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제 약혼녀를 괴롭히는 건 그만두시죠.
[출근하자마자 사무실로 와.]
오 대리의 문자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른 아침, 민재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손님들이 가득했다.
“민재 씨. 왔구나?”
문성희 변호사를 비롯해 어째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민재의 절친한 친구인 오 대리 역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다들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궁금해서 왔지.”
오 대리에게 눈치를 주니, 벌써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른 아침부터 다들 민재를 털어볼 생각이 만만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언제부터 사귀게 된 거야?”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어젯밤 계약서를 작성하며 민재는 무혁과 꼼꼼하게 예상 질문 리스트도 뽑았다.
“좀 됐어요.”
구체적인 시기까지 말하면 오히려 들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니 애매하게 말을 흐리는 정도로만 상황을 넘기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진짜 대학 때부터 사귄 거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거예요.”
같은 대학 출신을 넘어 두 사람이 사귀던 사이였다는 건 서원대 출신들은 다들 아는 얘기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재결합했다는 식으로만 둘러대도 별다른 변명이 필요하지 않다.
‘애먼 여자를 데려다 놓는 것 보다는 수월한 게 맞구나.’
다시 만난 거라고, 그 말 한마디로 이 상황이 모두 정리되는 걸 보면 굳이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법도 하다.
새삼 진무혁의 영리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럼 진짜 진무혁이랑 결혼하는 거야?”
“네. 식은 곧 올릴 예정이에요.”
“대체 왜 숨긴거야?”
“그거야 당연히 이럴 것 같아서죠.”
진무혁은 원래도 유명인사였던 데다, 이 자리의 변호사들 중에는 무혁에게 패소했던 이도 넷이나 있다.
문성희 변호사 역시 무혁이 동부지검에 있던 시절, 제대로 패배하는 바람에 자존심을 구겼던 전적이 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만만치 않은 민재의 방어에 문 변호사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상황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습관처럼 나오는 저 버릇은 본인만 모르고 모두가 알고 있다.
은근히 협박한다 한들 무엇 하나 거짓은 없다.
민재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히 질문에 답했다.
“아직 그이가 한국 들어오기 전이라 말하기가 애매했어요. 사정이 어떤지는 다들 아실 것 같아서요.”
“조조 때문에 그래?”
A&Z를 바짝 추격중인 법무법인 조조의 대표 조원식의 양아들이나 다름없는 무혁이 조 대표의 사위가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대학 시절 옛 애인과 재결합했다는 사실은 모두를 놀라게 할 수밖에 없다.
“그분은 절 싫어하시거든요.”
사윗감으로 점 찍어둔 무혁의 옛 애인이니 미운 털이 박히는 건 당연지사다.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대화의 여백을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으레 채워넣곤 한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게 참 불편했는데.
어느샌가 이게 더 편해진 걸 보면 민재도 제법 약아진 제 모습이 싫지 않았다.
‘내가 적당히 둘러댔어.’
다들 민재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이 저 뒤에 선 오 대리가 입모양으로 말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실연 때문에 옛 애인에게 돌아갔다는 민재의 시나리오는 다행히 오 대리에게도 잘 먹혀들었다.
“그래서, 이게 약혼 반지야?”
말을 잘 돌렸나 싶더니 이젠 왼손 약지에 낀 인게이지 링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조금은 촌스러운 연분홍색 다이아몬드를 보며 다들 못마땅한듯 훈수를 뒀다.
“진무혁이라서 기대한 것치고는 좀 촌스럽다.”
“그러게 말이야. 요샌 이런 디자인 잘 안 하지 않나?”
“전 마음에 드는 걸요. 예쁘잖아요.”
“뭐야, 벌써 남편이라고 편드는 거야?”
“민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네.”
그러려던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팔불출 취급을 받게 생겼다. 그래도 이 상황을 넘기기엔 나쁘지 않은 반응이라 민재는 괜히 손으로 반지를 가려버렸다.
굳이 진무혁의 편을 들려던 건 아닌데, 그래도 이 반지는 정말로 제 취향에 딱 맞았다.
그냥 그런 것뿐인데 이상하게 두 뺨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호구조사는 다 끝나신 건가.”
요란한 헛기침 소리에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에 기대고 선 안 팀장은 민재를 둘러싼 동료 변호사들을 보며 대놓고 눈치 주기에 들어갔다.
“거기 김 변은 지구화학 환경소송건, 이 변은 서호식품 상표권 소송, 그리고 문 변은 모빌리티 소송 자료가 아직이었던 것 같은데.”
