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얌전히 내 무릎에 앉아.
로펌에서 일하면서 민재는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모든 상황에는 그에 대처하기 위한 매뉴얼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다는 것도 배웠다.
조원식은 언제나 그런 ‘예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방 안에는 조원식과 변호사 몇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서류가 눈에 띄였다.
슬쩍 훑어보니 분명 오늘 아침 민재가 직접 퀵으로 보냈던 HS엔터의 소송 자료였다.
“안 팀장님은 현재 자리에 없으십니다만,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는지 알려주시면 전달하겠습니다.”
“우리, 구면인 것 같은데.”
가장 상석에 앉은 조 대표가 직접 민재에게 말을 걸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을 주위에 가득 세워둔 그는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에 선 민재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라고 해야겠지.”
“정말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네요.”
진무혁의 일로 자신을 찾아왔을 때나 지금이나 조 대표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떠올라 속이 쓰려서 민재는 이를 악물고 애써 태연한 가면을 썼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근본 없는 출신치고는 재주가 좋구먼.”
조 대표는 품에 든 사진을 꺼내 민재의 눈앞에 내밀었다.
기자가 가져왔던 소영하와 민재의 사진은 어느새 조 대표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소영하에 무혁이 놈까지. 사내들 홀리는 재주를 보니 안 팀장도 그렇게 홀린 건가?”
“그 얘기를 하러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대답할 가치가 없는 무례한 발언에 민재도 차갑게 응대했다.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틈을 보이지 않자 조 대표는 어깨를 으쓱하며 업무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럴 리가. 우린 어디까지나 혜성을 대리해서 온 것을.”
조 대표가 자리에 앉고 곧 곁에 앉은 젊은 변호사가 서류를 들이밀었다.
눈에 익은 서류에는 HS엔터 측의 요구사항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A&Z쪽 부주의로 HS엔터는 새 영화 개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습니다. 이에 이번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물론 손해 배상 역시 요구하는 바입니다.”
앞의 내용이야 기존에 있던 내용이지만 밑에 적힌 손해배상액의 규모는 민재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이건.”
“듣자 듣자 하니 도가 지나치시네요.”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이어지고 결국 보다 못한 문성희 변호사가 개입했다.
하지만 조 대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되려 반갑다는 듯 미소로 맞이했다.
“문성희 변호사는 오랜만이군.”
“조 대표님!”
“아버님은 잘 계시나?”
정·재계 내에서도 발이 넓으니 한 다리를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라, 문 변호사도 아버지를 걸고넘어지니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요.”
그러니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눈치 빠른 문 변이 자리를 비우고 민재는 홀로 조원식과 맞섰다.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조조의 대표, 전직 한국변호사협회장.
적어도 이 바닥에서는 대통령보다 나은 권력을 누리는 상대다.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 없는 이 상황을 마주하고서 민재는 주먹을 거머쥐었다.
‘이건 내 싸움이야.’
소영하와의 일조차 HS엔터는 ‘이쪽의 과실’이라고 몰아갈 속셈이 만만하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사진 속에서 이죽거리고 있는 소영하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아무리 민재 개인의 탓으로 우긴다고 해도 지금 나온 배상액은 현실적으로 성립될 리가 없다.
알 만한 사람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두는 데는 다 그에 대한 계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열한 조원식은 히죽 웃으며 민재를 마주했다.
“우리 요구는 단 하나,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를 해고하는 것뿐이야.”
그러면 배상 건은 물론 원래 계약을 해지한 위약금까지 모두 지불하겠다고.
미리 준비한 약정서를 문 변호사 앞에 들이밀었다.
“당사자라니…….”
문 변호사는 곤란한 눈으로 민재를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물러나게 된다면 직장을 잃는 건 물론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도망칠 구멍 없이 사람의 숨통을 조여버리는, 조 대표의 패턴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제가 그만두지 않는다면요?”
“그렇다면 바로 소송으로 가야지. 혜성과 A&Z의 소송이면 한동안 떠들썩하겠군.”
아무리 A&Z가 날고 긴다 해도 고객사가 직접 과실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면 구설수는 불가피하다.
설령 그게 거짓이라도, 한 번 퍼져나간 소문은 절대 주워 담을 수 없다.
나중에 근거가 부족해 소송을 취하하게 되더라도 이 일은 두고두고 남아 A&Z의 오점으로 남게 될 터.
“할 거면 해보시던가. 우리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니까.”
벌컥 문이 열리고 안 팀장이 걸어 들어왔다.
