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상적인 남편.
저쪽은 밥줄이 걸린 살벌한 전쟁을 준비하는데 비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안 팀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박수까지 쳤다.
“그래. 이렇게 재밌는 소송을 들고 왔는데 내가 진무혁을 안 예뻐하게 생겼어?”
성 회장이 쓰러지고 사실상 그룹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의 싸움이라는 건데.
이 사정을 알고 나니 민재도 무혁이 약속한 성공보수 이야기가 왜 나온 건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 거였구나.’
무혁에게 민재는 비단 조원식 하나를 엿 먹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조조와 성준범이 손을 잡더라도, 부인 쪽이 A&Z와 손을 잡게 된다면 이번 상속 전쟁은 누가 이긴다고 쉽사리 장담하기 힘들다.
“판례는 다 찾아놨지?”
“네, 여기 있어요.”
법원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는 전적으로 판을 어떻게 짜느냐에 달려 있다.
내용을 빠르게 훑어본 안 팀장은 내용이 흡족했는지 히죽 웃었다.
“과연 내 새끼라니까. 누구 밑에서 큰 건지 어지간한 주니어들 몇 명보단 우리 석민재 하나가 훨씬 더 쓸모 있지.”
빈말이라는 걸 알아도 막상 듣고 나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같은 사무실에서 칠 년을 근무해오면서 제 상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소영하 일에 대해 기꺼이 눈감아 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쵸. 이 정도면 쓸만한 거 아닌가요?”
“아직 멀었어.”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동안 워낙 마음고생이 심했던 걸 아는지, 안 팀장은 마치 친동생을 대하듯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오래오래 내 옆에 있어. 아직 가르칠 게 한참 남았으니까.”
“네, 팀장님.”
워낙에 외로운 처지라서. 안 팀장은 민재가 여기에 있게 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다.
어쩐지 그동안 사무적으로만 대하던 안 팀장과도 조금은 마음의 거리가 허물어진 기분이 들었다.
‘어라.’
순간 사무실 안에 있던 무혁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서 민재는 문득 시계를 봤다.
“회의가 길어지는 거면 저녁 준비할까요?”
“아니. 무혁이 저 녀석, 주말에도 부려먹었더니 오늘만은 기필코 칼퇴근한다는데?”
은근슬쩍 민재 쪽을 몇 번이나 확인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퇴근 준비를 하라는 신호 같다.
미리 다른 일감을 마무리해뒀더니 역시나 여섯 시를 정확히 십 분 남겨두고서 무혁은 칼같이 회의를 끝내버렸다.
“나머지 사항은 내일까지 제 메일로 넘겨주시면 됩니다.”
“진 변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검사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무섭네. 무서워.”
평온한 무혁의 얼굴과 달리 문성희를 포함한 다른 변호사들은 이미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
“과연 진무혁이야.”
“안 팀장님도 내일 브리핑하실 준비 미리 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
민재에게 굳이 떠넘기지 못하도록 무혁은 안 팀장에게 일 폭탄을 쏟아내고서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과연 적으로 돌리면 곤란한 남자답다고 해야 할지. 주말을 반납한 보복을 톡톡히 하는 모습을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지요.”
“가라, 가. 에라이, 배신자들.”
결혼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안 팀장도 울며 겨자 먹기로 민재를 먼저 보냈다.
“괜찮을까요?”
“보내줄 때 가는 게 나아.”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어서, 이번 주중에 드레스도 고르고 학교 사람들을 만나 청첩장도 돌려야 한다.
지난 번에 그렇게 나와버린 뒤로 어떻게 해야 하나 내심 고민했건만, 무혁은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일축했다.
[내가 민재를 화나게 했어.]
아마 작정하고 사기를 쳤다면 분명 이름난 사기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그렇게 한 숨 돌리긴 했는데.
그래도 막상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또 긴 추궁이 이어질 테니 그에 대한 적당한 변명거리도 미리 만들어둬야 한다.
“할 일이 많네요.”
“할 일이 많지.”
머리가 복잡한 민재와 달리 무혁은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그런지 남의 일처럼 답했다.
그래도 이사를 하고 나니 길만 건너면 바로 집이니 퇴근길이 참 짧아졌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를 즈음, 무혁은 갑자기 민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왜요?”
“잠깐만.”
무혁은 아까 안 팀장의 손이 닿았던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다듬어줬다.
뭐가 묻기라도 한 걸까. 거울을 힐끔 보지만 그다지 이상한 건 없다.
“방은 마음에 들어?”
온종일 혼자 짐을 푸느라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사 온 방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럼요. 너무 좋아서 이래도 되나 싶은걸요.”
