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운수 좋은 날.
민재가 들어간 후에도 무혁은 차의 시동도 걸지 않은 채 묵묵히 현관 쪽을 바라봤다.
“모른단 말이지.”
연고가 없는 갓난아기였던 탓에, 민재는 서류상 엄연한 친자식이었다.
그러니 평생 숨기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을 테지만, 민재의 외가가 그 판을 모두 깨버렸다.
줄곧 숨겨온 사정에 대해서는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씁쓸했다.
‘고작 그런 이유였단 말이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민재는 쥐어짜듯 이별을 고했다.
그 순간만은 지금도 무혁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 헤어져 주세요.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석민재를 궁지로 몰아넣은 게 누구인지도 무혁이 더 잘 알고 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니 통화 좀 하자꾸나.]
조원식에게 온 메시지는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아예 화면을 꺼버리고서 무혁은 핸들에 팔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그 대단하신 조 대표께서 제게 이토록 저자세로 구는 이유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와서 우스워지기 싫은 거겠지.’
조원식은 몇 년 전부터 일찌감치 일선에서 물러나 무혁을 사위로 삼아, 제 모든 걸 물려주겠노라 호언장담해왔다.
그 판을 엎어버렸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예상치 못한 선공에 저쪽도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렇다고 석민재를 얽은 건 완전한 판단 미스다.
“그러게 함부로 건드리지 마셨어야지.”
핸들 위에 걸친 손가락을 까딱이며 무혁은 못마땅한 얼굴로 창문 쪽을 바라봤다.
매번 민재를 배웅하며 지켜봐 왔다.
분명 지금쯤이면 방의 불이 켜지고도 남을 시간이건만, 어쩐지 오늘따라 방 안은 어둠이 가득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설마 싶어 차에서 내리는데 마침 민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지금 뭐 하잔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혁은 한걸음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석민재!”
“이거 놔!!”
무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민재는 제게 달려드는 남자를 뿌리쳤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낯선 남자를 뒤로하고 민재는 서둘러 무혁의 곁에 다가섰다.
“선배.”
겁에 질린 눈망울, 숨죽인 목소리에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겁먹은 민재의 앞을 막고서 무혁은 오렌지빛 조명 아래에 선 남자를 훑어봤다.
분명 낯이 익었다.
한국에 들어온 뒤로는 정말로 지겹게도 마주해야만 했던 바로 그 얼굴이다.
“난 또 누군가 했네. 우린 초면이죠?”
굳이 자기소개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그는 무혁에게 먼저 악수까지 청했다.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은 TV나 광고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반반하다.
모자 끝을 슬쩍 들고서 소영하는 여유롭게 미소를 흘렸다.
“내 약혼녀에게 무슨 용무입니까. 소영하 씨.”
또박또박하게 울리는 무혁의 목소리가 아파트 통로에 가득 울렸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모습에, 소영하는 황당하다는 듯 뒷목을 잡고서 혀를 찼다.
“이봐요. 민재한테 무슨 사주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적당히 하죠?”
다 안다는 것처럼 소영하는 히죽거리지만, 무혁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민재의 손을 꽉 잡았다.
“아니면 뭐, 설마 민재 네가 정말 양다리라도 걸치고 있었단 거야?”
적반하장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걸지도 모른다.
분명히 이 일로 제일 피해를 본 건 분명 석민재인데, 소영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이 모든 화살을 민재에게 돌렸다.
“일 때문에 내가 잠시 소홀했기로서니, 이런 식으로 바람을 피우면 곤란해.”
“바람이라니, 그게 무슨!”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할 때는 언제고. 금세 이런 식으로 남자를 갈아치워?”
호되게 몰아치는 말에 가시가 가득 돋았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무혁이 나서보지만 소영하는 본체만체하며 코웃음만 쳤다.
“제삼자는 그만 빠지시지? 이건 나와 민재가 해결할 문제니까.”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번 조 대표의 일도, 소영하의 일도 결국은 민재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무혁은 곁에 선 민재를 힐끔 보며 입을 닫았다.
여전히 저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라면, 아니 적어도 이대로는 곤란하다.
과연 누구를 선택할 건지 결정은 민재의 몫이 됐다.
***
“제삼자는 그만 빠지시지? 이건 나와 민재가 해결할 문제니까.”
