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럼 이제 해명을 들어봐야겠지?
“기한은 일 년. 네 할머니가 그때까지 살아계시면 얼마 정도는 더 연장할 수 있어.”
이건 어디까지나 계약이라고. 무혁은 이 결혼이 서로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세부 조건은 민재에게도 결코 불리하지 않다.
할머니의 여린 심장은 아마 일 년도 버티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그 순간까지는 곁을 지켜주겠다는 호의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지금 제게 필요한 가장 완벽한 남편감이라는 점에선 틀림이 없다.
“신혼여행은 생략하더라도 결혼식은 해야 해요.”
“해야지. 예식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파혼 통보 이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해야 할지.
무혁은 이미 예약해둔 예식장에 웨딩 촬영까지 모두 수용했다.
“어차피 소영하랑 만나는 거, 다른 사람은 모른다면서.”
예식장 예약조차 민재의 이름만 올렸을 뿐 그 어디에도 소영하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그 자리에 진무혁이 대신 들어온다 한들 누구도 결혼 상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거야 그렇죠.”
민재 본인도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그의 입으로 듣고 나니 괜히 속이 쓰렸다.
“아직 드레스는 피팅도 안 했어요.”
“잘됐네. 드레스는 함께 고르러 가.”
아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진짜 약혼자라도 된 것처럼 구는 무혁이 참 낯설다.
“진심이에요?”
“그럼, 그만두고 싶어?”
딱히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민재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서 무혁의 심기를 살폈다.
입만 열면 공수표였던 소영하와 달리 진무혁은 자기가 뱉은 말을 쉽게 뒤엎을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준비한 조건을 모두 군말 없이 수용하는 모습으로 보아 오히려 아쉬운 건 무혁 쪽인지도 모른다.
대체 어디부터 알고 제게 다시 접근해온 건지 이 남자의 속내를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냥 좀, 다른 사람도 있을 텐데 굳이 왜 나인가 싶어서요.”
“석민재만큼 입이 무거운 여자는 없지.”
다른 건 몰라도 그 점만큼은 반박할 길이 없다.
애초에 그의 이런 미친 짓에 발맞춰줄 만큼 절박한 사람은 아마 자신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차는 한남동에 진입했다.
어째 이야기가 너무 순순히 넘어가는 게 아무래도 수상한데, 괜히 그의 속을 떠보고 싶어졌다.
“만약에 내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했어요?”
“거절한다고?”
“네. 내가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운전대를 잡고서 앞만 보던 무혁은 대놓고 던진 도발에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네 할머니께 찾아갔겠지.”
“뭐라고요?”
골탕을 먹이려다 되려 한 대 맞아버렸다.
어이가 없는 민재를 두고 무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손녀분께서 제 청혼을 거절했다고, 도와달라고 하면 할머님께서는 분명 내 편을 들어주시지 않았을까.”
“선배!”
진짜 약혼자로 알고 있는 할머니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는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사이 어느새 회사 앞에 차가 멈췄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고서 무혁은 그제야 민재와 눈을 맞췄다.
“예식은 좀 더 당겼으면 해. 늦어도 다음 달 안에는 하고 싶어.”
생각보다 너무 쉽게 풀리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민재는 허탈함에 헛웃음이 났다.
“당기려면 당길 수는 있겠지만, 어째 실감이 안 나네요.”
“실감할 수 있게 계약서도 쓸 거야. 오늘도 데리러 갈 거니까 얌전히 기다려.”
“계약서요?”
“갑자기 네가 또 도망치기라도 하면, 나도 곤란해지니 말이야.”
이미 전적이 있다 보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렇게 차는 어느새 회사 앞에 도착하고, 무혁은 말릴 새도 없이 먼저 차에서 내려서는 민재가 앉은 조수석의 문까지 먼저 열어줬다.
“어머, 진짠가 봐.”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출근하는 직원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벌써 소문이 쫙 퍼졌으니까. 애초에 민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요.”
“알아. 그래야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몸을 틀기 전 눈앞에 무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느새 가까워진 얼굴과 함께 뺨에 따뜻한 그의 입술이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선배!”
어린아이에게나 하는 볼 키스를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무혁은 어느새 저 멀리 운전석으로 냉큼 달아나버렸다.
“이따가 봐. 오늘도 데리러 갈게.”
아무리 이르게 출근했다고 해도 지켜보는 사람이 몇 명인데.
직장 앞에서 테러나 다름없는 애정행각을 벌였으니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저 인간이 진짜.”
