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결혼-19화 (19/103)

19화. 의심이 기우라면 좋을 테지만.

이 결혼을 시작하기 전 무혁은 분명 제 입으로 말했다.

- 착각하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혼이야.

떨리는 손을 꼭 쥐고서 민재는 환하게 웃고 있는 무혁을 바라봤다.

‘그런 거였구나.’

은근히 보이는 태도에 아주 조금은 그 역시 제게 미련이 남은 게 아닐까 여겼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민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지.”

다른 사람에게는 이 계약에 대해 무조건 비밀로 하라고 했던 주제에.

무혁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서는 곧장 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슬슬 집에 가자.]

불빛이 잠시 반짝이자 민재는 서둘러 화면부터 꺼 버렸다.

숨어 있는 제 모습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민재는 아예 두 손으로 입까지 막고서 애써 숨을 죽였다.

무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민재는 서둘러 화장실로 돌아갔다.

“민재야, 여기 있어?”

“어, 어.”

“무혁 선배가 너 찾더라. 어서 가봐.”

다행히 민재가 들었다는 사실을 들키진 않은 모양이다.

애꿎은 폰을 꽉 거머쥐고서 돌아가니, 무혁은 벌써 민재의 가방을 챙겨둔 후였다.

“메시지 못 봤어?”

“어, 그게…….”

분명히 확인은 했는데. 반쯤 얼이 빠진 민재를 두고 무혁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안아 부축했다.

“취했나 보네. 슬슬 들어가자.”

무혁은 총무를 맡은 동기를 불러 제 카드를 건네줬다.

“오늘 계산은 내가 하지. 그럼 다들 결혼식 때 보자.”

“과연 선배님. 존경합니다!”

구십 도로 인사까지 하는 동기들을 보니 예식장이 쓸쓸하진 않을 모양이다.

무혁은 아예 민재의 가방까지 받아들고서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

“속이 안 좋아?”

“그냥 좀 피곤해서요.”

아까 전, 통화할 때는 웃기도 하던 사람이 다시 평소의 진무혁으로 돌아왔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를 두고 차마 먼저 물어볼 수 없었다.

‘복수, 라고 했었지.’

반가운 재회는 아니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집에 가는 차 안에서도 민재는 제 가방만 꼭 껴안은 채 애써 눈을 감고 잠든 시늉을 했다.

“기사님, 아내가 잠든 모양이니 조금만 천천히 가 주십시오.”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연기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을 텐데, 무혁은 자상한 남편이 된 것처럼 제 재킷을 벗어 덮어주기까지 했다.

불편하게 놓인 손도 고쳐주고서 차 안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

“신혼이신 모양입니다.”

“곧 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참 좋을 때지요. 보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지랖 넓은 대리기사의 말에 그는 조곤조곤 대답을 이어나갔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여서 민재는 살그머니 실눈을 뜨고서 그의 동태를 살폈다.

“이 사람도 예식 준비 때문에 바빠서 그런지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암요,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이니 감회가 남다르겠지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들뜬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무혁은 태연히 그 말을 또 받아줬다.

“그럼요. 한 번뿐인 결혼이니, 잘 살아야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무혁은 제 손을 민재의 손 위에 겹쳤다.

‘아까 그건 대체 뭐였던 거지.’

흘려듣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지하주차장에 차가 멈춘 후에도 민재는 잠자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기사가 떠나고 어느새 차 안에는 단둘이 되었다.

슬슬 눈을 떠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곁에 앉은 무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자는 거 다 알고 있어.”

정곡을 찔린 탓에 속이 뜨끔했다.

조심스레 눈을 뜨자 지하주차장 아래의 강한 조명 탓에 눈이 부셨다.

“선배.”

“다 들었어?”

심각한 그의 표정에 민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몰랐던 사실도 아니고 굳이 불편해야 할 이유도 없는데 무혁은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먼저 올라가. 잠시 볼일이 있으니까.”

“선배,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이렇게 질척거릴수록 상황은 더욱 불편해질 뿐이다.

“먼저 들어갈게요.”

화가 난 건지 취기가 오른 탓인지, 오렌지빛 조명 아래 무혁의 뺨이 유독 붉다.

청첩장을 돌릴 만한 곳은 거의 다 돌렸으니 이제는 이 결혼을 무를 수도 없다.

“차라리 듣지 말걸.”

어색함이 더욱 배가 되어서 민재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

- 이 자료 괜찮은데? 진 변 친구면 이번 기회에 우리 쪽으로 합류시키지?

