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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9화 (9/103)

9화. 그 여자는 이미 널 버렸어.

차에 탄 후에도 소영하는 운전 중인 매니저의 뒤에 붙어서는 잔뜩 투정을 쏟아냈다.

“바닐라 라테 먹고 싶어. 사줘, 형.”

“안 돼. 피부과에서 너 커피 끊으라고 한 거 잊었어?”

“그럼 민재 보고 싶어. 우리 A&Z로 가자.”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할 주제에. 소영하는 노골적으로 민재를 찾으며 그간 쌓인 불만을 터트렸다.

“반응도 괜찮잖아. 이번 건만 끝나면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안 그래?”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한테 그래. 그런 말은 성 이사님 앞에서나 하세요. 소영하 씨.”

“지난번에도 하게 해준다고 해놓고 어긴 건 준범 형인데, 왜 욕은 내가 다 먹어야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건만, 민재는 여전히 제 사정을 이해해주지 않고 결혼을 재촉했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분명 또 화냈을 거면서.’

그래서 일부러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숨겼다.

급한 일 때문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또 넘어가 줄 거라고 믿었다.

“민재가 제대로 삐진 거 같은데, 그냥 못 이기는 척 나가줄 걸 그랬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날로 인터넷에 기사 도배가 될 텐데. 영화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철저하게 함구령을 내린 덕분에 소영하의 열애 사실은 이 년 간 누구에게도 새어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민재가 혼자 결혼 준비에 들어갔고, 하필이면 악질로 소문난 스타커넥트의 김 기자가 떡밥을 물며 소영하의 결혼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 기회에 결혼하는 것도 괜찮지. 다른 사람들도 결혼하고 더 잘나가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맞잖아. 한규원 선배님도 그렇고, 엘렉토의 홍용진도 있고. 나라고 못 할 게 뭐가 있어?”

그렇게 잘 나가던 배우나 아이돌이 갑자기 결혼하는 바람에 나라가 뒤집힌 건 기억도 못 하는 건지.

결혼 정도로는 경력에 타격 하나 입지 않을 사람들만 예로 들며 소영하는 오늘도 매니저의 속을 뒤집어놨다.

“걔들이 그렇게 갔으니까 네가 지금 그 자리에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본 거야?”

“내가 뭘!”

“도착했어. 어서 내려.”

어린 시절 뇌수술을 한 덕분에 군대도 면제겠다, HS엔터는 작심하고 한류 스타를 만들기 위해 소영하에게 천문학적인 공을 쏟았다.

발연기란 혹평을 들으면서도 일 년에 주연 드라마만 두 개에, 영화까지.

그렇게 오 년이 넘게 공을 들이고 나서야 소영하는 겨우 대중들에게 톱스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얼굴 외에는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HS엔터란 뒷배 덕분에 톱스타 자리에 오른 줄도 모르고서 소영하는 오늘도 기가 잔뜩 살았다.

“준범 형!”

“오늘도 참 잘생겼구나. 영하야.”

소영하를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혜성 그룹의 실세 성준범 이사였다.

성준범 이사는 표정이 없기로 유명했다.

지그시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탓에 그에게는 자연스레 독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와 각진 뿔테 안경. 완벽한 각을 자랑하는 검은 양복까지.

평소에도 빈틈 하나 주지 않는 그의 인상은 독사처럼 상대를 주눅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 성 이사를 상대로 마치 친형이라도 만난 것처럼, 소영하는 허물없이 다가와 대뜸 포옹부터 했다.

“이 옷 진짜 마음에 들어. 역시 형 안목이 최고인 것 같아.”

“암. 내가 다른 애들은 덜 챙겨도 우리 영하는 꼭 챙겨야지. 자네는 이만 나가 봐.”

유독 소속 연예인 앞에서만 온화해지는 그를 알기에 매니저는 알아서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단둘이 남은 후 준범은 직접 포트에 더운 물을 올렸다.

텁텁한 맛이 싫다는 투정에도 그는 손수 차를 우려 소영하의 앞에 잔을 들이밀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 A&Z랑 계약 파기는 또 뭐고?”

“말 그대로. 혜성 그룹 전체와 A&Z는 오늘부터 완벽하게 갈라설 거야. 그러니 앞으로 그 여자랑 다시는 만나지 마.”

“그 여자라니. 설마 민재 얘기야?”

소영하가 해달라는 건 뭐든 다 들어주던 준범도 유독 민재와의 결혼만은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헤어지란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영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이사님이겠지.”

준범은 차가운 말투로 선을 그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둔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익숙한 거리와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제 뒷모습과 함께 옆에 선 여자는 분명 석민재였다.

“영화 개봉 전에 터트릴지, 아니면 영화 개봉 당일에 터트릴지. 저쪽에서는 네 뜻을 따르겠다고 하더군.”

