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알았으니까 그 손 좀 놓지?
“일단 앉지”
무혁을 보고도 민재 외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불편한 자리라 식사가 시작되어도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 건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다.
잔뜩 긴장한 민재와 달리 무혁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태연히 식사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진무혁이 네놈이 결혼할 거라는 처자가 우리 식구란 말이지?”
아까 무슨 범인 취급하듯 추궁할 때는 언제고 안 대표의 태도가 종잇장 뒤집듯 바뀌었다.
계약을 말아먹었다며 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안 대표는 되려 민재를 싸고 돌며 날을 세웠다.
“대표님 식구가 아니라 제 식굽니다.”
무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안 팀장이 제 아버지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뭐라고?”
“이번 일은 혜성에서 잘못한 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안 팀장이 민재의 억울함을 대신 항변했지만, 안 대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코웃음만 쳤다.
“오죽 못했으면 그랬을까?”
“그러는 대표님이야말로 은퇴하셨으면 제발 좀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세요.”
“이런 고얀 놈!”
식사 중에도 부자는 여전히 투덕거리기 바빴다.
안 팀장이 신나게 소란을 피우는 틈에 민재는 곁에 앉은 무혁을 힐끔 바라봤다.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첫 임무야.”
아무래도 무혁에게는 다 계획이 있는 모양이다.
대놓고 약혼녀 노릇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곧 두 사람만 아는 작전이 시작됐다.
진짜 사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는 민재 앞에 노골적으로 맛있는 반찬을 몰아줬다.
“많이 먹어.”
금방이라도 꿀이 떨어질 것처럼 무혁은 다정한 눈을 하고서 식사 중인 민재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 사랑해, 민재야.
마치 시간이 되돌아간 것처럼 잊고 지내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순진하게 웃던 이십 대의 진 무혁은 민재의 가슴 속에 상처로만 남았다.
너무나 예뻤던 첫사랑을 망쳐버린 건 민재 자신이었다.
“쯧, 제 색시 될 사람이라고 입이 헤벌쭉 찢어져서는. 자기들끼리 살림을 차릴 기세로고.”
빈정대는 안 대표의 말에도 무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살림은 곧 차릴 예정입니다. 요즘 일이 많아서 밥도 잘 못 먹는데, 이렇게라도 잘 먹여야죠.”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제 발이 저린 안 팀장이 무혁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러고는 의자를 당겨 민재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석민재. 솔직하게 말해. 임신한 거야?”
“임신이라뇨?”
먹던 밥이 목에 걸려 헛기침을 쏟아낼 뻔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결혼을 서두른다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안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또 한다고 하고.”
“그건…….”
뒤늦게 변명해봐도 안 팀장은 의심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길 길이 없는데 무혁이 나서 사태를 수습했다.
“준비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든 회사는 그만두지 마.”
결혼을 핑계로 일을 그만두게 되면 곤란한 건 오히려 민재 쪽이다.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몰라 민재는 딱 잘라 상황을 정리했다.
“결혼과는 상관없이 일은 계속할 거예요.”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러는 거겠어? 꼭 도장 찍고 나면 말 바꾸는 놈들이 있으니 하는 말이지.”
안 팀장의 화살이 무혁을 향했다. 벌써 호흡을 맞춘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제는 눈만 마주쳐도 제 속을 읽는 민재를 잃기 싫은 눈치가 역력했다.
“아버지처럼 돌봐주신다더니, 정말이었나 보군요.”
“오글거리게 아버지는 무슨, 얘랑 나랑 열네 살 밖에 차이 안 나거든?”
“나잇값도 못 하는 주제에 큰소리는, 이놈아! 그 나이가 되도록 혼인도 못 한 주제에 뭐가 자랑이라고!”
아들의 푼수 짓을 보고 있던 노인은 참다못해 역정을 냈다.
나이 얘기에 안 팀장이 발끈하자 속 터진 아버지도 덩달아 열이 터졌다.
“내 나이가 어때서!”
“뭐야?!”
방심한 안 팀장 머리에 지팡이가 날아들며 이 차전이 시작됐다.
본인들은 정말 심각하기만 한데, 투덕대는 부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민재는 어째 웃음이 났다.
장난기가 많았던 아빠는 어린 민재를 데리고 꼭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다.
그러다 엄마에게 단단히 혼이 났지만, 그런 사소한 것조차 민재에게는 너무나 뼈아픈 추억이 됐다.
‘우리 부모님도 살아 계셨으면 저랬으려나.’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어째서 민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걸까.
저런 실랑이도 진짜 사이가 좋으니 할 수 있는 거다.
