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럼 계약 성립이네요.
부모님의 발인 날에는 비가 내렸다. 눅눅하던 물 냄새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진무혁의 아버지, 진이한은 명예밖에 없는 검사를 제 천직이라 여겼다.
빠듯한 공무원 월급에 평소에도 십 원 한 푼 남에게 얻어쓴 적이 없으니 그가 남기고 간 것은 오직 외아들인 무혁과 미해결된 사건 더미뿐이었다.
- 애가 셋인데, 우리는 못 맡아.
- 그러는 우리는 여유가 있는 줄 알아요?
맡아줄 친척 하나 없이 무혁은 시설에 보내졌다.
“그때 날 데리러 온 사람이 조원식이었어.”
상을 다 치르고 나서야 눈물범벅이 되어 달려온 사내는 며칠 사이 반쪽이 된 무혁을 제 집으로 데려갔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현관과 원목 소재의 바닥. 벽에 걸린 사슴 박제와 아름답게 꾸민 부인이 그를 맞이했다.
- 어쩜, 가엾기도 하지.
공부도, 운동도 언제나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무혁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무혁은 단숨에 모두의 동정을 받는 가엾은 아이가 됐다.
“어린 마음에 그게 참 싫었어. 그래서 더 오기가 생겼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한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같이 살았다.
친아버지처럼 구는 조원식을 앞에 두고도, 무혁은 언제나 선을 긋곤 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걸지도 모른다.
- 내가 이런 짓까지 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비가 오던 날, 술에 취한 조 대표의 중얼거림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검사가 된 후에야 알았다.
뒤늦게 증거를 확보했다 해도, 설령 조원식이 사주를 했던들 직접 사고를 낸 게 아닌 이상 구체적인 살인죄는 적용할 수 없다.
“그래서 떠났던 거예요?”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잘 나가던 검사였던 그가 돌연 사표를 썼을 때만 해도 조조로 가지 않겠냐는 추측이 파다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혁은 조용히 유학길에 올랐다.
“그 얘기는 천천히 하고, 우선 계약서부터 보자.”
A4용지 4페이지 분량의 계약서에는 결혼과 관련된 사항들이 빼곡하게 나열되었다.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알려줘.”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보는 것이 계약서니 민재도 어렵지 않게 세부 사항들을 검토해나갔다.
기간은 당장 내일부터, 2개월 이내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로부터 1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조건이다.
서로 합의에 따라 결혼 기간은 연장될 수 있다는 점까지도 모두 아침에 이야기했던 내용과 같다.
계약서에는 갑甲 진무혁과 을乙 석민재가 하게 될 결혼생활의 내용은 세세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선배가 갑이네요.”
“바꿔줘?”
“됐네요.”
괜히 사소한 문제로 시비를 걸며 낭비할 시간이 없다.
민재는 세부 내역을 하나하나 살펴나갔다.
[3조. 부부는 함께 거주해야 한다. 거주지는 갑의 주소로 정한다.]
“내가 여기 들어와서 살아야 해요?”
“공간은 충분할 거야. 아니면 내가 그쪽으로 가?”
신혼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주변의 의심을 사기엔 충분하다.
옹색한 제 살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민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쪽으로 와.”
무혁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민재가 쓸 공간을 먼저 보여줬다.
더부살이로 얹혀살기에는 너무 좋은 방이라 입이 떡 벌어졌다.
“안방 침실과 욕실, 드레스룸까지 모두 이어져 있으니 편하게 쓰면 돼.”
“여기를 다요?”
널찍한 안방 창 너머로는 한강이 보이는 데다, 미닫이문을 열고 나니 드레스룸에 화장대까지 달려있다.
혼자 쓰기 과분하리만치 커다란 욕실에는 거품이 나오는 욕조까지 달려있다.
물론 그 무엇보다 길 하나만 건너면 회사라는 점도 참으로 매력적이긴 하다.
매일 한 시간이 넘게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것보다야 백 배 나은 것 같긴 한데.
“여기를 선배가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침실도 같이 쓰자는 건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훅 들어오는 바람에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대뜸 결혼하자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뻔뻔스러운 소리까지 할 줄이야.
“됐네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의 반응을 애써 무시하고서 민재는 나머지 계약서 항목들을 차례로 읽어나갔다.
계약서의 나머지 조항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기본적인 가사 부담은 반반씩.]
[귀가가 늦어질 때는 서로에게 반드시 알려줄 것.]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이 결혼이 가짜라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이 유독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스킨십도 해야 해요?”
