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27화 (27/103)

27화. 안 될 게 뭐 있어. 나는 네 남편인데.

조장미와는 어린 시절부터 오래된 악연이었다.

처음 조원식의 집에 갔을 때, 처음 한동안은 그래도 잘 지내보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 놀이터에 나갔던 날, 장미의 친구들은 무혁을 보고 물었다.

- 이 오빠가 장미네 집에 온 오빠야?

- 응. 이 오빠는 엄마 아빠가 없어서 우리 집에서 키우는 거야.

그 대답에 아이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자신을 마치 수조에 풀어놓은 관상어처럼 여기는 장미의 말에도 무혁은 끝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오빠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난 오빠가 무척 마음에 들거든.

눈치 빠른 어린아이는 금세 제 위치를 알아차렸다.

대학에 입학해 그 집을 나오기 전까지 장미는 온갖 핑계를 대며 무혁을 제 장난감처럼 대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비뚤어진 애정도 점점 커져만 갔다.

노골적으로 집착하는 장미를 볼 때마다 무혁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국에 왔으면서 연락도 없고. 나 정말 서운해지려고 그래.”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거야 당연히 아빠가 알려줬지. 요새 오빠랑 연락하기 힘들다고 얼마나 걱정하시는 줄 알아?”

지긋지긋한 부녀는 서로를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이럴 때만 장단이 잘 맞다.

전화를 피하고 만남이 불발되니, 이제는 제 딸을 앞세워 난리를 치는 속내가 보였다.

“오랜만인데 너무 쌀쌀맞아. 이 년 동안 연락도 한 번 안 해놓고서.”

살살 눈웃음을 치며 장미는 은근슬쩍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이름은 장미인데, 외모도 하는 짓도 백합을 닮았다.

새하얀 꽃잎을 드리우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도 그 향기에는 사람 목숨도 빼앗을 수 있을 만큼 강한 독이 있다.

그래서인지, 멀쩡한 말도 장미의 귀에만 들어가면 엉뚱하게 포장되기 일쑤다.

유난히 고지식했다던 아버지와 달리 약아빠진 술수나 쓰게 되는 것도 어쩌면 이 부녀와 한집에 살며 익힌 걸지도 모른다.

무혁은 차갑게 장미의 손을 내쳤다.

“와달라고 한 적 없어.”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약혼녀인데, 고작 집에 찾아온 정도로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장미가 성인이 될 즈음, 조 대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결혼 얘기를 꺼냈다.

단 한 번도 동의한 적 없는 약혼 이야기 역시 조 대표와 장미의 입을 거쳐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있었다.

처음 데려올 때부터 데릴사윗감으로 여겼던 거라고, 남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사실을 무혁 자신만 몰랐다.

“난 너랑 약혼 같은 거 한 적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눈빛 좀 봐, 그러다 한 대 치겠다?”

일부러 쳐보라는 듯 얼굴을 들이미는 태도가 참 교활하다.

언짢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장미는 생글생글 웃으며 얄밉게 도발했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널 왜 때리겠어.”

누가 변호사 딸이 아니랄까 봐.

말장난에 도가 튼 조장미 앞에서는 말 한마디라도 허투루 여지를 줬다가는 어떻게 물릴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코웃음을 치며 장미는 문 틈새로 보이는 현관을 힐끗 바라봤다.

곱게 놓인 민재의 구두를 확인하고 그녀는 두 팔을 뻗어 무혁에게 애교를 부렸다.

“손이 아파서 그래. 안에서 치료해주면 안 돼?”

얌전하고 청초하게 생긴 외모만 보고 분명 다들 손쉽게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거짓 눈물 정도는 채 십 초도 되지 않아 흘릴 수 있는 위인이다.

“어설프게 수작 부리지 말고 돌아가.”

“오빤 정말 나쁜 사람이야.”

끝까지 악담만 늘어놓는 장미를 내버려 두고 무혁은 있는 힘껏 현관문을 닫았다.

거미줄에 얽힌 것처럼 저들과의 인연은 아무리 끊어내 보려 해봐도 쉬이 끊어지지도 않는다.

“지긋지긋해.”

인터폰으로 장미가 돌아간 걸 확인하고 무혁은 살며시 민재의 방에 노크했다.

똑똑, 소리를 내보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슴푸레한 스탠드 불빛 아래 민재는 벌써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한쪽 벽에 곱게 걸어둔 드레스와 보석함까지, 하나같이 제 것이 아니라는 듯 단정하게 정리해둔 게 마음이 쓰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무혁은 잠든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왜 널 좋아하는 건지, 아직도 기억을 못 하는 구나.”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 제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무혁의 인생에 다시는 잊지 못할 기억의 한 자락도 민재에게는 평범한 일상에 불과했을 터.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서운하기도 했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애를 썼지만 보면 볼수록 욕심이 생겼다.

