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선전포고는 홈그라운드에서
일주일의 절반이 끝나고 금방 수요일이 찾아왔다. 외근이 잡힌 무혁이 따로 합류하기로 하고, 민재는 홀로 사무실에 남았다.
[그쪽에서 따로 사람을 보낼 거야.]
드레스까지 입어야 하는 중요한 파티라는데, 약속한 네 시가 되니 정말로 수정 일보 쪽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석민재 씨 계십니까.”
“네, 전데요.”
“밑에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가시죠.”
처음에는 옷만 건네주고 가려나 싶었는데 회사 앞에 선 리무진을 본 순간 숨이 막혔다.
“안녕.”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 오후 네 시, 일과가 끝나기 전이니 회사 앞 길에도 당연히 사람들이 수없이 돌아다니고 있건만.
새빨간 무도회용 드레스를 입은 화려한 홍 사장을 본 순간 민재는 진심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일단 타.”
대체 어디로 끌려가려는 건지. 민재는 애꿎은 가방만 꼭 껴안은 채 엉겁결에 태어나 처음으로 리무진에 올랐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어쩐지 사자 앞에 선 임팔라가 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무혁이한테 들었는데, 일이 바빠서 신혼여행도 못 갔다면서?”
“네, 뭐. 어쩔 수 없죠.”
어차피 둘이 가 봐야 어색하기만 했을 거라 딱히 아쉽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굳이 내색할 필요는 없다.
다만 넓디넓은 차 안에 무서운 홍 사장과 나누는 대화는 참으로 어색하기만 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민재는 정자세로 앉아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얼어붙은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루비 홍 여사께서는 그제야 문제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내가 그렇게 무서워?”
민재는 네,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어쩌면 숨 쉬는 것도 허락받아야 할 것처럼 무거운 공기만이 맴돌았다.
그게 불편했던 건지 홍 사장은 잠시도 쉬지 않고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변호사도 아닌데 졸업하자마자 A&Z에 입사라니. 대단하네?”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부모님이 기뻐하셨겠네.”
별 의미 없는 말이라는 건 이제는 알고 있으니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와도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굳이 숨겨야 할 이유는 없는 내용이니 민재는 평소 하던 대로 담담히 제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할머니가 계시니 괜찮아요.”
어차피 알 사람은 다들 아는 이야기라서 민재는 이걸 굳이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들이 겪을 일을 먼저 겪은 거니까, 이런 사실을 가지고 뒷담을 하며 약점 취급 하는 사람도 있지만 민재는 그런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이젠 결혼도 했으니까, 저희 할머니가 무척 대견해 하셨어요.”
민재에게 결혼은 일종의 숙제 같은 존재였다.
굳이 민재 뿐만이 아니더라도 보수적인 이 업계에서는 미혼은 유독 덜 자란 사람 취급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곤 했다.
진무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생 조원식의 그늘 아래의 존재로만 여겨지던 그도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고 난 뒤로 이제는 어엿한 한 사람의 변호사로 인정받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내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모든 문제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결국 민재 본인만 상처입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래서, 결혼 하니까 좋아?”
어느새 금방 또 화제가 바뀌었다. 사람들이 타인에게 갖는 관심의 무게는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
이제는 거짓말도 제법 능숙할 수 있게 된 걸 보면 정말로 예전보단 무뎌진 걸지도 모른다.
“좋고 말고 할 게 있을까요.”
어차피 이마저도 지나가게 될 텐데, 사소한 것에 일희일비하는 건 소영하 문제 하나만으로도 벅차다.
서로가 확실한 합의 하에 신뢰를 가지고 부부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최악의 경우는 면한 셈이다.
이래저래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차는 청담동으로 진입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 두리번거리는데 차는 몇 번 골목을 돌아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한 웨딩드레스 숍 앞에 멈춰 섰다.
‘호화롭다.’
색색의 컬러 유리가 박힌 스테인드 글라스와 커다란 꽃이 그려진 선물 상자 같은 건물에 깜짝 놀랐다.
건물 입구에는 반투명한 유리로 다양한 디자인의 드레스가 전시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홍 사장님.”
“도 실장 있지?”
직원은 반갑게 홍 사장을 마주하고 루비 홍께서는 드높은 하이힐로 또박 또박 자신감 넘치게 걸어갔다.
그래서였을까. 평소라면 조금은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이 자리만큼은 민재도 어깨를 펴고 당당해지기로 햇다.
속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은 이럴 때는 꽤나 도움이 된다. 애써 편안함을 가장한 얼굴로 민재는 주변 풍경을 꼼꼼히 살펴봤다.
“어머, 옥자 씨 왔어?”
“시끄럽거든, 그러는 자기 이름은 도민준인 주제에.”