“빨리 해서 넘기면 될 거 아니야?”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안 팀장의 핀잔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자리를 떴다.
다들 맡은 사건이 많은 데다 안 팀장과 연계된 업무가 많아서 힘 있는 민재의 상사는 이런 식으로 부하를 구해주곤 했다.
“내 새끼 괴롭힐 시간 있으면 빨리들 하지 그래?”
“어련하시겠어요.”
그런 안 팀장의 총애를 받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운 건 어쩔 수 없다.
부러움 반, 질투 반이 섞인 거지만 어쨌든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상황을 넘겼다.
“감사해요. 팀장님.”
“시작부터 그렇게 끌려다녀서야, 언제 다 클래?”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서른이 된 지금까지, 민재를 키운 건 안 팀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러 미운 소리를 해도 좋은 상사다. 민재는 생긋 웃으며 어제 정리해둔 혜성의 자료를 팀장에게 넘겼다.
“정리는 모두 마쳤습니다. 어제 다들 검토한 후에 넘겨주셨고요.”
“그럼 당장 혜성 쪽에 퀵으로 보내. 퀵비는 꼭 착불로 하고.”
뒤끝이 넘치는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답게 안 팀장은 끝까지 뒤끝을 부렸다.
어차피 끝날 때 끝나더라도 아마 십 원 한 푼 손해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감히 날 우습게 봤다 이거지. 두고 봐.”
이를 바득바득 가는 모습이 조금은 소름 돋을 지경인데.
아무래도 혜성 쪽에서 실수했단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저쪽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글렀구나.’
한 번 밉보이면 끝까지 간다.
쓸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정리해버리는 불같은 성질머리 탓에, 안 팀장은 판사 시절부터 악명이 높았다.
그런 사람을 적으로 돌렸으니 혜성 쪽도 앞으로 고생깨나 할 것이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잠깐만.”
지시 사항들을 모두 챙겨 방을 나서려는데 안 팀장이 민재를 불렀다.
“이따가 나랑 어디 좀 가야 할 거야. 점심 때 선약 없지?”
“딱히 없습니다.”
“다행이네. 내 차로 갈 거니까 11시 반쯤에 나갈 준비 해둬.”
식사 미팅이 잡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민재는 자리에 돌아와 일정부터 체크했다.
컴퓨터 화면을 켜자마자 오 대리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점심 언제 먹을 거야? 문 변호사님이 오늘 민재 씨 털 거라고 아주 단단히 벼른 것 같은데?]
[아쉽게 됐네요. 팀장님이랑 외부 미팅 잡혔어.]
팀장이 내려준 동아줄이 아니었다면 점심시간 내내 호구 조사에 시달릴 뻔했다.
“다행이다.”
다른 건 몰라도 반지에 대한 악담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왼손 약지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슬쩍 보고서 민재는 서둘러 서류 정리에 들어갔다.
***
“여기로 들어가지.”
팀장과 차까지 타고 도착한 곳은 VIP들이나 출입할 법한 고급 식당이었다.
황금색 샹들리에가 걸쳐진 복도를 따라 걷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 됐다.
“이쪽이야.”
“네, 팀장님.”
중요한 식사 자리에 불려간 적은 많았어도 누구를 만나는지 묻지 않는 건 두 사람 간의 불문율이었다.
필요한 자리에 투입돼서는 해야 할 일을 하면 충분할 뿐. 쓸데없는 호기심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안 팀장은 입 무거운 민재의 그런 점을 높이 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 앞에 선 안경 쓴 남자가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했다.
이토록 예의 바른 태도는 처음이라 민재는 놀란 내색을 하지 않고 슬쩍 분위기를 파악했다.
“안 팀장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대표님.”
정오의 햇살이 창문 안으로 내리쬐어서 눈이 부셨다. 하얗게 부서지는 빛 너머로 황금색 양복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저건?’
안 그래도 눈이 부신데, 반짝이는 스팽글 때문에 눈이 아팠다.
밤무대 의상으로나 볼법한 수상한 반짝이 양복에 주먹만 한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짚고 있다.
새하얀 머리의 노인은 민재 일행이 방 안에 완전히 들어선 후에야 느긋하게 뒤를 돌았다.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노인은 대뜸 지팡이를 들어서는 그대로 안 팀장의 머리 위로 내리꽂았다.
“미쳤어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재빠르게 막아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제대로 맞을 뻔했다.
“못난 놈. 어디 만만하게 보일 놈이 없어 고작 혜성 놈들 따위에게 망신을 당해?”