조조와 각을 세우며 몸집 키우기에 들어간 안 팀장 눈에 용식이 들어온 것이 화근이었다.

비록 경력은 뒷조사와 불륜 전문이라곤 해도 가능성이 보인다며 그는 용식에게 파격적인 계약 조건을 들이밀었다.

“야, 진무혁.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대형 로펌이다 보니 비밀유지 각서부터 시작해서 구비서류가 워낙 빽빽한 탓에 용식은 무혁을 잡고서 하소연을 해댔다.

“이건 그냥 계약이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생각보다 빡빡한 조건과 막대한 금전적 보상 사이에서 용식은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아무래도 내 스타일은 아닌데. 그냥 안 한다고 할까?”

“기간도 정해져 있고, 어차피 서로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으니 그 사이에 적당히 선은 지켜야지.”

이번 일만 잘 끝나게 된다면 경력에도 도움이 될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 번은 이런 대형 소송 경험도 해 두는 게 좋다.

제 사무실은 어찌해야 하냐는 용식에게 무혁은 딱 잘라 결론을 내려줬다.

“소송을 몇 년씩 끌면 어떡해?”

“길어 봐야 얼마나 가겠어. 어떻게든 일 년 안에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럼 너도 검찰로 돌아갈 거야?”

태생이 검사라, 무혁도 로펌 생활이 그다지 체질에 맞는 건 아니었다.

이 건이 아니었다면 바로 복귀했을 테지만 검찰 소속으로 조원식을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곤란하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야.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조원식과는 어떤 형태로든, 제 손으로 매듭지어야 하고 그걸 위해 혜성 쪽과 손을 잡았다.

거기에 석민재까지. 이제는 얽힌 문제가 너무 많은 탓에 섣불리 돌아갈 수도 없게 됐다.

‘그런 이유였단 말이지.’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돌아서던 민재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속이 쓰렸다.

무력했던 그때의 경험을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취했나 보네. 슬슬 집에 가자.”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민재를 챙기는 것도 이제는 그의 몫이다.

차에 오르자마자 잠든 모습을 바라보며 무혁은 애틋한 마음을 마음껏 드러냈다.

‘내 아내.’

민재는 여전히 선배라는 호칭을 고수하고 있다지만, 예식을 올리면 그때는 정식으로 요구할 생각이었다.

호칭부터 익숙해진다면 그때는 민재의 마음도 어느 정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슬슬 민재를 깨우려는 데 곱게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로 자는 건지, 아니면 자는 시늉만 하는 건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안 자는 거 다 알고 있어.”

반쯤은 도박 삼아 한 말이었다.

그런데 민재는 번쩍 눈을 뜨고서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선배.”

“다 들었어?”

고개를 끄덕이는 민재를 두고 두 볼이 화끈거렸다.

유치한 짓을 현장에서 들켜버렸으니, 민재의 얼굴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먼저 올라가. 잠시 볼일이 있으니까.”

민재를 보내고 무혁은 한동안 긴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민재를 보며 무혁은 소영하의 존재를 떠올렸다.

‘아직 미련이 남은 건 아니겠지만.’

만약 그 남자가 쓰레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민재는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행복해졌을지도 모른다.

“나도 제대로 된 놈은 아니군.”

그녀의 불행이 무혁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된 셈이라지만.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그렇게 민재의 곁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이 정도면 충분해.’

소영하의 흔적을 묵묵히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하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아 너덜너덜해진 민재는, 목적이 분명한 거래라는 걸 확실히 주지시킨 후에야 아주 조금씩 제 곁으로 다가와 줬다.

그러니 온전히 자리를 잡기까지 이런 제 마음을 쉽사리 드러낼 수 없는데.

“괜한 짓을 했군.”

시트에 몸을 기댄 채 무혁은 민재의 빈 자리를 묵묵히 바라만 봤다.

***

“축하해, 민재야.”

야속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결혼식 날이 밝았다.

취재진을 막기 위해 고르고 골랐던 플라티나 호텔의 별관 예식장은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했다.

“무혁이 놈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뒷조사 전문, 한용식 변호사라고 합니다.”

사회를 맡았다는 무혁의 친구, 용식은 풍채 좋은 몸을 하고서 민재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번 혜성 건 관련해서 저도 A&Z 소속으로 있을 예정이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혜성 소송 문제로 새 변호사 몇 명을 충원했다더니 그 역시 그중 하나였다.

