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지금 석민재의 보호자는 접니다.
“그냥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자.”
제법 세게 당긴 탓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 그대로 무혁의 품에 안겼다.
등을 아예 꽉 안아버리는 바람에 문밖의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문 변이 또 보고 있는 거야?”
“응. 안 팀장이랑 둘이서 아예 대놓고 쳐다보고 있네.”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
민재는 얌전히 무혁의 무릎에 기대고서 조심스레 무혁의 어깨를 안아봤다.
제 두 팔로 감싸 안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지만.
그래도 정말 울고 싶을 때 누군가의 체온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혹시 나 때문에 일부러 A&Z에 온 거야?”
“안 팀장이 그런 얘길 했어?”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잖아.”
“나도 한 마디로 딱 잘라 대답할 수는 없지.”
예스나 노도 아니고, 애매하게 흘려버리는 걸 봐서는 별로 말 하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인데.
말로 먹고사는 변호사를 말싸움으로 이기는 건 정말 쉽지가 않다.
“하여튼 얄밉다니까, 정말.”
정말로 밉긴 하지만 그래도 민재는 제 탓에 주름진 셔츠를 펴주고 넥타이도 반듯하게 고쳐 매줬다.
그게 뭐가 그리 좋은지 무혁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괜히 민재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좀 늦을 거니까. 저녁은 적당히 알아서 챙겨 먹어.”
“이따가 오후 미팅 있다고 그랬지. 홍 사장님 보러 가는 거야?”
“아니, 오늘은 다른 쪽. 조만간 그쪽에도 상주하는 사람이 하나는 가 있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무리 거짓이라 해도 가족은 가족인 건지 사소한 일상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할머니가 입원해버려서, 그 뒤로는 줄곧 혼자였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상황이 참 낯설었다.
예전에는 평소처럼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 치미는 외로움이 싫었다.
그리고 소영하를 만났다. 연애를 시작하면 외롭지 않을 줄 알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거겠지만.’
결혼한다고 해서 외로움까지 사라지진 않지만 적어도 혼자 견뎌야 할 문제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
만약 혼자였다면,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었을까.
어쩌면 진무혁과 헤어졌을 때처럼 또다시 비겁하게 도망치는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그러기에는 장소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럼 이따 밤에 봐.”
“피곤하면 먼저 자. 많이 늦어질 지도 몰라.”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서 그런지 마음 한구석이 유난히 헛헛했다.
잠시 마우스를 딸깍거리다가 민재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저 민잰데요.”
늦게 돌아올 그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해두는 건 계약 위반이 아닐 테니까.
이건 그저 고마운 계약 파트너를 위한 소소한 정성일 뿐이다.
그 정도라면 분명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테니까.
민재는 할머니의 설명을 받아 적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그럼 들어가세요.”
소영하의 미친 생방송이 끝나고 매니저는 애꿎은 생수병만 찌그러트렸다.
차라리 화를 내고 욕을 했다면 좋을 테지만 방송국 스태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들을 돌려보냈다.
아마 이 방송에는, 아니 이 방송국에 다시 출입이나 할 수 있을까.
같은 소속사 다른 배우들이 피해를 보기라도 한다면 그 원망의 화살은 모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형, 왔어?”
할 말을 다 해 속이 후련한 건지 소영하는 언제 짜증을 부렸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그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차라리 패 죽일 수라도 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언제나 저밖에 모르는 소영하는, 이 상황을 제법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줄이나 알아?”
“민재랑 결혼한 남자,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사람이라면서?”
법조계에서도 제법 이름난 엘리트에 지금은 A&Z에 들어간 변호사라고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소영하 자신 역시 일개 구실이었을 뿐.
조원식인가 뭔가 하는 사람과 성 이사가 손을 잡은 데에는 회사 상속과 관련된 문제가 더욱 커 보였다.
“이대로는 억울하잖아. 난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전부 다 했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일쯤이면 민재네 회사 앞에 기자들이 가득할 텐데. 민재도 오늘 밤에는 계속 내 생각만 하고 있겠지.”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웃으면서 할 수는 없을 텐데.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한 여자에게 뭐가 그리도 미련이 남은 건지, 소영하는 민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석민재란 여자가 그렇게 좋아?”
“내 걸 다른 놈이 채 갔는데 그걸 얌전히 잘 쓰시라고 고사까지 지내줘야 할 이유는 없잖아. 하다못해 제대로 못 쓰게 망가트리기라도 해놔야 성이 풀리지.”
