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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22화 (22/103)

22화. 공식적으로 유부녀가 된 이상.

분명 제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무혁의 태도가 오히려 민재의 심기를 거슬렀다.

“내가 분명!”

“그래. 내일 용식이 불러서 직접 확인해보면 되잖아.”

자세한 검증은 내일로 미루고 무혁은 민재를 그대로 침실에 밀어넣었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이상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가 수상하기만 한데, 피곤이 밀려와 민재는 그대로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

음주의 대가는 언제나 극심한 숙취로 돌아왔다.

와인 한 병을 모조리 비운 대가로 민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늦게서야 눈을 떴다.

“이건.”

문 너머에서 콩나물해장국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좀비 같은 몰골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서니 뜻밖의 손님이 민재를 맞이했다.

“민재 씨, 일어났어요?”

“용식 씨?”

잠옷 바람에 머리도 빗지 않은 몰골인데.

그대로 다시 방 안에 들어가 옷부터 갈아입고 나서야 민재는 겨우 다시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와서 앉아. 아침 먹어야지.”

“응. 선…….”

습관처럼 선배라는 말이 나오려다 불현듯 다시 들어가 버렸다.

“무혁 씨.”

호칭을 바꾸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국그릇부터 놔 줬다.

말없이 국물만 홀짝이며 민재는 어제 제 입으로 했던 말을 곰곰이 곱씹어봤다.

‘그러니까…….’

분명 할머니 소식에 기분이 좋아진 것까지는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분명 점점 취기가 오르고 나서 그만.

지난번 그 일에 대해 따져 묻고 말았다.

- 다 들었어요. 내 귀로 똑똑히 다 들었다고요.

무혁이 폰을 보여주며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그 뒤의 기억이 어째 흐릿하다.

가물가물 거리는 기억 속에서 분명 통화 상대가 친구인 용식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난 갑자기 왜 부른 거야?”

“며칠 전에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아서.”

“오해?”

뭐부터 말해야 할지 곤란할 지경이다. 무혁의 설명을 듣고 용식은 호탕하게 웃으며 제 폰을 민재 앞에 내놓았다.

“그거 혹시 이거 아니었어요?”

불륜 소송을 워낙 많이 하다 보니 습관이 됐다며 용식은 아예 무혁과의 통화 원본을 그대로 들려줬다.

- 야, 진무혁.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 이건 그냥 계약이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 아무래도 내 스타일은 아닌데. 그냥 안 한다고 할까?

분명 그날 밤 들었던 말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같은데.

- 기간도 정해져 있고, 어차피 서로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으니 그 사이에 적당히 선은 지켜야지.

그 말이 그 말이었을 줄이야.

- 소송을 몇 년씩 끌면 어떡해?

- 길어 봐야 얼마나 가겠어. 어떻게든 일 년 안에 마무리를 지어야지.

- 그럼 너도 검찰로 돌아갈 거야?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용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팀장인가. 그 양반이 하도 들이대니까 나도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싶어서요.”

민망함이 목 끝까지 차고 올라 식사 내내 민재는 고개 한 번 제대로 들지 못했다.

설마 그게 다 오해였을 줄이야.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걸 보며 용식은 짓궂은 놀림을 이어나갔다.

“민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무혁이 놈을 많이 좋아하시나 보네요.”

“알았으니까 이만 가.”

용무가 끝났으니 무혁은 냉정하게 손님을 쫓아 보냈다.

용식 덕분에 오해는 풀렸다지만 집 안에는 여전히 어색한 공기만 맴돌았다.

“저기 선, 아니 무혁 씨.”

지은 죄가 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호칭까지 고쳐 부르며 민재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눈치만 봤다.

“그런 거였단 말이지.”

일방적으로 오해한 것도 모자라 오만 진상을 다 부렸으니 지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실망이야. 석민재.”

“그게 말이죠…….”

“네 뜻이 어떻든 난 계약대로 완벽한 남편 노릇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어.”

암, 그렇고말고. 백 프로 지당하신 말씀이다.

이 아침에 해장국까지 끓여다 바친 것도 모자라, 회사에서도 친구들 앞에서도.

결혼식장에서조차 무혁은 완벽한 남편 역할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요.”

“그런 나한테 계약 위반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했단 말이지.”

“아니 왜 말을 꼭 그렇게 해요!”

누가 검사 출신 아니랄까 봐 똑같은 말을 해도 꼭 저런 식이다.