쓰린 속을 삼키며 무혁은 눈물로 젖은 민재의 눈가를 살며시 닦아줬다.

“나를 믿어.”

결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방을 나와 무혁은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아무리 끔찍한 밤도 결국 지나고 아침이 찾아오는 법이다.

평소처럼 알람 소리에 깨어난 민재는 거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꼴이 이게 뭐야.”

너무 울어서 아침부터 눈이 퉁퉁 부었다.

방을 나서니 어느새 주방에서는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났다.

“일어났어?”

“아, 응.”

어느새 예전 습관처럼 저도 모르게 말을 놓아버렸다.

이걸 어찌하나 난감한 민재와 달리 무혁은 오로지 프라이팬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달걀 프라이만 보고 있었다.

“아침 먹어야지.”

무혁은 능숙하게 달걀을 접시에 담아 민재 앞에 놓아줬다.

입맛이 없어서 아침은 거를 생각이었는데, 막상 앞에 차려진 화려한 아침상을 보니 위장에서 절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운 토스트 위에는 버터를 녹이고 블루베리 잼을 곁들였다.

거기에 예쁘게 구운 달걀 프라이를 곁들이니 여느 호텔 조식이 부럽지 않았다.

“이것부터 마셔.”

눈에 아이스팩을 얹은 채 무혁은 과일과 야채를 갈아 만든 녹즙부터 내밀었다.

별로 좋아하는 맛이 아니라 인상을 찌푸렸지만, 안 먹을 수는 없어서 결국 눈을 감은 채 억지로 모두 마셔야만 했다.

“맛없어.”

“내일은 사과 더 많이 넣을 테니까 오늘은 참아. 아침도 양 적게 했으니까, 그건 다 먹어야 해.”

진무혁의 잔소리마저도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대체 또 무슨 난리가 났을지 겁이 나서 민재는 아예 폰은 확인도 하지 못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됐어, 이따가 세척기에서 나오면 꺼내놓기만 하면 돼.”

늦기 전에 준비나 하라며 무혁은 민재를 다시 방 안에 밀어 넣었다.

아침에는 시간이 어찌 이리 빨리 지나가는 건지, 립스틱을 바르고 나오자 무혁은 벌써 서류가방을 들고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기사, 뭐라고 난 거야?”

어젯밤에 그 난리가 났으니 지금쯤 난리가 났을 텐데, 무혁은 태연히 아무것도 없다며 폰을 보여줬다.

“정말?”

“어차피 별일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 이렇게 쉽게 해결될 리 없다.

출근하는 와중에도 민재는 혹시나 숨어 있을 기자가 있나 싶어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해?”

“아냐. 아무것도.”

실컷 울고 나서 그런지 마음의 벽도 조금은 허물어졌다.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무혁은 기꺼이 민재에게 손을 빌려줬다.

“정 불안하면 잡고 있던가.”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 있어. 나는 네 남편인데.”

틀린 말은 아닌데. 너무나 스스럼없는 태도에 또 헷갈리게 된다.

고작 일 년, 그것도 서로의 필요 때문에 함께 살기로 했던 주제에.

그 사실조차 가끔은 깜빡하게 할 만큼 이 남자는 지나칠 정도로 상냥하다.

“앞 잘 보고 걸어.”

“하여튼 잔소리하고는.”

만약 기자가 사진을 찍게 되더라도 남편인 무혁과 손을 잡은 사진을 내보내진 못할 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민재는 아예 무혁의 팔에 팔짱까지 꼈다.

아침부터 티격태격하면서도 딱 붙어서 출근하는 모습에 회사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두 분 사이 너무 좋으신 거 아니에요?”

“신혼이니까요.”

적당히 변명을 둘러대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정말로 생방송은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건지 누구 하나 민재 쪽을 수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다.

“어제 소영하 그거 뭐래?”

“새 영화 홍보라던데? 바이럴을 할 거면 좀 제대로 하던가, 생방송에서 그러는 게 어딨어.”

제대로 된 공식 입장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소영하의 차기작이 공개됐다.

덕분에 어제의 일은 모두 회사 쪽에서 다음 작품 홍보를 위해 한 일이라며 적당히 포장됐다.

아마 회사 쪽에서도 소영하의 일을 곧이곧대로 내보낼 수는 없었을 거였다.

‘고생하느라 진땀 좀 뺐겠지.’

애초에 스캔들이 나면 일반인인 민재보다는 회사와 소영하가 입게 될 피해가 훨씬 큰데.

아무래도 이번 일은 소영하의 자살골로 전락해버릴 가능성이 훨씬 더 커 보였다.

“내가 별일 없을 거라고 했지?”

엘리베이터에서 무혁은 민재만 들을 수 있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은 우쭐해 보이는 그의 미소를 보니 번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밤에 그건 뭐였어?”

“아, 술에 취한 아저씨 한 분이 집을 잘못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시더라고.”

“그랬어?”