“미친 새끼.”
방송 내용이 알려진 탓인지 퇴근한 직원들에게서 미친 듯이 연락이 쏟아졌다.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건 전적으로 매니저인 자신의 몫이다.
소영하를 데려다주고 그는 곧장 회사로 돌아왔다.
어느새 밤 열두 시가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성 이사의 사무실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이사님.”
“사표 낸다는 말만 하지 마.”
“저 진짜 못 하겠습니다.”
성 이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매니저에게 시간과 장소가 적힌 메모 한 장을 내밀었다.
“내일 저쪽에서 잠깐 보자더군. 새 사람한테는 못 맡길 문제니 이것만이라도 마무리해줘.”
“누가 만나자고 한 겁니까?”
“석민재의 남편이라더군.”
굳이 회사까지 연락한 것을 보면 저쪽도 이제 끝장을 보고 싶은 모양인데. 성 이사는 곤란한 매니저 앞에 수표 몇 장을 더 내밀었다.
“이 정도면 되나.”
“이사님.”
“누나가 암 수술한 지 얼마 안 됐다면서. 애 영어유치원도 보내야 하고.”
이런 것 따위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금액을 앞에 두고 매니저는 심각한 갈등에 휩싸였다.
한 달 내로 다른 연예인에게 가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 그는 결국 성 이사가 내민 수표를 받아들었다.
“형, 그래서 어딜 가는 건데?”
“가 보면 알아.”
“대체 기사를 어떻게 막은 거야. 하여튼 HS 엔터 진짜 지긋지긋할 정도로 여론몰이 잘한다니까.”
회사에서 막은 덕분인지 아침에는 기사 한 줄 나간 흔적이 없다.
표면상으로 어제 일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여파는 제법 거셌다.
당장 아침 일찍 해당 방송국에서는 HS 엔터 소속 전 연예인에 대해 한 달간 방송 출연 금지를 통보해왔다.
갓 데뷔를 준비하던 신인의 서브 주인공 자리가 날아갔고 상당히 많은 소속 연예인의 스케줄이 꼬여버렸다.
매니저들의 분노가 폭발했지만, 누구 하나 소영하 앞에서는 불만 한마디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인기가 곧 권력이니까.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는 채 소영하는 선글라스를 끼고서 빌딩 숲을 바라봤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래.”
“누군데? 영화감독? 드라마 피디?”
“가 보면 알아.”
완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VIP 전용 식당 입구에서 매니저는 소영하를 혼자 들여보냈다.
“나오면 전화해.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대체 누군데 이래.”
“이사님 지시야. 들어가 봐.”
어제 사고를 꽤 크게 친 탓에 소영하도 더는 뻗대지 않고 군말 없이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며 걸었다.
일부러 슬쩍 선글라스를 벗으며 제 얼굴을 내보였지만, 직원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바라봤다.
“저기요, 나 몰라요?”
“고객님.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쳇, 재미없어.”
사인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해주려고 했는데 직원은 손톱만큼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연락이 올 법도 한데, 민재에게서는 여전히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회사로 직접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니까.
콧노래를 부르며 소영하는 준비된 방으로 안내받았다.
“당신은…….”
“오랜만입니다. 소영하 씨.”
저 남자는 분명 민재의 옆에 서 있던 바로 그 남자다.
적당히 챙겨 입은 자신과 달리 그는 각이 선 슈트에 변호사 배지를 달고 있다.
얼굴이 명함인 자신과 달리 상대는 반듯하게 인쇄된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법무법인 A&Z - 파트너 변호사 진무혁]
이게 바로 민재를 데려간 남자의 이름이었다.
“회사에다 일부러 연락한 걸 보니 어젯밤 일로 꽤 곤란하셨던 모양이네요?”
“곤란한 건 저희 쪽보다는 HS엔터 쪽이었을 겁니다.”
이것 봐라. 무심한 표정만은 정말로 석민재를 빼다 박은 것처럼 닮았다.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고서 남자는 뻔뻔스럽게 웃고 있는 소영하를 지그시 바라만 봤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겁니까?”
“민재와는 이 년 정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연기를 공부하며 사람 보는 눈썰미만은 확실히 익혔다고 자부한다.