“호적에도 올릴 결혼이야. 이 부분만은 나도 양보 못 해.”
결혼식부터 시작해 부부동반 모임까지. 두 사람이 다정한 사이를 과시해야 할 장소가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 있다.
민재의 할머니는 물론 동창 모임, 민재의 회사는 물론 무혁의 지인들까지.
일부러 조원식 앞에 두고 보란 듯이 데리고 다닐 속셈이 만만하다.
“착각하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혼이야.”
“어련하시겠어요.”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진작 각오는 했지만, 막상 정말로 진무혁의 ‘아내’가 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물론 무혁에게만 이로운 계약은 아니다.
“선배랑 결혼식을 올리면 기자가 와도 아무 소용이 없겠죠?”
“그렇겠지. 유부녀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을 테니까.”
만약 소영하 때문에 기사라도 나게 된다면 할머니의 연약한 심장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무혁이 방패막이가 되어준다면 골치 아픈 문제 하나를 또 제거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비밀 엄수 항목을 거쳐 다음 장에는 남편과 아내가 지켜야 할 신의의 도리에 대한 부분이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도 결혼 생활 중에는 안 돼.”
결혼 생활 중에는 다른 이성과 특별한 관계를 만들지 않을 것과 함께 무혁은 한 가지 조항을 더 달아놓았다.
[소영하와 만날 때에는 반드시 갑과 동행할 것.]
“선배랑 같이 만나자고요?”
“그래. 정말로 헤어진 거라면 서로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테니까.”
어차피 며칠째 연락이 없는 데다 회사 쪽에서 계약까지 파기한 이상 소영하가 다시 민재를 찾아올 리는 없다.
아니, 설령 그가 돌아온다고 해도 민재는 다시 받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굳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 이미 끝났으니까요.”
“그쪽에서 헤어지자고 한 거야?”
“며칠째 연락 한번 없는걸요. 회사까지 저렇게까지 나왔으니 이젠 정말 끝인 거겠죠.”
반쯤 자조적인 말을 읊으며 민재는 애써 쓴웃음을 지었다.
기자가 찾아왔다는 걸 알아낸 거라면 분명 무혁과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도 그쪽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소영하의 매니저를 포함해 그쪽 회사 사람들은 모두 민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정말로 힘든 연애를 했었구나. 무혁과 이야기하다 보니 새삼스럽게나마 제 처지가 더욱 비참해졌다.
“회사랑 별개로 그 남자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지도 몰라.”
“설마요.”
“어쨌든 이 조항은 이대로 내버려 둬.”
무혁의 고집에 민재는 괜히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뒤늦게 소영하가 돌아온다 한들 받아줄 마음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만약 괜히 또 얼굴을 맞댔다가는 언제 또 화려한 말발에 넘어갈지 모르니 차라리 무혁이 옆에 있어 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요, 그럼.”
어쩐지 결혼이 아니라 사업을 한단 기분이 들 정도로 모든 조항은 세세한 사항까지 꼼꼼하게 나열되어 있다.
나머지 조항들을 모두 살피고 민재는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성공보수?”
“그래.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는 조건이니 위자료라고 봐도 되겠지.”
마지막에 적힌 계약 내용과 함께 민재는 나란히 나열된 동그라미를 차례로 셌다.
빽빽한 글자는 쉽게 읽어도 숫자에는 유독 약한지라 민재는 손가락까지 써가며 무혁이 제시한 금액을 확인했다.
“사, 삼 억?”
“그래. 정확히 삼 억. 이 결혼이 끝나는 날 현금으로 모두 지급할 거야.”
상상도 못 한 금액에 입이 떡 벌어졌다. 우습게도 제일 먼저 할머니의 병원비 생각이 났다.
잘 버는 직장에 다닌다고 해도, 신약에 비보험치료에 수술도 몇 번이나 하는 바람에 주머니 사정이 빠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받아 둬. 혼인 신고까지 하는 이상 그 정도 대가는 받는 게 맞아.”
선뜻 큰 금액까지 제시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금액을 듣고 나서야 변해버린 무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사 시절 검소했던 모습과 달리 무혁의 손목에 찬 시계는 분명 어지간한 변호사들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고가의 모델이다.
거기다 이 집까지. 제대로 된 유산 하나 없다던 무혁의 현재는 어쩐지 민재가 알던 것과 많이 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렇다고 속사정을 물어보자니 쉽게 얘기해줄 리 만무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무슨 일인줄도 모르고 덜컥 서명할 수는 없어요.”
궁지에 몰린다고 소금물을 마시면 더 목이 탈 뿐이다.