파혼을 당한 이후로 어쩐지 메말랐던 감정이 눅눅해졌다.
민재의 쓰린 속을 읽은 건지 안 팀장은 주눅이 든 민재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뭐 어때. 예식장 들어갈 때는 내가 들여보내면 될걸.”
신랑·신부 입장 통로를 함께 걸어줄 일가친척 하나 없는 처지인데.
차마 말 못 할 사정을 안 팀장은 진작부터 헤아린 모양이었다.
이런 걸 보면 무심한 듯하면서 참 다정하다.
조금은 감동하기까지 했는데 무혁은 그런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저나 민재나 부모님은 공석이니, 예식 때는 동반 입장할까 합니다.”
일가친척 없는 민재야 그렇다 쳐도 무혁은 대놓고 조원식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노인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무혁을 마주했다.
“조 대표랑은 완전히 등질 셈이냐?”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안 대표 같은 거물이 무혁에게 제일 묻고 싶은 건 저 문제였을 것이다.
“그자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진로도, 결혼 상대도. 제 인생마저도.
제 모든 걸 휘두르려는 조원식의 품에서 벗어나겠노라 공언하며, 무혁은 오른쪽에 앉은 민재의 손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약지에 낀 반지를 슬쩍 쓰다듬고서 그는 곁에 앉은 민재를 지그시 바라봤다.
“더는 그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수많은 거짓말 속에서도 그것만은 진심인 모양이다.
어차피 한 배를 탄 이상 두 사람은 동지니까, 민재도 기꺼이 약혼녀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사뿐하게 손을 포개자 무혁도 그런 민재와 눈을 마주했다.
“알았으니까 그 손 좀 놓지?”
잠자코 지켜보던 안 팀장이 두 사람의 손을 매섭게 노려봤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불만인 건지, 그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민재와 무혁 사이를 갈라놓기까지 했다.
“아직 식도 안 올린 사이에 이러는 거 아니야!”
“저희는 이미 약혼까지 마쳤습니다만.”
“어허, 혼인 신고 전에는 절대 안 돼!”
노발대발한 안 팀장 귀에 무혁의 말 따위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무혁이 왜 그런 조항을 넣었던 건지 민재는 새삼 이유를 알 법도 했다.
법적인 절차를 밟아 효력이 발생하기 전에는 아예 인정조차 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그럼 혼인 신고만 하면 괜찮은 건가요?”
“뭐라고?”
그토록 아끼던 부하에게 한 방 먹은 꼴이 그리도 즐거운 건지.
아예 한술 더 뜨는 민재의 물음에 안 대표의 입에서 폭소가 터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의심을 피하기에는 충분했을 터. 무혁을 힐끔 보니 그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잘했어.’
눈빛으로 칭찬을 받은 것 같아서 민재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그의 웃음이 너무 달아서 디저트의 맛도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고 가는 사무적인 대화들을 흘려들으며 민재는 괜히 앞에 놓인 셔벗을 뒤적였다.
분명 이별을 고한 건 제 쪽이었건만 아직 해묵은 미련이 남았던 걸지도 모른다.
“다 먹었으면 슬슬 내려놔.”
무혁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졸지에 딴생각하는 걸 들켜버려서 민재는 서둘러 숟가락을 내려놨다.
“이후 내용은 두 분이 따로 나누실 말씀이 있을 테니, 민재는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그러면서 딴 길로 새지 마. 다 체크할 거야.”
평소에는 자유 방임주의였던 안 팀장이 오늘따라 과보호하는 큰오빠처럼 굴고 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긴 한데 무혁 역시 대놓고 민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제 약혼녀는 제가 알아서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체 이 둘은 어쩌다가 이런 신경전을 벌이게 된 건지.
아무래도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엉겁결에 중간에 낀 민재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원래 아는 사이라고요?”
회사로 돌아가는 길, 무혁의 차에 오른 후에야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랑 아는 사이였어.”
무혁과 안 팀장의 악연은 민재의 예상보다 훨씬 더 길었다.
그의 아버지, 진이한 검사가 살아 있던 시절부터 왕래가 있었으니 이십 년은 넘은 셈이다.
“저래 보여도 안 대표님이 마흔 넘어 얻으신 막둥이니까 사람들은 잘 몰라. 반쯤은 내놓은 자식이거든.”
어쩐지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제법 난다 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들 아는 거예요?”
“아는 사람은 드물어. 회사 내에서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처음 입사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막 판사를 그만두고 들어온 안 팀장은 회사 내에서도 기피 순위 1위의 이단아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몇 번이나 담당자가 바뀔 만큼 회사 내에서도 애물단지여서 위에서도 결국 임시방편으로 인턴이었던 민재를 붙였다.
