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왜 민재만 안 된다는 건데?
옷차림이 눈에 띄어서 그런지 조원식은 제일 먼저 홍 사장을 만나러 왔다.
평소처럼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홍 사장 곁에 선 민재를 발견하고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조 대표님 아니세요.”
“오랜만입니다, 홍 사장님.”
악수를 나누면서도 조 대표는 민재 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고서 그는 얘기가 끝나자마자 무혁의 팔을 잡았다.
“잠시 얘기 좀 하자꾸나.”
“어머, 갓 결혼한 새 신랑을 어디로 데려가시려고요?”
무슨 얘기를 할지 뻔히 알면서.
홍 사장의 뻔뻔스러움은 저 정도면 속 뒤집어 놓기 대회 월드 챔피언급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놓은 것도, 일부러 약을 올리려고 단단히 각오한 덕분이었나보다.
홍 사장은 보란 듯이 민재를 조 대표 앞에 들이밀었다.
“안녕하세요. 조원식 대표님.”
등 뒤에 든든한 지원군도 있겠다 민재도 겁먹지 않고 당당히 그의 앞에 섰다.
그동안 무혁에게 빚진 것도 몇 개 있으니 이런 형태로라도 갚아줄 때가 온 걸지도 모른다.
‘내가 우습게 보였겠지.’
민재라고 국내 최대라 불리는 A&Z에서 그저 버틸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배경은 없다 해도, 속 모를 얼굴로 사람 약 올리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며 비꼬는 소리를 들을 만큼 포커페이스 하나에는 자신이 있었다.
“오늘 우리 민재가 참 예쁘죠? 싹싹하지, 능력 있지, 이러니 진 변호사가 푹 빠진 거겠죠.”
무혁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친근한 말투로 홍 사장은 아예 대놓고 민재를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막말에 조롱을 일삼을 조 대표도 자기보다 더한 권력자 앞에서는 이토록 초라해진다.
‘고작 저런 사람일 뿐인데.’
어릴 때는 저 사람의 말 한마디가 왜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무혁이 소영하에게서 자신을 지켜줬으니. 이제는 민재가 조원식으로부터 무혁을 지켜줄 차례다.
일부러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서 민재는 살그머니 무혁의 어깨에 머리까지 기댔다.
“저희 결혼식, 와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어요.”
“일이 바빠 못 오신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응. 아쉬웠어.”
무혁이 그랬던 것처럼, 민재는 나른한 미소를 머금고 무혁을 올려다 봤다.
살짝 눈웃음까지 치자 그의 입가에도 어느새 웃음이 번졌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정말로 사랑하는 것처럼.
적어도 저 사람 앞에서는 그런 사이여야 하니까.
“이만 실례하지요.”
협공이 제대로 통한 덕분인지 조원식도 더는 억지를 쓰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A&Z에 들어오고 안 팀장이 처음 해준 말이 떠올랐다.
판결은 판사가 내리는 거니까, 재판은 붙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다.
‘정말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 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대단한 조원식도 결국은 자기보다 더한 권력자 앞에서는 초라하게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화도 한마디 못 내고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봐서 그런 걸까.
십 년 묵은 체증이 단번에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제주도에서 도망친 일로 소영하는 며칠 째 회사 직원들 손에 감금당했다.
사흘이나 지나고 나서야 영화 관련 인터뷰 스케줄을 조건으로 겨우 풀려났다.
“적당히 해.”
“형이야말로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무슨 노예야? 배우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법이 어딨어!”
그 자리에 올려준 건 회사건만 예나 지금이나 주제를 모르는 건 한결같은 점이 소영하의 매력이다.
씩씩대는 눈에 눈물까지 고인 걸 보니 제법 그 여자를 많이 좋아한 모양이지만 성준범은 도저히 석민재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다른 여자를 만나. 배우든, 아이돌이든. 업계에 여자가 널렸는데 왜 하필이면 일반인을 건드려.”
“대체 왜 민재만 안 된다는 건데?”
오늘따라 유난히 반항적인 소영하의 태도에 성준범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처음 여자를 만난다고 했을 때 잡았어야 했는데, 조용한 일반인이라기에 내버려뒀다.
“그 얼굴이 문제야.”
“뭐?”
석민재의 사진을 받아 본 날은 꼬박 밤을 지새울 만큼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사진 속 여자는 처음 혜성가에 입성했던 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 여자’의 모습과 착각할 만큼 닮아 있었다.
혜성 가의 친척이라고 해도 준범의 부모는 지지리도 가난한 속물이었다.