“뒷조사라고 하시면…….”

“세상이 필요로 하지만 차마 대놓고 말은 못 하는 종류의 일을 대신 처리하고 있죠.”

손가락을 비비며 현찰이 최고라며 추앙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무혁에게 이런 친구가 있었다는 건 민재도 전혀 몰랐다.

“선배랑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오랜 악연이지요. 말하자면 아주 길지만 그래도 석민재 씨가…….”

“슬슬 준비하지.”

용식의 말을 끊고 무혁은 턱시도 차림으로 민재를 바라봤다.

평소에도 슈트를 입긴 했지만 화려한 드레스 셔츠를 입은 무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존재감이 넘쳤다.

“드레스 잘 어울리네.”

“선배도요.”

민재는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다듬어줬다. 다행히 무혁은 그런 민재의 손길을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앞으로도 잘할게요. 그러니 오늘 잘 부탁드려요.”

“나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해.”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묘한 공기가 흘렀다.

그때 그건 뭐였냐고, 조심스레 물어보려던 차에 할머니가 신부 대기실을 찾아왔다.

“민재야, 잠시 시간 괜찮니?”

“할머니.”

요즘 들어 상태가 좋아진 덕분에 할머니는 무사히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진 서방, 앞으로 우리 민재 잘 부탁하네.”

“별말씀을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라며 무혁은 그대로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이렇게 입혀 놓으니 꼭 공주님 같구나.”

“할머니도 참.”

오늘의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화장은 꼭 연극 속 분장술 같았다.

그래도 단 하루의 이벤트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꾸밀 만하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다른 모든 문제는 모두 뒷전이 되고 만다.

“네 엄마 아빠가 이 모습을 꼭 봤어야 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화장이 아주 잘 받아서 그런지 거울 속 제 모습은 민재 자신이 봐도 참 낯설었다.

갓 망울이 터지는 리넨큘러스로 만든 부케와 새하얀 베일.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티아라는 오늘의 주인공을 선연히 돋보이게 했다.

“분명 보고 계실 거예요.”

친부모가 누구든 민재를 사랑으로 길러준 건 지금의 부모님이니까.

갓난아기일 때 자신을 버린 사람을 이제 와 굳이 찾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이제 너도 가정을 꾸리게 됐으니, 이것도 돌려줘야 할 것 같구나.”

줄 것이 있다며 할머니는 천 주머니에 싼 무언가를 소중하게 꺼내놓았다.

민재가 처음 발견됐을 때 입고 있었던 배냇저고리와 반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아기는 반지를 낀 채 강보에 싸여 버려져 있었다고 했다.

“네가 친부모를 찾게 될 날이 올까 싶어서 가지고 있었단다.”

시간이 지나 빛이 바랬지만 보드라운 천에는 한땀 한땀 정성 들인 수가 놓여 있었다.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라는 할머니의 말에도 민재는 인상을 찌푸린 채 물건들을 노려봤다.

“네 부모도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게야.”

“그러면 뭐해요. 그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췄다면서요.”

민재가 버려졌던 보육원에서는 누군가 민재를 찾아온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기로 했었건만.

삼십 년이 되도록 버려진 아기를 찾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내 가족은 할머니뿐이에요.”

“요 녀석, 진 서방도 이제는 네 가족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의 말에 가슴이 시렸다.

- 민재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나.

그때는 그 말마저도 한없이 달콤하게만 느껴졌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게 된 후에야 조금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멀쩡한 부모라면 이런 미친 짓에 동참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

어쩌면 진무혁도 그래서 자신을 선택할 건지도 모른다.

“잘 살게요. 그러니까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서 민재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암, 그래야지. 내 새끼는 어쩜 이리 말도 예쁘게 할까.”

“민재야, 축하해!”

친구들이 찾아와서 더 길게 이야기가 이어지진 못했다.

예식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조원식 딸을 차버릴 정도니, 진무혁이 푹 빠진 모양이네.”

“대학 시절부터 사귀었다잖아. 헤어졌다고 해놓고 몰래 계속 만났던 모양이야.”

제 손을 떠난 소문은 이제 완벽한 음모론으로 돌변해 개연성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로워만 보였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외부 복도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줄지어 입구를 막았다.

당황한 직원들도 함께 뛰기 시작하는 모습에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설마 소영하가 온 거라면 정말로 일이 꼬이게 된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민재는 서둘러 신부 대기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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