거라며 민재는 여러 도구를 펼쳐 보였다.
생크림을 넣고 짜기만 해도 꽃 모양이 나온다면서, 민재는 어설프게나마 케이크 위에 장식을 더했다.
“이게 러시안 깍지라고, 나도 잘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석민재가 날 위해 케이크를 만들어 주는 날이 다 오고, 진짜 결혼한 보람이 있는데?”
모양을 내느라 방심한 틈을 타 뒤에서 민재를 꼭 껴안았다.
“다음에 다시 만들어 줄게. 이건 도저히 사람이 먹을 만한 게 아니야.”
“배고픈데. 그냥 주면 안 돼?”
“저녁 아직 안 먹었어?”
일부러 약한 소리를 하자 민재의 눈에 염려가 서렸다.
조금 피곤한 것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아무래도 안 팀장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둔 모양이다.
굳이 제게 유리한 오해를 풀어줘야 할 이유는 없다.
무혁은 민재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있는 힘껏 우는 소리를 짜냈다.
“요새 피곤해서 그런가. 도통 입맛이 없었거든.”
“그럼 어떡해, 뭐라도 시킬까?”
제 손으로 요리를 하는 건 영 미덥지 못하니 민재는 앞치마를 벗어던질 기세였다.
그런 걸 바란 거라면 애초에 얘기도 꺼내지 않았을 것을.
무혁은 민재가 쥔 생크림 주머니를 함께 들고서 차분히 케이크를 완성해나갔다.
“마침 설탕이 잔뜩 들어간 게 먹고 싶었는데. 네가 일부러 날 위해 이런 걸 준비해줄 줄은 몰랐지.”
“하지만!”
“조금 달면 어때, 홍차도 있고 커피도 있으니까. 이거 먹고 나면 힘이 좀 날 것 같아.”
달콤한 칭찬에 민재는 쑥스러움을 애써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온종일 울상이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 표정이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이렇게 잘 웃는데.’
평소에 무표정하다고 오해를 받긴 해도, 민재도 웃으려면 얼마든지 잘 웃을 수 있는데.
어째서 그 남자는 민재를 울게만 만드는 걸까.
여전히 민재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그 남자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고만 싶었다.
“나도 처음 해본 거라서, 할머니한테 배운 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된 거야.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
“그렇다면 기대해야겠네.”
적어도 그 남자를 위해 이런 걸 만들진 않았던 모양이니까.
처음이란 말에 서운함이 한결 사라졌다.
함께 장식을 마치고 나니 그래도 외양만은 제법 볼만한 형태를 갖췄다.
무혁은 엉망으로 완성한 케이크를 잘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이게?”
시큼한 딸기도, 지독하게 단 생크림 범벅의 케이크도 민재의 손길이 닿았다고 생각하면 그저 달콤하다.
한 입 맛을 보자마자 오만상을 쓰는 민재의 반응이 귀여웠다. 무혁은 슬그머니 헤이즐넛 향기가 나는 원두커피를 내려왔다.
“커피랑 같이 먹으면 꽤 맛있어.”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결국, 민재의 몫까지 무혁이 모두 먹어치웠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남은 크림을 살짝 핥았다.
“또 해줘. 다음에는 치즈 케이크가 좋겠어.”
“뭐?”
요리가 취미다 보니, 필요한 도구라면 얼마든지 갖추고 있다.
무혁이 오븐을 가리키자 민재는 하늘이 무너지는 얼굴로 절망했다.
“저기 이태원에 가면 맛있는 케이크 집이 있다던데. 플라티나 호텔 베이커리도 괜찮고.”
“난 네가 만들어 주는 게 먹고 싶어.”
딱 잘라 단언하는 무혁의 앞에서 민재는 진심으로 절망했다.
***
방송에서 그 난리가 났을 때, 오 대리는 하필이면 감사가 걸려 한참 바빴다.
겨우 감사가 끝나고 한 주가 지나자 소영하 문제는 이미 잠잠해진 후였다.
“나 왔어.”
“어, 마침 잘 왔어.”
주말 동안에 뭘 한 건지, 민재는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얼굴로 회계팀에 들렸다.
지난번 그 일로 속이 많이 상한 건지 얼핏 봐도 마음고생이 심해 보였다.
그런데 정작 민재를 힘들게 만든 원인은 따로 있었다.
“있잖아, 혹시 요리 학원 아는 곳 있어?”
“갑자기 요리 학원은 왜?”
A&Z에 입사하고 벌써 7년이나 알고 지내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민재가 요리를 한다는 이야기는 생전 들어본 적이 없긴 했다.
“아무래도 결혼을 했으니까. 진 변호사가 살림도 막 시키고 그래?”
“살림? 말도 마.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걸.”