내막을 분명히 밝히라는 민재의 말에 무혁은 잠시 뜸을 들이다 곧 입을 열었다.
“혜성 쪽이야.”
“혜성이요?”
“그래. 혜성의 상속 전쟁이 곧 시작될 거야.”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저쪽은 명백히 민재를 지목해 트집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혼 하나 내지 않고 넘어가던 안 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상속 문제도 선배랑 관련이 있는 거예요?”
“자세한 건 말 못 하지만, 조조의 반대편에 서는 것만은 확실해.”
조원식과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서 무혁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건 것처럼 보였다.
오늘 있었던 난리통과 안 팀장의 태도까지, 혜성의 상속 문제가 관련된 거라면 일이 커진다.
‘그래서구나.’
무혁은 조원식과 맞서기 위해서는 이미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제 딸을 걷어차고서, 아무것도 없는 민재와 결혼해버리는 것도 분명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건 내일 당장 제출할 거야. 저쪽이 반응하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해.”
조원식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무슨 흉계를 꾸밀지 모른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건 민재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제게 협박까지 해가며, 조원식은 어떻게든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혈안이었다.
“아마 이 사실을 알면 분명 화가 날만 하겠네요.”
무혁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협박까지 일삼던 사람에게, 이보다 더한 복수는 없을 것이다.
이 서류 한 장을 제출하는 것만으로 두 사람은 법적으로 정식 부부가 된다.
뒤늦게 갈라놓으려고 해도 한 번 접수된 서류는 돌이킬 수 없다.
필요한 서류를 모두 작성하고 무혁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 계약은 절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돼.”
그건 민재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나 다른 사람들은 그냥 넘어간다고 쳐도 심장이 약한 할머니에게만은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서류에 무혁 역시 인감을 찍었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 좋은 사람을 만나 어서 결혼해야지. 그래야 이 할미도 안심하고 눈을 감지.
세상에 홀로 남을 손녀 걱정에 할머니는 몇 번이고 민재를 타일렀다.
제대로 된 혈육 하나 없는 민재가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실 민재의 인생에 결혼 같은 건 계획조차 없었다.
‘이걸로 된 거야.’
그러니까 이혼한 기록이 남게 되더라도, 할머니만 걱정 없이 편히 눈감으실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계약 성립이네요.”
졸지에 무혁이 안겨준 화사한 꽃다발이 부케 대신인 셈이 됐다.
마지막으로 무혁은 주머니에서 반지 상자를 꺼냈다.
“약혼반지야.”
“예쁘네요.”
요즘에는 쉽게 구하기도 힘든 마름모꼴 컷팅의 핑크 다이아몬드가 눈에 띄었다.
민재가 대학생 시절에나 유행했던 디자인인데, 어디서 저런 걸 구해온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딱 맞아요.”
“이제라도 제 주인을 찾아가서 다행이네.”
“네?”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무혁은 말끝을 흐려버렸다.
그래도 처음에는 조마조마하기만 했던 것과 달리 도장을 찍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애초에 소영하의 여자란 이름으로 온 국민에게 악명을 떨칠 뻔했던 탓에, 고작해야 같은 업계 사람들이나 알 진무혁과의 스캔들 정도는 되려 귀여운 수준이다.
날이 갈수록 대범해지는 제 모습이 낯설다.
그런 민재와 달리 무혁은 속 모를 얼굴로 민재의 약지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요?”
“잘 어울려서.”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과하게 뿌듯해하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
이 남자는 아무래도 정말 반지 고르는 센스는 없는 모양인데.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든 건지 무혁은 애꿎은 민재의 약지만 한참을 지그시 바라보며 영문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그나저나 어느 로펌이에요? 혜성 상속 문제면 꽤 큰 곳에서 해야 할 텐데.”
검사로 복귀할 줄 알았던 진무혁이, 그것도 조조가 아닌 다른 로펌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어디든 분명 큰 소동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누군진 몰라도 진무혁을 영입한다면 공을 제대로 세우게 되는 셈이다.
“그건 조만간 알게 되겠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무혁은 끝내 어디로 갈지 알려주지 않았다.
혜성 건처럼 큰 재판을 진행할 만한 곳이라면 분명 민재도 아는 곳일 터.
‘법무법인 송월? 아니면 넥스트려나.’
어딘지는 몰라도 막 혜성과의 계약이 끝난 A&Z는 아닐 것이다.
조원식과 맞설 수 있을 만한 규모의 로펌을 꼽아보며 민재는 열심히 혼자 머리를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