무혁이 내어준 안방은 부부용으로 보이는 퀸사이즈 침대에 드레스룸까지 달려 있었다.
화장대를 지나면 나오는 공간 옆에는 생각지도 못한 스타일러까지 놓여 있었다.
“혼수로 보통 장만한다고 해서, 필요 없으면 빼고.”
“필요 없긴요. 안 그래도 눈독 들이던 건데 마음에 들어요.”
요즘은 자율 복장을 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곤 하지만 로펌은 기본적으로 정장이 기본이다.
신뢰를 줘야 하는 업종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손이 많이 가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세탁은 어떻게 하죠?”
계약서상에 집안일은 반반씩 나눠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청소는 당번을 정해서 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사람은 설거지를 면제하기로 했다.
“각자 하지. 다리미는 내 방에 있어.”
“선배가 직접 다려 입어요?”
“그럼 누가 해?”
군대에 다녀온 이후로 무혁은 아예 조원식의 집에서 나와 따로 오피스텔에서 줄곧 혼자 살았었다.
당연한 질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혁이 직접 각을 세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모르는 사람이 내 물건에 손대는 건 불편하니까, 직접 하는 게 나아.”
아. 그러시구나.
어쩌면 무혁이 어제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던 걸지도 모른다.
“앞으로 조심할게요.”
굳이 얄밉게 말을 보태는 바람에 마음이 상해버렸다.
회사와의 거리가 조금만 멀었더라면 이런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됐을 텐데.
걸어서 왕복 십 분도 안 걸리는 환상적인 입지 조건이 그나마 차오르는 분노를 조금이나마 줄여줬다.
“그럼 그동안 꾸준히 연락하고 있었던 건데 잠시 싸웠다로 가는 거죠?”
적당히 저녁을 챙겨 먹고서 두 사람은 곧장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나머지는 내가 적당히 둘러댈 테니까, 곤란한 부분은 얼버무려.”
모든 것은 조원식의 눈을 피하기 위한 연막작전이었다고.
적당히 말을 맞춰놓은 대로 이야기를 하다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그때는 무혁에게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다들 선배한테는 뭐라고 못 할 테니까. 나만 조심하면 되겠네요.”
“그리고 호칭 말인데.”
“네?”
“대체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 생각이야?”
사귀던 시절부터 선배라고 줄곧 불렀던 탓에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설마 내 이름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둘이 있을 땐 참 얄미워지는 저 말투가 민재의 속을 뒤집어놨다.
진무혁. 평소에는 참 잘만 불러대던 이름인데 본인을 앞에 두고 부르려니 무언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냥 선배라고 하면 안 돼요?”
과 CC였던 친구네 커플은 지금도 가끔 남편을 선배라고 부르곤 하는데.
무혁은 단호한 거절 의사를 표하며 호칭 정리에 나섰다.
“난 남들 앞에서 아내라고 대놓고 말할 건데.”
미처 상상도 못 해본 호칭을 듣는 순간 어쩐지 손발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이 일이 대체 어쩌면 좋을까.
민재는 민망함을 애써 참으며 무혁을 부를 만한 호칭을 찾아 헤맸다.
‘남편.’
이건 남에게 부를 때나 쓸 말이지 본인에게 할 말은 아니다.
‘그럼 무혁 씨?’
이것도 본인에게는 뭔가 어색하다.
그렇다고 반말을 쓰기에는 뼛속까지 스민 장유유서가 마음에 걸린다.
“무혁 씨?”
“여보 쪽이 나을 것 같은데.”
“선배!”
준비는 철저히 하자는 주장에 할 말을 잃었다.
곤란한 민재와 달리 무혁은 이 계약의 목적을 분명히 했다.
“진지하게 해주지 않으면 이쪽도 곤란해. 이건 그런 계약이니까.”
나중에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이 순간만은 진짜 부부처럼 지낼 것.
할머니 앞에서 언제 들통날지 모르니 민재도 그 점에는 토를 달 수 없다.
‘하여튼 그놈의 계약 타령은.’
얄미움이 하늘을 찌르는 통에 모로 봐도 미운 남자다.
잔뜩 토라진 민재를 앞에 두고서 무혁은 남의 일처럼 허리의 안부도 물었다.
“허리는 좀 어때.”
“안 그래도 아파 죽겠어요.”
무혁에게 침대를 내준 데다 어제는 온종일 짐까지 옮기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럼 다음부터는 착실하게, 침대까지 모셔다드리지요. 부인.”
“됐거든요?”
그래도 몇 번이나 옥신각신하며 어색한 공기가 한층 풀렸다.
“그럼 잘 자.”