그래서인지 저 남자의 속내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민재가 없이는 못 살 만큼, 서로 절절한 사랑이라도 하는 양 목소리에 애정이 깃들어 있다.
“그러는 그쪽은, 민재와 내 관계를 알면서도 일부러 끼어들었단 거군요.”
석민재는 분명 결혼이 급하다고 했었다.
무슨 이유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빨리 하고 싶다며 귀찮게 재촉한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결혼이 급해서 한 건 알겠지만, 민재는 애초에 당신 같은 건 관심도 없을 텐데?”
석민재는 처음부터 그랬었다.
아무리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여도 민재의 대답은 언제나 단답형이었다.
응. 그래. 나도. 무심한 대답이 이어질 때마다 소영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이 민재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이 여자는 제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때문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제 얘기에는 적당히 대답만 하던 민재도 할머니 얘기를 할 때면 제법 웃어주기도 했다.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매번 서운함이 앞섰다.
가끔은 그 할머니가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민재에게 남는 건 자신뿐이었을 텐데.
갑자기 튀어나온 이 남자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어제 일, 왜 그러셨습니까.”
일부러 성질을 긁어보려 해도 어설픈 도발이 먹히지 않는다. 무혁의 물음에 소영하는 괜히 콧방귀를 뀌며 코웃음 쳤다.
“말 그대로. 내가 상처받은 만큼 민재도 상처받았으면 해서 그런 건데?”
뻔뻔하기 짝이 없는 소영하의 말에도 무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앞으로 석민재와 관련해 그 어떤 접근도, 언급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이번 일은 넘어가겠습니다.”
“그냥 안 넘어가면, 당신이 뭘 어쩔 건데? 일개 변호사 주제에.”
나이도 기껏해야 제 또래에 파트너라는 호칭을 보니 인턴 정도가 아닐까 추측할 뿐.
이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게 기고만장한 건지 소영하는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있잖아. 주제 파악 똑바로 해. 나는 소영하야.”
이 나라에서 살면서 제 얼굴을 안 보며 살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저 멀리 산 속에서 살고 있는 자연인 정도.
아니, 작년에 산불 금지 포스터에도 재능기부를 했으니 이제는 그쪽에도 제 얼굴이 떡하니 박혀 있을 터였다.
“당신이 어떻게 민재를 홀린 건진 몰라도 그 애는 결국 내게 돌아올 수밖에 없어.”
만약 이 일로 저 남자와 헤어지게 된다면 이혼녀 딱지가 붙었으니 더더욱 제 말을 거역하지 못할 거다.
소영하는 무혁의 면전에서 민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내보이며 싱긋 웃었다.
“이게 인터넷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석민재가 이 나라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어디 한 번 해보십시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게 될지는 대 봐야 아는 걸 테니까요.”
“뭐?”
발끈한 소영하는 대놓고 전송 직전의 화면을 들이밀며 오기를 부렸다.
하지만 무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그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돼도 석민재가 무사할 것 같아?”
“지금 석민재의 보호자는 접니다. 그쪽이 걱정하실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이……!”
이 정도로 일을 벌이게 된다면 금방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정말로 전송 버튼을 누르게 된다면, 민재도 민재지만 소영하 자신도 적잖은 타격을 입게 된다.
재작년 연장했던 HS 엔터와의 계약서에는 분명 SNS 관련 조항도 명시되어 있다.
만약 이걸 정말 올리게 된다면 광고부터 시작해 뒷감당할 문제들이 더욱 커지게 된다.
“누가 더 많은 걸 잃게 될지는 대 봐야 아는 법이지만, 그걸 굳이 직접 경험하고 싶으신 모양이니 어쩔 수 없군요.”
무혁은 내밀었던 서류를 거둬 다시 가방에 넣었다.
굽히는 기색 하나 없는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소영하 쪽만 무안해지고 말았다.
“대체 석민재가 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결혼을 못 한다고 했다가 하루아침에 뒤통수를 맞은 자신은 그렇다 쳐도,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목을 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한심한 소영하를 마주 보며 무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앞으로 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끝까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소영하는 어떻게든 민재를 얽고 넘어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무혁은 결코 그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당분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번 일로 원한을 꽤 많이 사신 모양이니까요.”
“뭐?”
“이만 실례하죠.”
마지막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이상 더는 봐줘야 할 이유도 명분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하는 소영하를 앞에 두고서 무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