설령 진짜 기자였다고 해도 무혁은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안고서 민재는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자네 지금 고작 그런 이유로 그만두겠다는 거야?”

막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안 팀장의 호통이 복도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팀장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시지?”

보통 8시 30분 전후로 출근하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안 팀장은 언제나 9시 정각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나오곤 했다.

그마저도 외근이 있는 날이면 아예 출근도 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그런 사람이 평소보다 훨씬 일찍 나온 게 아무래도 이상해 보였다.

“들어가 봐.”

무혁이 제 사무실로 들어가고, 민재는 가방만 자리에 던져두고서 조심스레 안 팀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팀장님?”

대체 누가 아침부터 안 팀장의 속을 긁어놓은 건가 했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박해를 당하고 있던 사람은 분명 주니어 이년 차 박해영 변호사였다.

“무슨 일로 그러세요?”

“난 모르겠다. 네 입으로 직접 얘기해.”

대체 무슨 실수를 했길래 이렇게 사람을 박살을 내놓은 건지.

주니어들이 실수를 저지를 경우, 언제나 민재가 먼저 넌지시 언질을 주고 난 후에야 안 팀장이 혼을 내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안 팀장조차도 질렸단 얼굴로 박 변호사에게 대놓고 핀잔을 줬다.

“저는…….”

무안해진 탓인지 박 변호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라 말을 꺼내려 입술을 달싹이다 그는 결국 민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하여튼, 이래서 요즘 주니어들은 못 써먹겠다니까…….”

“대체 무슨 일이신데요?”

안 팀장이 성질이 좀 괴팍하긴 해도 이유 없이 화를 낼 사람은 아니다.

사정을 묻는 민재를 앞에 두고 안 팀장은 무혁의 사무실 쪽을 힐끔 쳐다봤다.

“무슨 일이긴, 잘나신 네 남편 때문이지.”

“네?”

일찌감치 소년 등과 한 후 검찰을 거쳐 유학까지 다녀온 진무혁과 달리 박 변호사는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겨우 주니어 이년 차 신분이라.

박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무혁의 동년배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무혁의 파트너 계약 자체를 두고 불만이 속출했다.

“그렇게 불만이면, 자기들도 그만큼 수임료가 되는 사건을 물어오던가!”

혜성의 상속 전쟁이 시작되며 HS엔터를 비롯해 상당히 많은 거래처가 조조 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진무혁이 발을 들이면서, 덩달아 수정 일보 산하 여러 기업의 소송이 자연스레 A&Z 쪽 담당으로 넘어오게 됐다.

특히나 미디어를 쥐고 있다 보니 로펌 내에서도 저작권 팀을 비롯한 미디어 관련 부서들은 단순 형사 사건부터 미디어 관련 MOU 계약까지 연일 과업에 시달리게 됐다.

한마디로 일복이 주렁주렁 매달려 엄청난 매출을 이루었으니, 안 팀장의 눈에 진무혁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셈이다.

“제 주제도 파악 못 하는 놈은 필요 없어.”

사람 욕심이 많은 안 팀장이지만 그는 내실 없는 사람을 정으로 붙잡고 있을 만큼 녹록한 이 또한 아니었다.

안 팀장 자체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 밑에서 칠 년이나 버티고 있으니 회사 안에서도 섣불리 민재를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차 한 잔 타다 드릴까요?”

분위기도 환기할 겸 차를 내려오는데 아직도 화가 덜 풀린 안 팀장은 서류를 보며 혼자 구시렁거렸다.

“하여튼 무혁이 저놈도, 굳이 이 고생을 왜 사서 하려는…….”

“네?”

“아, 아니야. 아무것도.”

서둘러 상황을 모면하려는 건지 안 팀장은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앗, 뜨거워!!”

“괜찮으세요?”

“나 화장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안 팀장은 거짓말에 서툴렀다.

그런 사람이 부랴부랴 말을 돌리고 도망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건 민재 앞에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였나 보다.

박 변호사가 써 온 내용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쏟아진 찻물을 닦고, 민재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무혁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웬일로 안경까지 쓰고서 무혁은 빼곡하게 적힌 서류들을 차곡차곡 정리해나갔다.

안 팀장의 이야기를 듣고 난 탓이었을까.

오늘따라 무혁의 모습이 유독 피곤해 보였다.

“커피라도 좀 마시면서 해.”

“……잘 마실게.”

그제야 만년필을 내려놓고 무혁은 커피잔을 받아 들었다.

많이 바쁜 탓인지 넥타이가 벌써 흐트러져 있다.

“아까 그거, 들었어?”

“검찰에 있을 때부터 이미 익숙한 일이야. 딱히 놀라울 것도 없어.”

조금은 마음이 상할 법도 하건만 무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은 채 민재를 올려다봤다.

“정말 괜찮아?”

“안 괜찮으니까 이리 와.”

커피잔을 내려놓고서 무혁은 장난 섞인 미소로 민재의 손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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