하이톤의 남자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아마 도 실장으로 추측되는 저 스킨헤드의 남자가 이 가게 주인인 모양인데, 그는 얼핏 봐도 홍 사장과는 무척 친해 보였다.
“어머, 이 아가씨는 또 누구려나?”
“내 조카 같은 친구니까. 잘 좀 요리해줘.”
언제 봤다고 조카가 된 건진 모르겠지만 뭐라고 입을 열 분위기가 아니라 민재는 얌전히 입을 닫고서 눈치를 살폈다.
딱 붙는 면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도 실장은 유독 민재의 얼굴 쪽을 유심히 바라봤다.
“닮았네.”
“네?”
“아, 내가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자, 이리 오세요.”
여성 스태프들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걷자 새하얀 돔 형태의 드레스 룸이 나왔다.
오늘 드레스 코드에 맞춰 고른 건지 방에는 벌써 여러 벌의 드레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보자. 오늘은 또 어떤 마법을 부려볼까.”
몇 벌의 드레스를 대 보고서 도 실장은 별빛 무늬가 수놓아진 밤하늘 빛의 드레스를 골라들었다.
“자기는 이런 색도 잘 어울리겠다.”
“자, 자기요?”
“저희 실장님이 원래 다 그렇게 부르셔요.”
어색해하는 민재의 반응에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식 때도 이렇진 않았었는데, 며칠 만에 전문가의 손길이 더해지자 정말로 마법이 일어났다.
웨이브 진 머리에는 컬을 더 넣어 늘어트리고 어깨와 쇄골 라인을 시원하게 드러냈다.
길어진 속눈썹과 반짝이는 눈동자. 날렵한 턱선과 도톰한 입술까지.
“자, 어때. 마음에 들어?”
잠시나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가슴 깊이 반성하며 민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정말 기술이 아니라 마법의 경지에 오른 걸지도 모른다.
준비가 끝나자 곧 홍 사장의 비서가 보석이 들어 있는 올리브색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건 내가 채워 줄게.”
높은 하이힐 덕분에 백 팔십이 훌쩍 넘는 홍 사장은 생글생글 웃으며 민재의 앞에 섰다.
참 키도 크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인데, 곧고 길게 뻗은 손가락은 섬세하게 보석을 집어 들었다.
뽀얀 피부와 잘 어울리는 청보라빛의 드레스에 쁘띠 다이아가 박힌 귀걸이가 반짝였다.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쇄골 라인 위에 걸치는 걸로 단장이 끝났다.
“정말 대단하네요.”
“내 솜씨가 이렇다니까.”
사람은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더니.
과연 자신만만한 도 실장의 태도에는 그에 걸맞은 근거가 있었다.
***
단장을 마친 후 리무진에 오르고 차 안에는 다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입고 온 옷과 보석함은 쇼핑백 안에 잘 개어 넣어두고 민재는 세트로 맞춰서 준 클러치백을 꼭 쥐었다.
“잘 어울린다. 무혁이가 보면 좋아하겠네.”
거울 속의 제 모습이라는 게 안 믿길 정도로 곱게 꾸며놓았으니 홍 사장은 뿌듯한 얼굴로 연신 민재를 관찰했다.
그러면서 잠시도 쉴 틈 없이 이것저것 물어봤다.
“무혁이는 어때, 집에선 잘 해줘?”
해묵은 감정과는 별개로 좋은 남편의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다.
밥도 잘하고, 혼자 오래 산 탓에 어지간한 살림은 혼자 다 알아서 하는 게 습관이 됐다.
‘잔소리가 좀 많아서 그렇지.’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줄곧 뚫어지게 쳐다보는 홍 사장의 시선이 참 부담스럽다.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뭐가 그리 마음에 걸리는 건지 아까부터 이상할 정도로 제 얼굴을 살펴보는 게 심상치 않다.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홍 사장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실은 내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말야.”
아까 도 실장도 그런 말을 했었는데. 누구냐는 질문에, 홍 사장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눈으로 말했다.
“우리 언니.”
혜성 가의 사모님이라면 분명 민재를 그토록 못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성준범 이사와 반목하고 있는 상대일 텐데.
안 그래도 회장님이 중태에 빠진 이후로 혜성 내부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때다 싶은 성 이사는 회사를 집어삼키려 연일 바쁘게 움직이는 반면,
사모님은 줄곧 쓰러진 남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우리 조카가 잘 자랐으면 지금쯤 딱 민재 씨 또래일 거라, 언니가 보면 참 좋아할 거야.”
조카의 사연은 안 팀장에게 어렴풋이 듣긴 했다.
부잣집이라고 마냥 마음이 편한 건 아닌 모양이라서, 저쪽도 나름 속사정이 복잡한 것 같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차는 파티장 입구로 들어섰다.