자신만만한 소영하의 미소를 보며 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대놓고 무혁을 무시하는 꼴을 보니 드넓은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아마 오늘 진무혁의 뒤에 숨어 이 상황을 넘기게 되더라도 분명 또 이런 일이 반복될 게 뻔하다.
‘이대로는 안 돼.’
잠깐의 여지만 줘도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저 남자의 속성은 민재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제삼자가 아니면 어쩔 건데?”
어디 한 번 갈 데까지 가보라지.
만약 저쪽이 주먹을 쓴다고 해도 바로 옆에 진무혁이 변호사인데 뭐가 무서울까.
“일방적으로 결혼을 깬 주제에 참 뻔뻔해. 내 사정을 뻔히 다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
무혁의 손을 꼭 잡은 채 민재는 침착하게 맞섰다.
예상치 못한 반박에 당황한 건지 소영하는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사정이 있길래?”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민재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할머니에 대해 지겹도록 읊어댄 것도 모자라 시간이 없다며 구차하게 매달리기까지 했었다.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결혼을 서둘렀던 기억은 온데간데없는 건지 소영하는 적반하장으로 민재에게 따지고 들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다 해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너희 잘난 이사님께 일러바쳤니? 날 잘라버리라고?”
아마 소영하라면 제 회사에서 그런 짓을 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민재는 더욱 소영하를 놓을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도 사실은 모두 다 알고 있었던 주제에.
얼음처럼 냉담한 목소리에 그제야 소영하의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민재야, 그건…….”
“어리광도 적당히 좀 부려.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니까.”
연예인이니까. 애인이니까. 언제나 그런 핑계를 대는 소영하의 엄마 노릇을 하는 것도 이젠 정말 끔찍하다.
그러니 이 악연도 이제는 그만 막을 내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할 거니까 똑똑히 새겨들어. 당신이랑은 완전히 끝이야.”
혜성과 소송 얘기까지 나오며 이쪽은 밥줄이 끊길 공포에 시달렸건만, 저따위 투정질을 받아줄 여유가 없다.
단호한 민재를 앞에 두고 소영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화 많이 났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서, 소영하는 굵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민재에게 매달렸다.
“나 버리지 마, 민재야. 내가 잘못했어.”
두 사람의 싸움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또 속아달라는 듯 유치하게 우는 척이나 하는 꼬락서니를 앞에 두고 두 번 다시 당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네가 해달라는 건 뭐든 다 해줄게. 그러니까 이제 화 풀어.”
하다못해 짐승도 학습이라는 걸 하는데, 한 번 속는 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두 번 속는 건 지능의 문제다.
민재는 작정하고 가방 안에서 미리 준비해둔 무기를 꺼내 들었다.
“계속 이따위로 굴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그건…….”
한발 앞선 민재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 반질반질한 명함이 반짝였다.
“스타커넥트 김영룡 기자가 찾아왔더라. 내가 직접 제보하면 저쪽에서도 기사를 안 내곤 못 배기겠지. 안 그래?”
김영룡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소영하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욱해서 힘을 쓰려고 해도 민재의 뒤에는 무혁이 있다.
자칫 몸싸움을 일으켜 경찰이라도 오게 된다면, 연예인인 소영하 쪽이 훨씬 더 곤란하다.
“진심이야?”
“어차피 난 더 잃을 게 없어.”
그것만큼은 진심이다.
진심으로 기뻐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민재도 이 썩어버린 연애에 더는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꺼져. 다시는 나타나지 마.”
입술을 씹으며 소영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민재를 노려봤다.
그동안 수없이 바뀌던 과장된 표정이 모두 연기였다면, 저 불퉁한 얼굴이 아마 그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구질구질한 미련 한 조각을 남기고서 소영하는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즈음에야 민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긴장이 풀린 탓에 덩달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민재를 무혁이 세워 일으켰다.
왜 이 남자 앞에서는 번번이 이런 꼴만 보이게 되는 걸까.
“와줘서 고마워요.”
민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맙다는 인사부터 전했다.
그런데 무혁은 민재를 보며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고마우면 커피나 한 잔 주던가.”
아까부터 줄곧 하던 커피 타령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창밖으로 소영하의 차가 떠나는 것까지 확인하고서도 무혁은 좀처럼 집에 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안 가요?”
“이 시간에 혼자 카페에 갈 수는 없잖아.”
24시간 카페가 널리고 널린 서울 바닥에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아무래도 곱게 돌려보내기는 그른 모양이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봐요.”