집안에서도 내놓을 만큼 대책이 없는 인간들이라 집안 어른들, 특히 성 회장은 그런 부모 밑에서도 야무진 준범을 기특하게 여겼다.
- 내가 일찍 결혼했으면 너만 한 자식이 있었을 텐데. 우리 애는 언제 이만큼 자라줄지, 원.
늦게 결혼한 성 회장의 아기는 궁핍한 제 부모와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다이아몬드 수저를 쥐고 태어났다.
세상은 어째서 이리도 불공평한 걸까.
‘차라리 그 아이가 사라지면 좋을 텐데.’
신이 준범의 소원이 들어준 건지 아기는 정말로 사라져버렸다.
더이상 임신이 힘들다는 말에 집안에서는 후계 문제로 성 회장을 재촉하고 나섰다.
- 이혼할 생각이 없으면 양자라도 들여!
평생 정신 줄을 놓고 살 것 같던 준범의 부모도 이게 한몫 잡을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준범 역시도,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자마자 슬쩍 부모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 저, 그 집에 가고 싶어요.
순조롭게 입양이 결정되고, 준범은 그토록 눈부셨던 저택에 드디어 다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모든 게 제 세상이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도련님. 이층 복도 끝방은 절대로 들어가지 마세요.
행방불명된 아기의 방이었다는 건 어린 준범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방이니까.
원래 있던 알을 밀어내고 드디어 준범은 안락한 둥지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 네가 준범이로구나. 잘 부탁해.
소중한 아기를 잃은 후 홍 여사는 쓸쓸한 눈을 하고서 담담히 남편의 결정을 존중했다.
드디어 이 집안의 일원이 되었다고 확신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 오늘도 두 분 다 바쁘실 테니 먼저 식사하세요.
성 회장은 바쁘다는 핑계로 준범과 관련된 일은 모두 아내에게 떠넘겼다.
몸이 약한 홍 여사 대신 준범에게는 따로 시중드는 사람 몇몇이 붙었다.
어린 눈치에도 이 집에서 살아남기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지는 훤히 보였다.
데려오는 건 성 회장의 뜻대로 됐어도 이 집 안에서 잘 지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홍 여사의 눈에 들어야만 했다.
- 어머니를 뵈러 왔어.
- 도련님, 사모님은 지금 편찮으십니다.
억지를 부려보다 혼이 나긴 했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 혜성 가의 저택은 그럭저럭 평화로웠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모든 일이 그렇게까지 뒤틀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집에 온 지 육 개월쯤 지났을 때였을까, 학교에 다녀오자 어쩐지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 무슨 일이 있어?
- 사모님께서 따로 준비하시는 게 있어서 그래요.
다들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아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말리는 손길을 뿌리치고 이 층으로 올라가자 평소 굳게 닫혀 있던 복도 끝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 이게 다 뭐야.
서둘러 달려가 보니 벽에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적힌 리본과 함께 산더미처럼 많은 선물 상자가 놓여 있다.
- 도련님, 이러시면 안 돼요. 어서 나오세요.
- 비켜, 이거 놔!
포장만 봐도 이게 누굴 위한 건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부자들의 머릿속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쯤이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아이를 위해서 어떻게 이런 큰돈을 퍼부을 수 있는 건지.
가지고 놀지도 못 할 장난감과 옷, 그리고 곁에 적힌 카드를 보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 엄마가 찾으면 꼭 데리러 갈 테니까. 부디 무사히 잘 지내고 있어 줘. ]
지금 이 집의 자식은 사라진 그 애가 아니라 자신이건만.
이미 깨져서 숨이 끊어졌어야 할 새끼 새의 흔적이 제 영역을 침범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
- 이딴 걸 왜……!
분노에 차서는 종이 상자를 바닥으로 집어 던지고 리본을 뜯어냈다.
그 순간 뒤에서 홍 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뭐 하는 거야?
- 사모님! 죄송합니다. 어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것처럼, 그녀는 망연자실한 채 엉망이 된 선물을 주워 담았다.
울먹이는 그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준범은 홍 여사의 손에 든 장난감을 빼앗아 들었다.
- 어차피 그 애는 죽었는데, 이딴 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찰싹하며 뺨이 뜨끈해졌다.
홍 여사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가사도우미들이 부랴부랴 준범을 억지로 데리고 나갔다.
방에서 멀어질 때마다 홍 여사의 흐느끼는 소리도 점점 멀어져갔다.
벌써 아이가 없어진 지 반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저렇게까지 난리를 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도 몸이 약한 홍 여사는 결국 그 일 이후로 입원했다.