차가 멈출 즈음 입구에서 연미복을 입은 무혁을 발견했다.
“그새를 못 참고 마중까지 나왔네.”
차가 멈추고 홍 사장이 먼저 내렸다. 잠시 소란이 가시고 나서야 민재는 치마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릴 준비를 했다.
“손 잡아.”
무혁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가 왜 필요한 건지, 이런 드레스를 입어보고 나서야 알았다.
레이스가 구겨지지 않도록 민재는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디뎠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어색하기만 한 자신과 달리 무혁에게선 긴장한 기색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네.”
나란히 결혼반지를 끼고 입구에서 부부임을 확인까지 받았다.
정식으로 예식을 치른 덕분인지 이제는 스킨십도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정말로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무혁은 다정한 눈빛으로 민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민재도 그런 그의 어깨에 기대고서 애써 태연한 척 마음을 가라앉혔다.
‘남들이 보면 정말 좋아하는 줄 알겠네.’
자연스레 말을 걸어 오는 사람들 앞에서 무혁은 상냥한 말투로 민재를 소개했다.
벌써 업계에 소문이 자자했던 터라, 사람들은 이미 민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눈치였다.
“학생 시절부터 만나셨다면서요.”
“둘 다 첫사랑이었습니다.”
“어머, 로맨틱해라.”
틀린 말은 아니라지만 포장이 과하다.
아니, 지금 이 연회장 안의 모든 것이 설탕 과자처럼 반짝반짝 눈이 부셨다.
색색의 드레스와 값비싼 시계, 보석이 박힌 커프스 버튼. 그 안에서도 빨간 드레스를 입은 홍 사장은 멀리서 봐도 유독 튀었다.
다들 화려한 옷차림이라지만 그래도 홍 사장 앞에서는 모두 얌전해 보일 정도라 새삼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럼 이제부터 희망문화재단과 영원 미술관, 수정 일보가 공동 주관한 자선의 밤 행사를 개최합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니 명목은 저래도 사실상 사교 모임에 가까워 보였다.
무슨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참 낯설기만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접근도 못 할 세계네요.”
반쯤은 비꼬는 말에 가까웠다.
검찰 생활을 몇 년 했어도 나라에서 월급은 뻔할 뻔자인데, 그런 것 치고 진무혁의 씀씀이가 너무 좋아졌다.
학생 시절의 그는 이렇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부모님의 집을 판 돈으로 오피스텔을 구했고, 조원식의 지원을 받고 싶지 않다며 과외로 생활비를 충당했었다.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교정에서 손을 잡고 걷다가 추워지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서 나눠 마셨다.
“곧 익숙해져야지.”
어딘지 모르게 여유까지 느껴지는 그의 모습이 왜 이렇게 낯설까.
홍 사장처럼 대단한 사람과의 인맥은 또 어떻게 쌓은 건지.
생각해보면 민재는 ‘과거’의 진무혁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도 지금 제 남편이 된 이 남자에 대해서는 어째 모르는 게 많았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물어볼 자격이 있을 테지만 지금의 민재는 그저 계약으로 맺어진 가짜 아내일 뿐이다.
필요에 의해 맺어진 주제에 함부로 그의 상황에 대해 파보는 건 어쩌면 월권일지도 모른다.
물어본다면 순순히 알려줄 테지만. 어떤 의미론 그게 더 무섭다.
‘알아서 뭘 어쩔 건데.’
어차피 일 년만 있다가 헤어질 관계인데.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결국은 민재 자신만 상처받을 테니까.
그래서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 있었구나.”
주최 인사를 마치고 내려온 홍 사장이 직접 샴페인 잔을 가져왔다.
차를 가져온 무혁은 운전을 해야 한다며 사양하고, 그렇게 두 잔 모두 민재의 몫이 됐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이 년 만에 돌아온 진무혁 검사는 몰라도 여기에 홍옥자 사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 거물이 직접 와서 말을 거는 모습에 사람들은 덩달아 민재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졌다.
“그나저나 늦네.”
“누가요?”
“자기들을 여기 부른 이유가 뭐겠어? 그 개자식한테 붙은 쓰레기한테 한 방 먹여주려고 그런 거지.”
개자식이라면 성준범일 테고, 쓰레기도 누구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힐끔 입구 쪽을 보니 좀 늦은 건지 저 멀리서 눈에 익은 얼굴이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게 보였다.
“일부러 부르신 건가요?”
“그럼. 선전포고는 홈그라운드에서 해야 하는 법이니까.”
아무래도 저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을 것 같은데.
사악하기 짝이 없는 루비 홍의 미소에 지켜보는 민재가 다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