얄밉게 눈치를 주는 저 인간이 참으로 원망스럽지만, 민재는 눈물을 머금고 제 입으로 모든 죄를 시인했다.

“그래요. 내가 잘못 들은 것도 맞고, 오해한 것도 실수였어요.”

“그렇다고 어제 내기한 것도 잊어버렸다고 하면 곤란하지.”

“내기요?”

한참 열이 올라 따져 묻던 도중, 진무혁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 만약 이게 네 오해면, 그땐 나한테 뭘 해줄 건데?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다지만.

“기억 안 나요.”

피고인은 불리한 정황에서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한데. 민재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 애를 썼다.

“그건 그렇고. 다음 주 수요일에 따로 일 있어?”

“다음 주 수요일이요?”

“부부 동반 모임이 있어서. 같이 가줬으면 해.”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지은 죄가 있으니 민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가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듯 무혁에게도 명목상의 ‘아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결혼을 안 하면 은근히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못을 박아둬야지.”

“조 대표도 오는 거예요?”

무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양아버지나 다름없는 조 대표가 아닌 A&Z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비겁한 수단까지 써가며 갈라놓았던 옛 여자친구와 결혼까지 해버렸으니까.

나란히 선 무혁과 민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조 대표의 속은 제대로 긁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준비가 좀 필요해.”

“준비요?”

“드레스 코드가 있는 파티라서. 자세한 건 지난번 그분이 챙겨주실 거야.”

결혼식장에서 본 빨간 옷의 파마머리의, 마치 한 마리의 사자와 같은 기백을 지닌 사장님께서 직접 초대하신 자리일 줄이야.

성준범 쪽에 붙은 조 대표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그쪽도 기꺼이 협조를 아끼지 않을 모양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무혁의 ‘고용주’께서는 두 사람의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에 대해 진작 알고 있는 눈치라서.

안 가면 안 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저게 목적이었구나.’

이제 주도권은 완전히 저쪽에 넘어가 버린 것 같은데,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민재는 얌전히 파티에 출석하기로 했다.

좋든 싫든 민재에게는 거부권이 없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오늘따라 어쩐지 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었다.

***

월요일 아침. 두 사람은 평소처럼 출근길에 나섰다.

“불 껐어?”

“문도 다 닫았어요.”

하나하나 잔소리를 해대는 무혁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민재는 힐끔 그의 왼손 약지를 봤다.

아직 반지가 어색한 민재와 달리 진무혁의 손에 낀 반지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저 인간은 손가락조차 참 길고 예쁜 걸 보면 세상은 어쩐지 불공평하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결혼식에 오지 않은 다른 팀 직원들을 포함해 온 회사 사람들이 결혼식을 축하해주니 덩달아 유명인사가 된 기분이다.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를 받으며 민재는 평소와 다른 층의 버튼을 눌렀다.

“회계팀 들렀다 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요.”

무혁을 보내고 민재는 오 대리가 있는 회계팀 쪽으로 향했다.

추가로 받아야 할 서류를 받으러 간 건데 어쩐지 오늘따라 사무실이 시끌시끌했다.

“오 대리 좋겠다. 사진도 찍지 그랬어?”

“운이 좋았다니까요. 내가 받자마자 직원들한테 끌려가는 거 있죠?”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미, 민재 씨!”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놀라며 손에 든 무언가를 황급히 숨겼다.

모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후에도 오 대리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수상한 기색이 역력하다.

“뭔데 그래?”

“아, 아니 그냥.”

뒤에 숨긴 물건이 아무래도 수상한데. 남들이 안 보는 복도까지 나오고 나서야 오 대리는 제 수첩을 민재 앞에 보여줬다.

“우연히 만났는데, 말하기 좀 그래서 그랬어.”

오영지 씨에게, 라는 글자와 대강 휘갈긴 사인이 너무나 눈에 익었다.

아래에 적힌 날짜는 분명 결혼식 날인데. 민재는 저도 모르게 머리부터 짚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예식이 끝나고 한참 후에야, 후문 쪽 계단으로 올라오다 우연히 마주쳤다고.

하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여서 소영하를 알아본 건 오 대리 한 사람 뿐이었다고 했다.

“걱정하지 마. 곧 직원들이 와서 데려가기도 했고, 내가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라고…….”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욱해서 언성이 높아졌다가, 금방 실수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건 분명 제 문제인데. 엉뚱하게 화풀이를 해버렸단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미안. 잠깐 욱했어.”