파국에 치달은 두 사람을 보며 성 회장은 준범 대신 아내를 택했다.
- 어린 마음에 모르고 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 죄송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절대 모르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애의 저주였던 건지 그날 이후로 준범은 일주일에 두 어 번 정도 악몽을 꾸곤 했다.
호적에 부모 자식이란 이름을 달고 있어도 사실상 남보다 더 못한 관계로 삼십 년을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준범은 이 나이가 된 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양어머니가 어렵기만 했다.
하필이면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 건지, 소영하가 연인이라고 데려온 석민재는 그런 홍 여사를 빼다 박았다.
특히나 처연해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손에 든 사진을 떨어트릴 만큼 소름이 절로 돋았다.
“그 여자만은 안 돼.”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죽은 그 애가 살아 돌아와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같아서 석민재의 사진을 받은 날은 아주 오랜만에 악몽까지 꿨다.
‘여기는 내 자리야.’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한발 먼저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원래 둥지에 있던 알을 밀어 떨어트려서라도, 둥지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성 회장의 ‘자식’은 자신뿐이다.
진짜 알은 둥지에서 떨어져 깨진 지 오래이니, 이제 이 혜성 가는 응당 제 손에 떨어져야만 했다.
“방송 시간 늦겠다, 어서 데려가.”
“형!”
소영하가 나가고 지긋지긋한 편두통이 몰려왔다.
이러는 걸 보니 오늘 밤도 무사히 잠이 들기는 글렀다.
분명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또다시 악몽을 꾸게 될 테니까.
성준범은 한숨을 쉬며 쓰디쓴 커피에 손을 뻗었다.
***
“결혼 축하하네. 진 변호사.”
“감사합니다.”
이름도 다 기억 못 할 수많은 사람과 악수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간 건지 알 수 없다.
바쁜 와중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늘 준비된 음식들이 어지간한 맛집 뺨을 칠 만큼 맛있었던 덕분이다.
야무지게 전 메뉴를 섭렵하는 모습을 본 홍 사장은 기분이 좋았는지 유독 민재 앞에서는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당연하지. 케이터링 업체도 제일 좋은 곳으로 선정한 거니까, 많이 먹어.”
처음에는 정말로 미친 사람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유난히 눈에 띄고 호탕해서 그렇지 아주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오늘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예쁜 옷도 입어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겸사겸사 조원식이 깨지는 모습도 봤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깍듯이 인사하는 민재를 앞에 두고 홍 사장은 옆에 선 무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 좋은 자리 다 마다하고 왜 굳이 한국에 돌아왔나 했더니, 이 귀염둥이 때문이었구나.”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무혁의 미국 생활이 풀리려나 싶었는데 무혁이 눈을 흘기자 홍 사장은 바로 입을 닫았다.
“얜 뭔 말을 못 해. 잘해주라는 얘기야. 혹시 울리기라도 하면 그땐 내가 데려가버릴 거니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둘 다 농담이 농담으로 안 들리는 사람이라서, 무혁은 노골적으로 인상까지 쓰며 고개를 저었다.
좋은 자리를 얘기하는 걸 보면 미국에서 분명 뭔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무혁은 그 때 일은 좀처럼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다.
“발 아파.”
무혁의 차에 타자마자 높은 하이힐부터 벗어 던졌다.
홍 사장의 비서에게 전달 받은 쇼핑백은 뒷좌석 쪽에 던져놓고, 민재는 욱신대는 발부터 주물렀다.
“이건 언제 돌려주면 돼요?”
“그건 인센티브니까 받아둬.”
“인센티브라고요?”
드레스도 드레스거니와 귀에서 달랑거리는 귀걸이나 목걸이가 더 마음에 걸렸다.
아까 연회장에서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으로 봐서는 어지간히 비싼 게 아닌 모양인데, 이런 걸 그냥 준다니 부자들의 머릿속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이렇게 비싼 건 못 받아요.”
“그럼 가지고 있어. 기회를 봐서 내가 돌려줄 테니까.”
보석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민재는 겁에 질린 채 떨리는 손으로 겨우 귀걸이를 빼냈다.
상자도 그렇고, 오늘 드레스 건도 그렇고. 이상할 정도로 잘해주는 홍 사장의 태도가 심히 수상하다.
“목걸이 풀어줘?”
“아, 응.”
혼자서 풀어보려고 했지만 잠금이 까다로워서 혼자 벗기기가 쉽지 않다.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자 매끈한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개 숙여.”
무혁의 손이 스치는 곳에 전율이 돋았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풀리고 무혁의 손이 민재의 어깨에 살며시 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