어차피 쓰다 버릴 패로 갖다붙인 거지만 그렇게 시작된 악연도 벌써 칠 년이다.
민재 본인도 이렇게까지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그냥 좀. 팀장님한테는 신세 진 게 많아서요.”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고 하니 괜한 의심 한 조각이 피어올랐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설마 헤어진 여자친구를 그렇게까지 신경 썼을 것 같지는 않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려는데 운전 중인 무혁이 물었다.
“가까워 보이던데.”
“직속 상사니까요.”
타부서와의 실랑이가 벌어질 때마다 안 팀장은 노골적으로 제 식구라며 챙기고 들었다.
그래도 사적인 부분에는 관심을 보인 적이 없어서 그냥 쓸모 있는 부품 정도로 여기는 줄만 알았는데.
아버지 대신 예식장에 들어가 주겠다는 제안에는 솔직히 감동했다.
“정말 좋은 분이에요.”
“좋아해?”
“네?”
“안 팀장, 좋아하냐고 물었어. 둘이 사귄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됐으니 그렇지 평소 그 흔한 회식도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데.
무혁은 뭐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대놓고 신경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네가 아니라도 그쪽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고.”
“뭐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다정하게 약혼녀를 챙기는 척하다가도 둘만 되면 늘 이 모양이다.
고의성이 다분한 시비에 민재는 오만상을 쓰고서 무혁의 말을 되받아쳤다.
“왜요, 팀장님이 대놓고 챙겨주니까 질투라도 나요?”
“그렇다면 어쩔 건데.”
너무 순순히 인정해버리니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빨간 불이 들어오자 무혁은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겨두고서 입만 벙긋거리는 민재를 빤히 봤다.
“다른 남자랑 그렇게 가까이 지내는 건 계약 위반이야.”
“팀장님은 직장 상사잖아요.”
“내 새끼 어쩌고 하는 것도 기분 나빠.”
문 변호사를 비롯해 다른 팀에서 워낙 시달리다 보니 안 팀장이 습관처럼 쓰는 말이라 그런 건데.
별 의미 없는 것까지 말꼬리를 잡는 그의 의도가 참으로 불순하다.
“팀장님이랑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 없어요.”
“장담할 수 있어?”
굳이 확답을 받겠다는 무혁의 의지가 너무나 굳건하다. 누가 검사 출신 아니랄까 봐 투박하고 차가운 말투가 괜히 서운했다.
일부러 신경을 긁는 게 미워서 민재도 덩달아 심술을 부렸다.
“아니면 어쩔건데요?”
“……진심이야?”
무표정하던 무혁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아무래도 농담이 농담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민재는 재빨리 백기를 들었다.
“정말 아니에요.”
몇 번을 부정하고 나서야 무혁의 눈꼬리가 다시 내려갔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으신 건지.
아까 식사할 때도 느낀 거지만 무혁은 마치 진짜 약혼자라도 된 것처럼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설마 질투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하긴, 그럴 리가 없는데. 딱 잘라 말하는 걸 보니 계약을 그르치기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거겠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무혁은 앞만 보고 운전대를 잡았다.
어쩐지 그 뻔뻔한 얼굴이 얄미워져서 민재는 대놓고 그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좀 보면 안 돼요?”
자기도 아까 그렇게 쳐다봤으면서.
아까부터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는 이유가 참 궁금한데 무혁은 회사 앞에 차를 세우고서 축객령을 내렸다.
“어서 내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해주는 척할 때는 언제고 단둘이 되고 나니 또다시 얼음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나쁜 인간 같으니라고. 저 인간의 속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민재 씨. 왜 이제 온 거야!”
안 팀장 없이 사무실에 먼저 올라가니 어째 복도 근처가 소란스러웠다.
입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오 대리와 문 변호사가 민재의 양손을 잡았다.
“왜 그러세요?”
“손님이 왔어!”
대체 무슨 손님이길래 다들 이리 호들갑인 걸까.
손님이 기다리는 미팅룸의 유리 너머로 분명 민재가 아는 얼굴이 보였다.
안내한 직원도 곤란한 얼굴로 민재에게 하소연했다.
“따로 약속이 됐다고 하셔서요.”
그런 약속 같은 건 없지만, 상대가 저 사람이라면 데스크 직원을 탓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저 사람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조원식 변호사.
그가 민재를 찾아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도 으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무리 그래도 무혁도 없이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꼴깍 숨을 삼키고서 민재는 망설임 없이 미팅룸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