오 대리의 물음에 민재는 정색하고 고개를 저었다.
분명 계약서상에는 집안일은 반반씩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민재는 그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틈이 없었다.
빨래가 좀 모여 있다 싶으면 어느새 속옷까지 곱게 개어놓질 않나.
거실 장식장에는 먼지 한 톨 앉아 있는 꼴을 못 봤다.
“그러고 보니 칼퇴근한다는 조건으로 들어왔다고 했다더라고.”
“진짜 와이셔츠 각 세우는 거 보면 말이 안 나와.”
남자들이 살림 못 한다는 건 다 거짓말이라고, 그 말을 들은 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처음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
어쩔 줄 몰라 펑펑 우는 민재를 달래려 무혁은 제 살림 솜씨의 근원을 줄줄 읊어댔었다.
“청소며 빨래며 군대에서 다 배워왔으니까. 자기랑 결혼해주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준다고 아주 큰소리를 빵빵 쳤었지.”
“진 변이 그런 소리를 했어?”
지금의 진무혁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래도 대학 시절의 그를 떠올리면 제법 귀여운 맛도 있었다.
이십 대의 혈기 넘치던 때라 그런지 쉽게 흥분하는 데다 지금처럼 능글맞지도 않았다.
그 지독하게 달기만 한 케이크를 태연히 맛보며 제 앞에서 끼를 부리던 걸 생각하면 예전의 진무혁이 조금은 그립기도 했다.
“그 얘기는 좀 더 옛날에 들은 거야.”
“아, 학생 때부터 사귀었다면서.”
여전한 면도 있다지만 달라진 것도 있다.
헤어져 있는 동안 민재가 소영하를 만났던 것처럼, 그 역시 분명 민재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했을지도 모른다.
질투할 자격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 텐데. 마음은 어쩜 이리도 이기적인지, 빈말로라도 자신밖에 없었다는 말이 싫지 않다.
무혁이 어떻게 손을 쓴 건지 정말 기자 하나 보이지 않는 데다 요즘 들어서는 정말 진짜 부부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게 될 만큼 사이가 돈독해졌다.
“그래서, 요리는 앞으로 민재 씨가 하는 거야?”
“어디 그런 큰일 날 소릴. 내가 하면 둘 다 배탈 나서 출근도 못 할걸?”
조그마한 성의라도 보일까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생크림 케이크는 그야말로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도 차마 입에 대기 힘든 물건을 진무혁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이틀에 걸쳐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치웠다.
어지간히도 단 게 당겼으면 그랬을까 싶건만, 그 얘기를 들은 오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모든 것을 사랑의 힘이라 주장했다.
“과연 신혼이네. 사랑하는 아내가 손수 만들어 준 거니까 맛이 느껴졌겠어?”
“에이, 그런 건 아닐 거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한류 스타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 그 남자 꽉 잡길 잘했네.”
“잡긴 뭘 잡아. 어차피 우린…….”
실수로 말이 잘못 튀어 나가려는 걸 겨우 수습했다.
확실히 남 일이라고 생각하면 신혼 초의 즐거운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확실히, 요새 진 변이 신이 나긴 했지.”
갑자기 끼어든 문성희 변호사 때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예전 검찰 시절의 진무혁을 떠올리며 분노의 열변을 토해내기 바빴다.
“웬 초짜 검사를 꽂았다길래 솔직히 내가 방심한 건 인정해.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법정에서 그렇게 짓밟아?”
“그 정도로 심했어요?”
“내가 한마디를 하면 아주 열 마디로 반박을 쏟아내는데. 오죽했으면 판사가 내려와서는 날 위로해줄 정도였다니까!”
사람이 좀 철이 없어서 그렇지 문성희 변호사는 A&Z 내에서도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찔러 죽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던 인간이 요새는 아주 얼굴이 확 펴 가지고는. 대체 민재 씨가 뭘 해주길래 저렇게 된 거야?”
“문 변호사님도 참!”
자기들끼리 옆구리를 찌르는 오 대리와 문 변호사를 보며 민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고민이 뭔데, 신혼여행을 못 가서 그래?”
“가긴 어딜 가요. 안 그래도 요새 바쁘잖아요.”
“정 그러면 주말에 호캉스라도 가던가. 내가 대신 예약해줘?”
VIP 회원권이 있다는 문 변호사는 친절하게도 자기가 먼저 결혼 선물을 주겠다고 소매를 걷고 나섰다.
“호, 호텔이요?”
“결혼한 사이에 뭐 어때. 주말에라도 시댁에 애 맡기고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도 좀 살맛이 나지.”
뒤이어 쏟아지는 수위 높은 유부녀 토크에 민재의 얼굴도 덩달아 빨개졌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그런데 왜 하필 진무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부디 제발 그가 듣지 못했기를 진심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