다들 조원식 대표의 눈치만 보고 있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자기 할 말을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안 팀장 정도다.
그는 쌓인 서류 더미를 힐끔 보고서 위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건…….”
소영하와 나란히 찍힌 사진이 안 팀장 손에 들어갔다.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치부가 끝까지 민재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안 팀장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대로 사진을 조 대표의 앞에 던졌다.
“소송 관련해 알아볼 게 있어서 내가 직접 지시했던 건데. 지금 이걸 증거랍시고 들고 온 겁니까?”
민재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안 팀장은 되려 코웃음을 쳤다.
“어디 해봅시다. 우리라고 마냥 손만 놓고 있는 건 아니니까.”
어느새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고, 진무혁은 한 마리의 사자처럼 복도를 유유히 걸어왔다.
양복 오른쪽 칼라에서 빛나는 변호사 배지와 커프스 버튼까지.
“이번 일 정리하며 우리 TF팀에 들어온 파트너 변호사, 진무혁입니다.”
여유롭게 관망하던 조 대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검사복을 벗은 진무혁은 조 대표를 등지고서 A&Z에 당당히 입성했다.
복수의 향기는 언제나 감미로운 법, 오랜 세월 발톱을 감춰온 무혁에게도 예외는 없다.
양아들처럼 아끼고 있노라 공언했던 이가 제게서 등을 돌렸으니, 천하의 조 대표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쓸데없는 짓을.”
“쓸데없는 짓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요.”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내지르고서 무혁은 성큼 걸어 들어와 민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보란 듯이 선을 긋는 젊은 사자는 늙은 사자의 앞에서 제 영역을 분명히 드러냈다.
“제 약혼녀를 앞에 두고 쓸데없는 말씀이 기시더군요.”
“약혼?”
민재를 보는 조 대표의 눈에 경멸이 서렸다.
그것만으로도 무혁이 굳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가 명백해졌다.
‘이래서였구나.’
처음 민재를 찾아왔을 때도 조 대표는 저런 눈으로 민재를 바라봤었다.
이별을 종용하며 그는 민재의 가장 아픈 상처를 매섭게 후벼팠다.
- 무혁이 놈이 다 알게 되어도 괜찮은가 보군.
- 제발 말하지 마세요.
비굴했던 과거가 떠올라 손이 떨렸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 일이 당시의 민재에게는 죽는 것보다 더욱 끔찍한 공포였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근본 없는 년이 감히.”
“조 대표님!”
안 팀장이 언성을 높여 보지만 이미 늦었다.
주변의 시선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조 대표는 나란히 선 민재와 무혁에게 악담을 쏟아부었다.
“이런 걸 못 놓는 너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끝까지 가보겠단 말로 알아듣겠습니다.”
“고얀 것.”
조 대표의 손이 무혁의 뺨을 후려갈겼다. 비틀대는 그를 민재가 곁에 서 부축했다.
“선배!”
“가자.”
조 대표가 방을 박차고 나서자 뒤따라 온 변호사들도 함께 자리를 떠났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이 떠난 자리에는 흩뿌려진 서류만이 가득하다.
방 안의 공기가 더없이 무거워졌다.
“안 팀장, 아까 그건 대체…….”
“어디 재밌는 구경이라도 났나? 다들 일이나 하지.”
문 변이 속사정을 떠보려 했지만, 칼 같이 거절당했다.
불청객도 떠났으니, 모여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뿔뿔이 흩어졌다.
“한 시간 안에 정리하고 올라와. 혜성 건으로 회의할 거니까.”
“네, 팀장님.”
보다 못한 안 팀장도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고, 민재는 흐트러진 서류들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등 뒤로 무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일부러 말 안 한 거 아니에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목이 멨다.
엉망이 된 서류를 주워들고서 민재는 무혁을 마주했다.
“석민재.”
민재가 무혁을 떠나야 했던 진짜 이유가 떠올랐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 결혼이 진짜가 아니라서.
비참함이 끓어올라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
- 부모가 누군지도 모를 근본 없는 년이.
조 대표의 말을 듣고 나니, 외삼촌도 분명 제게 그런 말을 했었다.
제 부모를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길러준 제 누이마저 잡아먹었다며.
원망하던 외삼촌의 얼굴은 지금도 생생했다.
“십 년이 넘게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그래서 절 데려왔었대요.”
가능한 방법은 모두 동원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민재의 부모님은 그렇게 어린 아기였던 민재를 입양했다.