“어느 놈이야.”

“스타커넥트 김영룡. 어제 인터뷰도 같이했다면서.”

능구렁이 같던 김 기자를 떠올리며 영하는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은근슬쩍 결혼 얘기를 하기에 평소처럼 넘겼는데 뒤에서 이런 수작을 부리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번 영화가 우리 HS엔터에 얼마나 중요한 작품인지는 벌써 몇 번이나 얘기했었지.”

싸늘한 말투가 바늘처럼 날이 섰다. 성 이사가 소영하의 연애를 인정해주며 달았던 조건은 오직 하나였다.

절대로, 절대로 언론에는 들키지 말 것.

상품으로서의 소영하의 이름을 훼손하지 않는 거였다.

“차라리 상대 배우랑 스캔들이 나면 팔아먹기라도 좋을 텐데, 그러게 고작 일반인 따위에 왜 목을 매고 그래.”

“하지만 민재는!”

“불쌍한 녀석.”

가엾은 아이를 달래듯 준범은 혀를 차며 영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여자는 이미 널 버렸어.”

양복 주머니 안에서 미리 준비해둔 사진을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기사를 막는 대가로 신문사 쪽에서 넘겨받은 선물을 앞에 두고 소영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이건 대체…….”

지난 이년 간, 그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변함없던 제 연인이 다른 남자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

“걱정하지 마. 널 갖고 논 저 여자는 내가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거니까.”

“아니야. 민재가 날 두고 그럴 리가 없어.”

완벽한 보복을 다짐하는 준범를 앞에 두고 영하는 좀처럼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반쯤 얼이 나간 그를 앞에 두고서 준범은 앞으로의 계획들을 차례로 알려줬다.

“앞으로 우리 쪽 소송은 모두 조조에서 맡게 될 거야. 나중에 조 대표랑도 볼 일이 있을 테니, 그땐 영하 너도 같이 인사하자.”

“형!”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데리고 나가.”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소영하를 매니저에게 보냈다.

제법 공을 쏟아부은 덕분에 시사회 평도 나쁘지 않으니 아마 소영하는 이번에도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 터였다.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며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사님. 본사에서 호출입니다.”

“곧 가겠다고 전해.”

드디어 본격적인 상속 전쟁의 막이 오르던 차에, 그간 거슬리던 소영하의 여자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두 조 대표의 조언 덕분이다. 일부러 언론에 흘리자마자 다른 남자가 나타난 걸 봐서는 상대쪽 여자도 제법 고단수로 보였다.

“그러게 주제에 맞는 남자를 골랐어야지.”

모든 잘못은 그 여자의 몫으로 돌려놨으니 지금쯤 속이 꽤 쓰릴 것이다.

“나머지는 조 대표에게 맡겨두면 되겠지.”

이런 류의 뒤처리는 누구보다도 잘하는 사람이다.

본격적인 상속전에 들어가게 되면 준범은 혜성을 손에 넣고, 조조는 A&Z를 꺾고 도약할 것이다.

모든 계획은 완벽하다.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준범은 다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

“뭐 그런 자식이 다 있어? 완전 쓰레기잖아.”

민재의 유일한 대나무 숲. 오 대리는 일련의 사태를 한 줄로 요약했다.

“그렇게 됐어.”

“헤어지면 그냥 깔끔하게 헤어질 것이지, 그걸 어떻게 자기한테 덮어씌워? 미친 거 아니야?”

혜성 전체가 물러난다는 소식에 A&Z 곳곳에서 우는 소리가 나왔다.

급기야 안 팀장이 윗선에 불려가는 사태까지 벌어지며 민재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별 얘기 없이 넘어갔으니 다행이지, 뭐.”

“그래도 우리 중에 안 팀장 감당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잖아. 그러니 그러겠지.”

겸손한 민재를 두고 오 대리는 굳게 닫힌 안 팀장의 방문을 힐끔 쳐다봤다.

“그게 그렇게 되나?”

“민재 씨. 잠깐 이것 좀 봐줄래?”

평소에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문성희 변호사마저 민재를 찾았다.

아무래도 오늘도 제때 점심 먹기는 그른 모양이다.

“제가 볼게요.”

평소에는 눈엣가시 취급을 당해도 업계 1위 로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전적으로 실력 덕분이다.

졸지에 이 부서 저 부서를 도와주다 보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머진 우리끼리 하면 되겠다. 민재 씨, 수고 많았어.”

“별말씀을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이 여덟 시가 넘었다. 자리에 돌아와서 모니터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 이따가 봐. 오늘도 데리러 갈게.

분명 무혁이 그렇게 말했었는데, 제 자리에 던져둔 전화를 확인하니 여섯 시쯤 그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밑에서 기다릴게.]

무혁이 문자한 지도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버렸다.

