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선배랑 내가 같이 있으면 불행해 보여?
“아이고, 허리야.”
무혁에게 침대를 양보한 대가는 예상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소파에서 자고,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이삿짐까지 옮기고 나니 근육들이 살려달라 비명을 질렀다.
“뭐야. 벌써 신혼이야?”
서류를 넘기러 온 오 대리가 음흉한 눈으로 히죽 웃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말해봐야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라서 변명조차 포기했다.
어차피 온 회사에 소문이 퍼진 덕에 민재도 나날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서방님은 어디 가셨어?”
“외부 미팅. 일이 바쁜가 봐.”
뭐가 그리 바쁜 건지 무혁은 어제부터 민재를 혼자 두고서 쉴새 없이 돌아다녔다.
한집에서 살게 된다는 긴장조차 풀려버릴 만큼 진무혁은 민재와 철저히 거리를 뒀다.
- 일이 있어서 오늘은 나가봐야 해. 짐 정리 잘하고, 저녁은 적당히 챙겨 먹어.
- 많이 늦어요?
- 오늘은 못 들어올지도 몰라.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자.
할머니 앞에서 그토록 살갑던 사람이 다시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정이 떨어진 거겠지.’
소영하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텅 빈 집에 혼자 있자니 다른 의미로 마음이 불편해져서 민재는 이불을 덮어쓰고 괜히 발만 굴렀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다.
[외부 미팅이 있어서 먼저 출근해.]
메모 한 장만 남겨두고서 무혁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또 민재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서운해?”
“그냥 좀.”
잠든 무혁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분명 가짜 결혼인데, 어쩐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무혁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냥 동거인, 룸메이트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여겼는데.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무혁과 달리 민재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저, 석민재 씨.”
“네?”
딴생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누군가 민재를 찾았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분명 아래층에서 일하는 4년차 법무사였다.
일 때문인가 싶어 긴장했는데 상대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거 받아주세요.”
그는 비둘기가 그려진 봉투 하나를 건네주고 갔다.
봉투를 열자 연분홍색 편지지에는 동글동글하게 귀여운 글씨체로 구구절절 편지가 쓰여 있었다.
[그동안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제 마음을 이렇게라도 전하고 싶어 편지를 드립니다.]
“저 사람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민재 씨가 결혼한단 소식이 어지간히도 슬펐나 보네.”
“그만 놀려.”
“벌써 네 명째인가?”
이 회사에 근무하면서 이런 걸 받아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예전부터 좋아했다며, 구구절절 쏟아지는 사연들도 다들 제각각이지만 마무리는 항상 같았다.
[부디 행복하세요.]
축복보다는 오히려 저주에 가깝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민재는 그간 받은 편지들을 펼쳐놓고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선배랑 내가 같이 있으면 불행해 보여?”
“앞으로 가시밭길이 눈에 선해서 그런 거겠지.”
조원식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이상 아마 쉽게 넘어가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어째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나쁜 자식들!”
때마침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안 팀장이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팀장님.”
“석민재. 지금 당장 회의 좀 소집해. 비상이야.”
안 팀장은 설명 대신 손에 들린 신문을 내밀었다.
[혜성 그룹 성 회장, 중태.]
분명 소영하가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준범이 형이란 사람, 그 사람이 성 회장의 장남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 진무혁은 됐어. 따로 연락 주기로 했으니까 전화 안 해도 돼.”
“네. 팀장님.”
무혁은 대체 어제부터 뭐가 그리 바쁜 걸까.
어쩌면 민재가 함께 있는 게 불편해 일부러 안 들어오는 걸지도 모른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같이 살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괜히 속이 상해서 민재는 입술만 삐죽 내밀고 말았다.
***
“오늘 혜성 쪽 기사가 나갈 거야.”
본격적인 혜성 상속 전쟁에 막이 올랐다.
무혁은 친구 용식의 사무실에 들러 부탁한 자료를 건네받았다.
“부탁한 거 여기. 쭉 훑어봐.”
불륜 현장 꽁무니나 따라다닌 것 치고, 용식은 생각보다 유능했다.
그동안 HS엔터와 소영하의 활동을 훑어보며 무혁은 긴 하품을 내쉬었다.
“웬일로 밤샘까지 하고. 신혼 주제에 벌써 집에 들어가기 싫어진 거냐?”
“그럴 리가 있나.”
짓궂은 농담에 정색하고 받아치면서도 무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집에 들어갈 수 없는 데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다.
‘설마 집에 가란 소리를 할까 봐 자는 척까지 하게 될 줄이야.’
잠시 생각이나 할까 싶어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오해받은 김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선배, 자요?