평소 얌전하기만 하던 민재가 언성을 높이자 오 대리도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일부러 말 안 한 거 아니야, 나는 그냥…….”

정말 놀란 건지 울먹이기까지 하는 걸 겨우 달랬다.

오 대리는 이게 가짜 결혼이었다는 걸 모르니까, 갓 결혼한 민재를 위해 일부러 묻어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은근히 마음이 여린 오 대리를 보고 있자니 민재도 덩달아 울고 싶어졌다.

일 문제로는 사고 한 번 친 적이 없는데 매번 소영하와 얽히는 문제만은 엉망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이번 기회에 단단히 뭐라고 했으니까.”

호기로운 오 대리의 말도 위로가 되진 못했다.

애초에 말로 해서 알아들을 상대라면 참 좋았을 테지만, 그랬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다.

필요한 서류를 받아 윗층으로 올라오는 동안에도 심란함이 가시지 않았다.

종이가 흔들리는 걸 보고서야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쪽은 여전히 뒷감당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고 결혼식까지 찾아왔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러 가는 안 팀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민재는 서둘러 고개를 젓고서 서류로 얼굴을 가렸다.

“아뇨. 회계팀에서 서류 받아와서, 다녀오실 때까지 바이오 건 결재 올릴게요.”

안 팀장은 어지간해선 오지랖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보니 거기까지만 듣고 순순히 자기 볼일을 보러 떠나줬다.

만약 이런 문제로 실수라도 하면 그게 더 문제겠지만.

감정과 별개로 일은 일이니 일말의 오차도 용납될 수 없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굳게 닫힌 무혁의 사무실이 보였다.

하필이면 민재의 자리 바로 앞이라서, 유리 벽 너머로 흐릿한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말 안 하는 게 낫겠지.’

어차피 직접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찾아올까 봐 벌벌 떤 사실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예전보다 마음을 다잡기 쉬워진 건, 무혁의 존재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식적으로 유부녀가 된 이상 소영하가 날뛰어 본다 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오 대리 말처럼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꼴을 보니 치가 떨릴 뿐, 그래 봐야 한 번 떠난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회복이 빠른 걸 보면 조금은 강해진 건가.’

어쩌면 이것도 결혼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왼손 약지의 반지를 슬쩍 보고 민재는 다시금 업무에 집중했다.

***

법무법인 A&Z 기업소송팀 주니어 2년차 변호사 박해영은 요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혜성 건, 안 팀장이 아니라 진무혁이 전담한다며?”

“그러니까. 그쪽은 우리랑은 아예 차원이 달라.”

박해영은 분명 진무혁과 동갑인데, 동기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있으니 적잖이 속이 뒤틀렸다.

어디를 가나 진무혁, 진무혁.

말도 안 되는 특혜를 받고 들어오는 건 부당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진무혁의 이름값이 너무 컸다.

“이번에 A&Z에 진무혁이 들어왔다면서?”

친한 선배와의 식사자리에서조차 진무혁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어차피 선배는 다른 로펌에서 일하고 있으니, 박 변호사는 쌓였던 불만을 대나무숲 보듯 털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자마자 파트너는 너무하잖아요.”

진무혁의 경력 전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소년 등과에 연수원 수석, 검찰 생활까지 했으니 몸값이 높게 매겨진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자신과 동갑이라는 점이 거슬릴 뿐.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무관까지 마치고 나니 서른이 넘어버려서 그는 진무혁과 동갑임에도 여전히 신입 티를 벗지 못했다.

‘그리고 석민재까지.’

평소 안 팀장의 과보호 때문에 퇴근 후 식사자리 한 번 권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혼 할 사람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그 상대가 진무혁일 줄은 몰랐다.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하다니까요.”

처음에 A&Z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건만.

그런 제 업적도 진무혁의 등장으로 빛이 바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열등감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박 변은 빈 술잔을 보며 애써 화를 삭였다.

“그래서 내가 오늘 널 부른 거야. 이번 기회에 널 알아주는 곳으로 옮기는 것도 방법이니까.”

“옮기다니요?”

“그분한테 네 얘길 했더니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곧 도착하신다고 했는데.”

“실례하겠습니다.”

마침 종업원이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별실의 문이 열리고 눈에 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조 대표님?”

법무법인 조조의 대표가 직접 자신을 찾아오다니. 놀란 박 변호사를 앞에 두고 조원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진무혁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반가운 미소로 악수를 나누며 조원식은 제 눈앞에 먹잇감을 유심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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