민재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고 곧장 전화부터 걸었다.

“왜 이래.”

엘리베이터 안이라 그런지 전화조차 먹통이다. 급한 대로 내리자마자 사원증을 찍고서 그대로 로비로 뛰어나갔다.

“없구나.”

주변을 둘러봐도 무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로 꼬박 두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면 너무 미안해지는데.

뒤늦게 다시 통화버튼을 누르자 곧 무혁이 전화를 받았다.

“이제야 끝났나 보네.”

“미안해요. 선배. 어?”

수화기 너머가 아닌 근처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문 앞에 꽃다발까지 든 무혁이 민재를 향해 걸어 들어왔다.

화사하게 핀 연분홍빛 라넨큘러스가 꼭 부케 같은데, 무혁은 그걸 기어코 민재의 품에 가득 안겨줬다.

“이게 다 뭐예요?”

“날 기다리게 한 벌이야.”

노골적인 심술이 얼굴에 가득 배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회사를 나서자마자 길 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민재에게 가득 쏠렸다.

“선배!”

일부러 보여주려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진무혁의 치밀함이 이럴 때는 참 야속하다.

“아까부터 계속 기다린 거예요?”

“몰라.”

아닌 것도 아니고 모른다니.

뭔가 잔뜩 심통이 난 채 무혁은 초록 불이 되기 무섭게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할 말이 많은 건 민재도 마찬가지지만.

꼬르르륵.

걸으면 걸을수록 점심부터 굶은 위장이 밥을 달라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먹을 것 좀 사서 올라가면 안 돼요?”

말을 할 때는 하더라도 밥은 좀 먹고 하면 안 되느냐고.

애절한 마음을 담아보아도 무혁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서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 그럴 시간 없어.”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밥까지 굶겨가며 볼일만 보겠다는 심보에 예뻐 보이던 꽃이 다시 미워졌다.

‘이 인간이 진짜.’

아침엔 뺨에 뽀뽀까지 했던 주제에 지금은 또 왜 이렇게 싸늘한 걸까.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

얌전히 숙여줄 수만은 않으니 민재는 대놓고 불만을 토로했다.

물론 무혁은 그런 민재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가 뭘?”

“됐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이젠 말을 할 기운도 없다.

뒤늦게 밀려온 허기 탓인지, 이젠 그냥 계약서를 쓰든 뭘 하든 빨리 해치우고 얼른 밥부터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런데 어째 아파트 문이 열리자마자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스며 나왔다.

“어라?”

구두를 벗고 실내로 들어오니 테이블 위에는 제법 공들여 차려놓은 밥상이 떡하니 차려져 있다.

“이게 다 웬 거예요?”

“손부터 씻고 와.”

엄마 같은 무혁의 재촉에 민재는 익숙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처음에는 생활감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이 집에 어느샌가 훈훈한 공기가 맴돌았다.

손을 씻고 나와보니 어느새 무혁은 재킷을 벗어둔 채 린넨으로 된 앞치마까지 걸치고 국을 뜨고 있었다.

“일부러 차린 거예요?”

“넌 배가 고프면 흉포해지니까, 우선은 밥부터 먹이려고 했었지.”

“뭐라고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지만 정말 말을 듣고 나니 허기가 졌다.

무혁은 기다렸다는 듯 뽀얀 쌀밥을 한 공기 뜨고 데운 국도 옆에 곁들여줬다.

“맛있겠다.”

할머니가 입원하고 나서는 누군가 민재를 위해 밥상을 차려줄 일은 더더욱 없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손이 많이 가는 반찬이 낯설다.

호기롭게 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민재는 젓가락만 든 채 좀처럼 밥을 뜨지 못했다.

“왜 가만히 보고 있어?”

“선배는 정말 여전하네요.”

진무혁의 취미가 요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고시 공부의 스트레스를 풀겠다며 시작했던 취미의 제일 큰 수혜자는 언제나 민재였다.

- 민재가 맛있게 먹어주면 그걸로 충분해.

두 사람 다 참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아주 오래된 추억을 애써 삼키며 민재가 먼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팀장님이랑 통화했었다면서요?”

“혜성 일은 앞으로도 큰 문제가 될 거야.”

지금도 벌써 회사가 뒤집힌 건데. 아무래도 무혁은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선배랑도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래. 이번 결혼은 그걸 위한 거니까.”

진중한 얼굴로 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원식은 자기 딸과 날 결혼시켜 조조를 물려받기를 바라지.”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된 무혁을 평생을 길러준 은인이다.

“알아요.”

민재의 집까지 찾아왔던 그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애지중지 키웠으니, 모두가 장차 무혁이 조조의 후계자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로 그 조원식이 내 부모님을 죽였어.”

더는 순진함 따위는 없는 어른의 얼굴을 하고서 무혁은 아주 오래된 옛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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