“선배도요.”
거실에서 용무를 마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침실로 향했다.
부부용으로 보이는 킹사이즈 침대는 유난히도 드넓어서 민재 혼자 자기에는 참으로 광활하긴 하다.
“이거 너무 넓은데.”
애꿎은 이불만 꽉 안고서 민재는 작게 몸을 웅크렸다.
옆으로 두 번을 굴러도 공간이 남는데 혼자서 자려니 어쩐지 허전하다.
‘끝까지 안 물어보는구나.’
소영하의 전화번호는 진작에 차단했다.
만약 회사나 집까지 찾아오게 된다면, 그때는 민재도 더는 참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무혁은 곤란한 제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건 배려일까. 아니면 선을 긋는 걸까.
“모르겠어.”
분명 민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진무혁의 속뜻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
“저기 드디어 오셨네.”
“늦어서 미안해.”
회의가 늦게 끝난 탓에 한참 늦게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들이 오셨군.”
손까지 잡고 걸어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 오늘은 다들 단단히 벼른 기색이 역력하다.
예상대로 남자 동기들은 대뜸 무혁을 포위해서는 술잔부터 내밀었다.
“우리 석민재를 데려가시는데 벌주부터 받으셔야죠, 선배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그 진무혁을 놀려먹을 절호의 기회가 왔으니 너나 할 것 없이 흥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게 무혁이 술잔을 받는 동안 여자 동기들은 민재를 포위하고서 호구 조사에 들어갔다.
“진 선배 너 때문에 조조도 걷어차고 A&Z에 갔다는 거 진짜야?”
시나리오상으로는 그렇고, 이제는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으니 민재도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얘 좀 봐. 솔직하게 다 불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다들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눈빛으로 SOS를 보내자 무혁이 잠시 자리를 빠져나와 곧장 민재에게 다가왔다.
“무슨 얘기야?”
“어허, 선배님. 이러시면 곤란하죠.”
하지만 아무래도 민재의 남자 동기들은 무혁을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적당히 마셔요. 내일 회의도 있으면서.”
벌써 단단히 각오한 건지 무혁은 아예 차 키까지 민재에게 맡겼다.
이제는 제법 부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을 보며 동기 하나가 물었다.
“있잖아, 그럼 지금 둘이 같이 사는 거야?”
“합친 건 얼마 안 됐어.”
“좋겠다. 너 진짜 행복해 보여.”
손에 낀 반지에 부족할 것 없는 약혼자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남들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사실 아주 가끔은 진짜라고 민재 자신조차 착각해버릴 만큼, 무혁은 참으로 이상적인 남편감이 되어줬다.
“우리도 신혼집 가보고 싶어.”
“선배랑 얘기해서 나중에 따로 챙겨 볼게.”
“둘이 어떻게 살지 진짜 궁금해.”
집들이는 언제 할 거냐는 성화에 애써 적당히 웃어넘겼다.
이럴 때는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이 무표정한 얼굴이 참 다행이다.
‘이 일을 어쩌지.’
결혼식만 적당히 넘기면 될 줄 알았는데, 집들이라는 복병이 있었을 줄이야.
지금 생각해보니 결혼 후에도 고민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화장 좀 고치고 올게.”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을 때쯤 민재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아무래도 미리 말을 맞춰놓는 게 나을 것 같다.
“혹시, 무혁 선배 못 봤어?”
“잠깐 전화 받으러 나가는 것 같던데?”
소음을 피해 가게 밖까지 나갔다기에 물어물어 건물을 나서니 저 멀리 가로등 아래에 무혁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기 있었구나.’
그동안 줄곧 멀리서 지켜만 봐 왔었으니까, 이제는 뒷모습만 봐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깜짝 놀라게 할 생각에 민재는 조심스레 숨을 죽이고 그에게 다가갔다.
“선…….”
“이건 그냥 계약이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귀에 익은 단어가 들려서, 민재는 서둘러 근처 건물 옆에 몸을 숨기고 애써 숨을 죽였다.
대체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조용한 길이라 무혁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기간도 정해져 있고, 어차피 서로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으니 적당히 선은 지켜야지.”
두 사람의 결혼이 가짜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한 비밀이다.
주어가 없긴 한데 어쩐지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 익숙한 내용이다.
‘설마, 아닐 거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라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무혁은 생각지도 못한 말로 민재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길어 봐야 얼마나 가겠어. 어떻게든 일 년 안에 마무리를 지어야지.”
일 년. 분명 계약서에도 두 사람의 결혼은 일 년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무혁은 입가에 옅은 미소마저 드리운 채 제 입으로 똑똑히 말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야.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