무혁의 시위에 결국 민재가 백기를 들었다.
***
경쾌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건…….”
현관 등이 켜지자마자 무혁의 눈에 소영하의 등신대가 눈에 들어왔다.
“갖다 버릴 거예요. 내버려 둬요.”
허리를 부러트린 꼬락서니만 보아도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을 테지만.
좀 더 일찍 내다 버리지 못한 후회가 밀려왔다.
“정말로 기자한테 연락할 생각이었어?”
신발을 벗으며 무혁은 아까 일에 관해 물었다.
“내가 미쳤어요? 그냥 쇼한 거지.”
아침에 급하게 뛰어나가는 통에 집 안은 온통 엉망진창이다.
원래도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거실은 차마 발 디딜 틈이 없다.
이래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다시 집에 가라고 내쫓을 수는 없다.
“그냥 내 방에 들어가 있어요.”
무혁은 대충 제 방에 데려다 놓고서 민재는 부랴부랴 주방에 달려가 물부터 올렸다.
“자요.”
“잘 마실게.”
물만 대충 끓여 부랴부랴 내온 티백 커피에도 무혁은 반갑게 잔을 받아들었다.
오늘따라 정말 못 보일 꼴만 연달아 보이는 것 같아 민망함이 앞섰다.
“난 거실에서 짐 싸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마셔요.”
진무혁을 마주할 면목이 없어서 민재는 거실로 돌아와 쓰레기봉투부터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방 안 곳곳에 남은 소영하의 흔적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나쁜 자식.”
이미 두 동강 난 소영하의 등신대는 한 번 더 부숴버렸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몇 번이나 오간 후에야 거실 소파 위에도 드디어 공간이 생겼다.
“어차피 다른 건 다 있으니까.”
어지간한 건 다 있는 그 집에 준비해 갈 건 화장품과 옷가지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어째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침실 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선배?”
옷가지를 가지러 간 김에 침실 문을 열어보니 무혁은 침대에 기댄 채 어느새 잠이 들었다.
텅 빈 커피잔을 보니 카페인도 충분히 들어갔을 텐데.
그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겠지.”
원래도 일 때문에 바쁜 데다, 온종일 할머니에게 시달린 것도 모자라 소영하까지 마주쳤다.
커피까지 마시고도 이렇게 피곤해하는데 억지로 차를 몰게 했다가는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선배. 일어나요.”
잠자코 보고 있자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판이라, 계속 이렇게 보고 있다간 정말 밤을 새울 것 같다.
아무래도 이대로 돌려보내는 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니까.
이대로 재울 거라면 제대로 눕혀서 재우기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많이 피곤했던 건지 축 늘어진 몸을 흔들어봐도 무혁은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어떡하지.”
어쩔 수 없이 민재는 그의 어깨에 팔을 넣고서 어떻게든 일으켜보려 애를 썼다.
워낙 체구가 큰 탓에 혼자서는 제대로 눕히기조차 쉽지 않다.
“옆으로 조금만, 그래. 잘했어요.”
대체 뭘 먹고 이렇게 잘 자란 건지. 자세 하나 바꾸는 데도 너무나 힘이 들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무혁을 침대 위에 눕히고 나니 벌써 온몸에 땀까지 났다.
“민재야.”
실컷 눕혀놓고 나니 뒤늦게 무혁이 잠에서 깨버렸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요. 재킷은 구겨지니까 벗고요.”
신세를 진 입장에 야박하게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민재는 어차피 일어난 김에 무혁의 옷도 벗기고 새 칫솔까지 들려줬다.
“난 아직 정리할 게 남았으니까 편하게 누워서 자요.”
“벌써 치웠네. 아까 그거.”
화장실에 가던 중 그의 시선이 현관을 향했다.
잘 묻어둔 치부를 다시 들킨 것 같아서 민재는 괜히 무뚝뚝하게 얼버무렸다.
“내가 좋아서 갖다 놓은 거 아니에요.”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쩐지 죄인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무혁이 화장실에 들어가고 민재는 혼자 거실에 남아 고민에 빠졌다.
만약 무혁을 침실에서 재우게 된다면 정작 민재가 잘 곳이 없다.
“그렇다고 같이 잘 수는 없잖아.”
무혁이 벗어둔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민재는 구깃구깃한 소파에 담요를 가져왔다.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이 이렇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오늘은 참 운수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