“엄마는 결혼하기 전부터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셨어요. 불임 치료를 받으면서도 계속하셨는데, 그때 마침 제가 들어왔었다고 해요.”
비록 제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 해도 엄마는 친자식처럼 민재를 아꼈다.
그런 부모님의 그늘이 사라진 순간 민재에게도 지옥 같은 나날이 시작됐다.
“언제 버려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할머니는 그런 절 진짜 친손녀보다도 더 아껴주셨어요.”
어쩌면 조 대표의 말이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받을 자격 하나 없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를 근본 없는 제게 할머니는 유일한 가족이자 버팀목이 되어줬다.
“그런 할머니를 안심시킬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렇다 해도 좋아했던 남자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조원식의 요구대로 무혁의 앞에서 모습을 감추던 순간조차도, 이 치부만은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고작 그런 이유였단 말이지.”
“네?”
“네가 날 떠났던 이유가 고작 그런 거였냐고 물었어.”
책망하는 무혁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슨 문제가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올리며 민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해요. 어차피 우리 계약에서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조원식의 반응을 보고 뼈저리게 깨달았다.
조 대표가 완벽하게 키워온 진무혁에게 있어 석민재는 과거의 망령 같은 오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민재가 나락으로 치달을수록, 제 복수는 더욱 완벽해질 테니까.
굳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이런 거였을 줄이야.
다른 여자는 안 된다던 그의 말이 더욱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래. 상관없는 일이지.”
민재의 치부조차도 괘념치 않겠노라고, 그리 말하는 무혁의 뺨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얼마나 매섭게 때린 건지. 민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다친 그의 상처를 살폈다.
“약을 발라야 할 것 같아요.”
“네가 발라줘.”
“구급상자를 빌려올게요.”
진무혁을 앞에 앉혀두고서 민재는 손톱에 긁힌 자국에 소독약부터 발랐다.
굳이 다른 말도 하지 않고서 무혁은 아예 눈까지 감고 모든 치료를 민재에게 맡겼다.
“일부러 맞은 거죠.”
“조조 대신 A&Z에 입성하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 소문이 더 잘 퍼질 테니까.”
기꺼이 제 어깨를 감싸던 손길마저도 조 대표를 향한 적의가 가득했다.
결혼 상대로 그의 딸이 아닌 민재를 고른 것도 모자라, 사실상 라이벌인 A&Z에 발을 들였다.
“대체 어디까지 계산한 거예요?”
조원식을 분노하게 하는 데 있어 A&Z의 직원인 석민재는 무혁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가 된 셈이다.
“계산이라.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밴드를 붙이는 민재의 손을 꽉 잡고서 무혁은 진중한 눈으로 민재를 마주했다.
마치 진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깊은 눈빛을 머금은 채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제 뺨 위에 얹었다.
“왜 이래요?”
“쉿.”
창밖을 힐끔 보는 그의 시선에 누군가 엿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계약은 계약이니 민재는 어쩔 수 없이 무혁의 뜻에 따라 장단을 맞췄다.
“얌전히 내 무릎에 앉아. 소리 내지 말고.”
“정말 A&Z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와 같은 회사에서 생활하게 된다면 언제 또 이런 보여주기식 애정행각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
곤란한 민재를 제 무릎에 앉히고서 무혁은 장난 섞인 얼굴로 히죽 웃었다.
“나야 손해 볼 것 없지.”
“선배!”
다친 상처를 들이미는 무혁의 요구에 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제 상사까지 구워삶은 이 능구렁이는 곤란한 민재의 상황조차 제 이익을 위해 철저히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계속 이러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계약은 철저히 이행해야지. 안 그래?”
실루엣을 보니 문성희 변호사가 확실하다.
아까 곤란한 사정을 모두 내보이고 말았으니, 다른 말이 떠돌지 않게 하려면 소문은 소문으로 덮는 수밖에 없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걸 실천하는 건 어렵다.
하는 수 없다. 민재는 두 눈을 딱 감고서 무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어머, 대박! 어떡해!!”
한심한 비명과 함께 문 변호사의 구둣발 소리가 멀리 사라져 갔다.
대체 이런 게 뭐가 재밌다는 건지. 무혁은 제 무릎에 걸터앉은 민재의 허리를 안고서 히죽 웃었다.
“봤지?”
모든 게 제 덕이라는 듯, 뻔뻔하기만 한 진무혁이 너무나 얄미워 견딜 수 없다.
“됐네요!”
민재는 냉큼 그를 밀어버리고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