어찌 나오려나 싶었던 석민재는 역시나 예상대로 온 힘을 다해 낑낑대며 기어코 그를 제 침대에 눕혀주기까지 했다.
‘착해 빠져서는.’
냉정한 듯하면서도 마음 약한 여자다. 소영하는 분명 그 점을 똑똑히 잘 알고 있었다.
무릎까지 꿇고 빌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마 그날 밤 자신이 보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물러 터진 석민재는 또 그 남자를 용서하고 제 집에 들였을 것이다.
“소영하가 연기는 참 잘하던데.”
“그렇지? 몇 년 사이 연기가 많이 늘었더라고. 반짝하고 사라질 줄 알았는데 말야.”
집 안 구석구석 제 흔적을 남겨놓은 것만 봐도 괜히 속이 뒤틀렸다.
그래서 일부러 심술을 부렸다.
무혁에게 침대를 내주고서 민재는 기어코 방에 들어오지 않고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불이 꺼지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무혁은 어둠 속에 숨어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민재는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자면 허리 아플 텐데.’
안아서 옮길까 잠시 고민했지만, 괜히 또 잔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무혁은 담요를 고쳐 덮어주고서 곁에 앉아 잠든 얼굴을 잠자코 바라봤다.
‘석민재, 널 대체 어쩌면 좋을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고서 무혁은 엄지로 민재의 입술을 장난스레 만지작거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부드러운 입술 새로 따뜻한 숨결이 묻어났다.
“무슨 사춘기도 아니고. 같이 살겠다고 그렇게 조를 땐 언제고 한 지붕 아래에 들어오니 빼는 건 뭐냐?”
“시끄러워.”
그곳에 그냥 뒀다가는 언제 또 소영하와 마주칠지 모른다.
집에 데려온 걸 후회하진 않지만, 용식의 놀림처럼 막상 민재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제 모습이 낯설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지.”
아마 지금쯤이면 짐 정리도 모두 마쳤을 테니까.
어제도 피곤했던 건지 무혁이 집에 들어갔을 때, 민재는 이미 곯아떨어진 후였다.
가만히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마 밤이 새도록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서.
문 너머에 민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들떴다.
“성준범이 맡고 엔터 쪽도 거의 다 말아먹은 걸 소영하 하나 살려서 겨우 다시 띄웠으니까. 그렇게 귀여워하는 것도 이해는 가.”
“그래서 그렇게 보호한 모양이네.”
“그러니까. 이번에 스캔들 난 것도 어떻게든 돈으로 해결했다더라고.”
승계를 앞둔 중요한 시점에, 최고로 공을 들인 소영하의 이름에 흠집이 가는 건 저쪽도 용납하지 못한단 거다.
그러니 설령 물리더라도, 일반인인 민재만 피를 보게 될 게 뻔한 싸움이다.
사적인 원한을 담뿍 담아 무혁은 마지막 장에 첨부된 소영하의 사진을 힘껏 구겨버렸다.
“됐어. 그쪽은 거기까지만 해둬.”
“그래서, 대체 네 클라이언트가 누군데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사정을 모르는 용식을 힐끔 보고서 무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엠바고(보도 금지)가 풀리고 곧 뉴스 헤드라인에 성 회장의 기사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쪽은 진작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이제 무혁 쪽도 본격적으로 나설 차례가 됐다.
“진 변호사님. 슬슬 출발하셔야 합니다.”
용식의 사무실 문 밖에서 누군가가 무혁을 찾았다.
“뭐야, A&Z에서 기사도 보낸 거야?”
“그건 아니고.”
조조와 손잡은 장남을 무찌르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혜성의 안주인.
성 회장의 부인은 장남의 목을 조르기 위해 직접 차까지 보내 무혁을 불러들였다.
“오늘은 집에 일찍 가야 하니까, 서둘러야지.”
민재를 계속 혼자 뒀다간 또 어떤 놈이 손을 댈지 모른다.
다 구겨진 소영하의 사진을 꽉 쥐고서 무혁은 서류를 챙겨 길을 나섰다.
***
“다녀왔습니다.”
무혁이 사무실에 돌아오니 벌써 오후 네 시가 넘을 즈음이었다.
두 시간이 넘는 회의가 이어지며 내부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이번 일 때문에 불평하는 클라이언트가 한둘이 아니에요.”
“안 그래도 잘못 물렸다고 벌써 소문이 자자한데, 하루아침에 그 개싸움에 또 올라타자고요?”
상속 전문 시니어 변호사들의 반응은 특히나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문밖에 다 들리는 호통 소리를 들으며 민재가 무혁을 맞이했다.
“선배.”
“안 팀장님은?”