노인은 그대로 지팡이를 내동댕이치고서는 씩씩대며 역정을 쏟아냈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언에 민재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화를 내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다. 민재는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네놈이 그러고도 내 아들이야? 장차 이 로펌을 물려받아야 할 녀석이, 장가도 안 가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누가 아들입니까. 회사에서는 말을 똑바로 하셔야지요, 대표님.”
아들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하며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니 눈매와 턱선이 무척 닮았다.
마구잡이로 싸우기 시작한 부자의 모습에 민재는 한 걸음 물러나 상황을 관망하기 급급했다.
“대체 이게 무슨…….”
“A&Z 설립자이신 안종인 전 대표님이십니다.”
“안종인 대표님이시면, 설마?”
때는 1963년 5월, 부족한 법조인을 충원하기 위해 사법시험령이 선포되며 총 25명의 합격자가 나왔다.
사실상 현대 사법고시 1세대라 불리는 이들 중 가장 출세했다고 알려진 건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을 설립한 안종인 변호사였다.
지금은 대표직을 물려주고 은퇴했다고 알려졌지만 설마 안 팀장이 그 안종인 변호사의 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민재가 지금 안 걸 보면 지금도 회사 안에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터.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안 팀장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는 아무래도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알게 된 상사의 비밀에 겨우 납득할 즈음 애꿎은 대화의 화살은 어느새 민재를 향했다.
“그래서, 이 처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노인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소곳이 선 민재 앞에 선 채 그는 지팡이로 툭툭, 민재의 발끝을 두드렸다.
“혜성하고 계약, 네가 다 말아먹었다면서.”
“네? 그게…….”
대뜸 던진 돌직구에 놀랐지만, 다행히 표정만은 그대로 유지했다.
민재는 잠시 눈치를 살피고서 차분히 답했다.
“저는 단 한 번도 회사의 지침을 어긴 사항이 없습니다.”
“뭐라?”
“해당 내용은 혜성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소영하 문제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계약을 파기한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혜성은 다른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A&Z의 뒤통수를 쳤다.
입을 다물고 있다 한들 누가 억울함을 알아줄까.
처음 대학에 입학했던 날이 떠올랐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그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없다.」
칠판 위에 쓰인 글자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새삼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저는 회사에 위해가 갈 일은 그 어떤 것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계약을 말아먹었다는 표현은 정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발칙한 것 같으니라고. 내 앞에서 또박또박 말대꾸까지 한다 이거지?”
고압적인 태도와 함께 노인이 지팡이를 들었다.
잔뜩 화가 난 노인의 앞에서 민재는 숨을 꼴깍 삼켰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박을 해서 손해볼 건 없다.
“대한민국 형법 제260조 1항.”
“뭐야?”
낭랑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에 노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노인의 폭거에도 민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나머지 조항을 읊었다.
“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기초적인 조항을 안 대표가 모를 리 없다.
지팡이를 민재의 목 끝에 들이밀고서 노인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네가 지금 감히 내게 법을 가르치려 드는 게냐?”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대표님이라 해도 예외는 아닙니다.”
적어도 법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이런 부당한 대우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차분하기만 한 민재를 앞에 두고서 노인은 못마땅한 듯 입술 끝을 삐죽거렸다.
“참으로 발칙한지고. 판사놈들이 내게 실형이라도 내릴 줄 아느냐?”
“초범이라는 점을 참작하고, 연세를 생각하면 집행유예로 끝날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법 앞의 평등하다 하나 결국 판결은 사람이 내리는 법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명분이 필요하다.
한마디도 져주지 않는 민재를 앞에 두고서 안 대표는 아예 호통을 치며 적반하장으로 나섰다.
“연세라? 네가 지금 나를 늙었다고 놀리는 게야?”
“제 약혼녀를 괴롭히는 건 그만두시죠. 대표님.”
익숙한 목소리에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안 대표 앞에서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던 민재도 이번에는 정말로 놀라버렸다.
“선배?”
“이리 와, 민재야.”
평소답지 않은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서 무혁은 민재의 손을 잡아 그대로 제 쪽으로 안았다.
스스럼없는 그의 태도에 민재는 어제 본 계약서의 조항을 떠올렸다.
‘스킨십 조항.’
남들 앞에서는 다정한 연인 행세를 하는 게 계약 조건이었는데.
아무래도 적개심 가득한 저 노인이 두 사람이 넘어야 할 첫 산이었나보다.
안 대표를 무사히 속여넘기기 위해서 민재는 기꺼이 무혁의 손을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