이 교활한 남자는 아무래도 여기까지 모두 계산하고 움직인 모양이다.
화끈대는 뺨을 부여잡고 민재는 저 멀리 가버리는 그의 차 뒷꽁무니만 바라봤다.
당장 출근하자마자 팀장에게 무슨 추궁을 당하게 될지 벌써 눈앞이 깜깜해졌다.
***
“그럼 이제 해명을 들어봐야겠지?”
잔뜩 골이 난 안 팀장 앞에 서니 고양이 앞의 쥐가 된 심정이다.
민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얌전히 상사 앞에 백기를 들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안 팀장은 판사 시절부터 눈치가 워낙 빨랐던 사람이라 거짓말 같은 건 애초에 꿈도 꿀 수 없다.
“결혼 안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 변한테 네 결혼 소식을 들을 줄은 몰랐네.”
아무리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라지만, 빈말로라도 예의를 차리던 것조차 오늘만은 예외가 됐다.
진심으로 서운해 하는 안 팀장 앞에 민재는 그저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벌써 다 들으신 거예요?”
“그래. 온 회사가 다 아는 사실을 내가 제일 마지막에 알았지.”
대체 어디까지 떠들고 다닌 건지. 사원증을 찍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기만 했다.
적어도 이 바닥에 진무혁을 모르면 간첩이나 다름없으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때는 정말로 안 할 생각이었어요.”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자세한 속사정마저 드러낼 수는 없으니 민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결혼 전에는 원래 오락가락한다더니, 석민재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긁는 추궁에도 민재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한 번 입을 다물면 조개처럼 과묵한 이라는 걸 알기에 안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 네 약혼자한테 전화가 왔었으니 망정이지.”
“선배가요?”
소영하가 연락을 했을 리는 없으니 분명 무혁일 것이다.
토끼눈이 된 민재를 두고 안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를 가득 내밀었다.
“그래. 내가 한밤중에 그 대단하신 진무혁한테 전화를 다 받아보고. 이게 다 네 덕분이다.”
같은 서원대 출신 동문이다 보니 연락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겠지만, 대체 무슨 소릴 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평소에도 말을 꼬아서 하는 사람이다 보니 민재는 팀장이 넘긴 서류만 받아들고서 그저 죽을 죄를 지었노라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뭐, 어쨌든 그 대단하신 진무혁한테 자세한 사정은 들었으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주지.”
은근히 뒤끝이 있는 사람이라 한 시간은 더 잔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대체 뭐라고 한 건지 안 팀장은 거기까지만 하고서 곧장 일 얘기로 들어갔다.
옹색한 제 대답이 먹혔을 리는 없으니 분명 무혁이 손을 쓴 모양이지만.
‘대체 뭐라고 한 거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다시금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 안 팀장을 보면 분명 무혁이 뭔가 손을 쓴 게 분명했다.
“지금 딴생각할 틈이 없을 텐데?”
“네. 확인하겠습니다.”
팀장의 핀잔에 민재는 서둘러 받아든 파일철부터 열었다.
“이건…….”
“그래. 지난달에 재판 끝난 HS엔터 판결 자료야.”
첫 페이지부터 떡하니 나온 소영하의 사진을 보고 머리가 아팠다.
HS엔터 소속 연예인들의 광고 초상권과 관련된 소송에서 로펌 A&Z의 우수한 변호사들은 1심과 2심을 모두 승소하며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하지만 상대측은 여전히 이에 불복해 또다시 소송 준비에 들어갔다.
결국은 대법원까지 가게 될 이 지겨운 소송은 소영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민재도 유독 꼼꼼히 살폈던 내용이었다.
“이게 뒤집힐 일은 없을 텐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있지. 아주 큰 문제가.”
안 팀장은 민재 앞에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퇴근 후에 전달된 편지봉투에는 커다랗게 HS엔터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내용증명?”
“그래. HS엔터 쪽에서 우릴 내치겠다는군.”
이렇게 큰 소송을 감당할 수 있는 로펌은 국내에도 많지 않은데, HS엔터는 이번 기회에 아예 그동안 A&Z와 진행중인 모든 건을 중단하겠노라 통보했다.
“하지만 이건 벌써 다 이긴 소송인데!”
“암. 다 된 밥인데, 엉뚱한 놈 손에 굴러 들어가게 생겼지.”
HS엔터처럼 큰 회사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판을 엎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민재는 저쪽에서 보내온 서류를 읽던 중 눈에 띄는 부분을 발견했다.
“보안 유지 항목 위반이라니, 이건 설마…….”