회의실 안에 있다고. 반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무혁이 보이니 안 팀장은 버선발로 달려나와 그를 반겼다.
“아니, 이게 누구야. 마침 잘 왔네. 이제 진무혁, 네가 들어 와서 설명 좀 해봐.”
사실상 혼자 폭격을 모조리 맞서고 있던 안 팀장은 무혁을 보자마자 냉큼 바통을 넘기고 물러났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사무실 분위기를 보며 무혁은 아예 재킷까지 벗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것 좀 부탁해.”
“괜찮아요?”
“괜찮아.”
양복 재킷과 가방을 받아들고서 민재는 서류봉투만 들고 회의실로 향하는 무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가 실컷 당할 때는 가만히 있더니. 진무혁은 걱정되나 보지?”
“제가 뭘요.”
딱히 그런 건 아니라고 부정해보지만 어째 고개를 들기가 민망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저 녀석도 나도 안 되는 판에 끼어든 건 아니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회의실 문이 닫힌 후에야 민재는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겨우 들을 수 있었다.
“혜성 장남이 HS엔터를 쥐고 있는 건, 알지?”
“그건 모를 수가 없죠.”
당사자에게 제대로 물을 먹은 덕분에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다.
치를 떠는 민재를 보며 안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그 장남이, 실은 성 회장의 친자식이 아니거든.”
“네?”
성준범이 혜성가에 들어가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약 삼십 년 전.
아들이 없던 성 회장은 먼 친척인 준범을 데려다 양자로 삼고 후계자 교육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입양까지 해서 장남이라고 번드르르한 이름값은 달고 있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란 모양이야.”
“다른 자식은요?”
“있지. 정확히는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아마 민재 씨 또래는 잘 모르겠구나, 혜성 그룹 유괴사건 말이야.”
삼십 년 전, 성 회장은 당시 꽤 늦은 나이에 결혼해 부인과의 사이에서 첫 자식을 얻었다.
“아들인지 딸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갓난아기가 덜컥 사라져 버린 거야.”
하늘 위로 사라진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그야말로 행방불명이라, 성 회장 부부는 이를 유괴라 판단해 범인의 연락만을 노심초사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넘도록 범인은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아이의 행방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판단을 잘못한 거야. 차라리 처음부터 제대로 수색을 하는 게 나았을 텐데 말이지.”
“그럼 그 아기는…….”
“못 찾았지. 그때는 지금처럼 카메라는커녕 핸드폰도 없을 때인데, 갓난아기를 무슨 수로 찾겠어.”
이미 해외로 입양이 갔다느니 죽었다느니 여러 소문만 파다했다.
혜성 내부에서도 막대한 노력을 퍼부어 아이를 찾고자 했지만, 어디에서도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성준범을 데려온 건가요?”
“자식을 잃는다는 게, 그렇게 돈 많은 사람한테도 힘든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더라고.”
아이를 잃어버린 성 회장의 아내는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늦은 나이에 만난 아내를 퍽 사랑한 탓에 성 회장은 새로 자식을 얻는 것을 포기했다.
“문제는 성준범이 혜성 가에 들어온 게 여덟 살, 그러니까 알 만한 건 다 알 나이였단 거지.”
대신 그는 친척을 데려다 아들로 삼고 본격적인 승계작업에 들어갔다.
장차 그룹을 물려줄 거라며 성 회장은 준범을 무척 아꼈다고 했다.
“회장님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모님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사모님이라면…….”
“그래. 그 양반이 또 아주 대단한 양반이지.”
안 팀장이 이 사건을 수임할 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능히 알 수 있었다지만, 무혁의 ‘의뢰인’은 민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엄청난 사람이었다.
“수정일보 사장의 언니이자 그룹 전체 지분의 삼십 퍼센트를 쥐고 계시는 혜성의 안주인이시지.”
그거라면 민재도 분명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른바 신흥 언론 재벌이라고 불리는 수정일보는 종편 방송국인 CBC부터 영화관 프렌차이즈인 수정시네마까지.
사실상 HS엔터 다음으로 규모가 큰 미디어 그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니는 사랑에 눈이 멀어 혜성 가에 시집갔다 그 꼴이 났으니까. 하나 있는 여동생이 또 아주 성질이 대단한 사람이거든.”
지분싸움도 하지 않고 동생에게 모두 양보해준 언니가 자식을 잃고 반폐인이 됐다.
자기 대에 재벌 소리까지 듣게 회사를 키울 만큼 능력 좋은 여동생에게 있어, 언니인 혜성 사모님은 그야말로 아픈 손가락인 셈이다.
“문제는 사모님과 성준범의 사이가, 거의 원수나 다름없다는 거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