“그래. 어제 기자가 널 찾아왔었다면서.”
이 소송에는 민재도 깊게 관여했었다지만, 어제 기자가 찾아온 용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설마.’
만약 소영하의 일로 제게 보복하는 거라면.
만약 이 일로 HS엔터같은 큰 거래처를 잃게 된다면 로펌 전체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알아. 넌 억울하다는 거.”
“팀장님.”
통찰력 있는 상사답게 안 팀장은 이게 누명이란 사실을 벌써 알아차린 듯했다.
“진무혁한테 다 들었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네?”
현장에 같이 있었던 문 변호사도 아니고, 갑자기 무혁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안 팀장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민재의 손에 다 구겨진 HS엔터의 봉투를 쥐여줬다.
“윗선이 얽힌 문제를 덮으려고 감히 내 새끼를 건드렸다 이거지.”
아무래도 아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던 건 민재의 결혼 소식이 아니라 이것 때문이었나보다.
어지간해서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던 사람이 오늘은 제 자리에 털썩 걸터앉아서는 주먹을 꽉 쥐고서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냈다.
“내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이딴 수작을 부린단 말이지.”
살벌함을 넘어 사악함이 느껴지는 안 팀장의 모습에 민재는 애써 입을 다물었다.
자존심이 제대로 상한 모양인데, 법조계 내에서도 또라이란 소문이 자자한 그의 심기를 거스른 HS엔터의 속내를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다른 문제가 얽힌 건가요?”
“그건 나중에 차차 얘기하고, 어쨌든 꺼지라니 꺼져줄밖에. 필요한 내용 정리해서 보낼 준비해. 한 장도 빠짐없이 모두다.”
사무실을 나오니 어쩐지 사무실 전체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혜성물산 쪽 자료 창고에 있었지?”
“네. 거기 있어요.”
“미쳤나 봐 진짜.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럴 수가 있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서야 알았다.
민재 쪽에서 진행하던 HS엔터를 비롯해 모기업인 혜성그룹 소속 상당수의 계열사에서 오늘부로 법률대리 해지 통보를 보내온 모양이었다.
“결혼은 해도 되니까 신혼여행 간다는 소린 하지 마. 앞으로 한두 달은 미친 듯이 바쁠 테니까.”
“그럼요. 맡겨주세요.”
대놓고 민재를 지목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신뢰는 변함이 없다.
평소에 잘해 둔 탓이겠지만, 그래도 갑자기 떨어진 핵폭탄 덕분에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민재의 결혼 문제는 자연스럽게 덮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소영하 한 사람과 틀어진 문제로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리는 없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대체 속사정이 뭔지 아무래도 무혁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
이른 새벽 매니저는 일찌감치 찾아와 소영하를 깨웠다.
“조금만 더 잘래.”
시사회를 마치고 또 촬영팀과 긴 회식이 이어졌건만, 피곤에 지친 그는 이른 아침부터 뜬금없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계약 해지?”
“그래. A&Z 쪽이랑은 이제 끝이라고 이사님께서 말씀하셨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덕분에 잠이 번쩍 깼다. 냉큼 자리에서 일어난 소영하는 제일 먼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오늘도 나는 쓸데없이 잘생겼단 말이지.”
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서도 스스로에게 흠뻑 빠진 모습에 매니저는 그저 혀를 찼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서둘러. 이사님께서 스케줄 가기 전에 잠깐 회사 들어오라고 하셨어.”
“준범 형이?”
HS엔터 이사이자 혜성그룹의 후계자. 성준범은 소영하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워낙에 까다로운 사람이라, 소영하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고서 옷장부터 살폈다.
“하여튼. 그 형은 날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적당히 하고 빨리 준비나 해. 미용실 갈 시간 한참 늦었으니까.”
“이 정도면 되려나.”
준범이 새 영화 시사회 때 입으라며 선물해준 디올의 새 컬렉션을 걸치고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뭔가 이상한데.”
“미적거릴 시간 없어, 빨리 나와.”
분명 평소와 같은 집임에도 뭔가가 이상하다.
신발을 신던 중 뒤늦게서야 그는 뒤늦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집안 곳곳에 남아 있던 민재의 물건들이 어느새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네.”
벌써 몇 번을 반복했던 일이니까. 섣불리 건드려봐야 화만 더 나게 할 거란 사실은 소영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이럴 때는 그저 얌전히 입을 다물고 그녀가 자신을 용서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그래봤자 그 여자는 절대 자신을 떠날 수 없다.
지금쯤 단단히 화가 났을 민재를 떠올리며 소영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