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 계약. 어떻게 하면 돼요?
무혁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익숙한 아르마니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의 양복 안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옛 추억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 선배랑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의 생일날, 제 손으로 처음 선물했던 향수였다.
벌써 몇 년이 지났음에도 무혁은 여전히 민재가 선물한 것과 같은 향수를 고집스레 쓰고 있었다.
‘결혼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그의 돌발선언에 막막함이 앞섰다.
겁먹은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은 날카로운 추궁을 이어나갔다.
“교수님께 전부 다 들었어. 네가 왜 내 앞에서 사라졌던 건지.”
무혁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바로 다음 날, 민재의 집 앞에 검은 차가 도착했었다.
양복 칼라에 빛나는 변호사 배지.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중년의 사내는 분명 학교에서 몇 번이나 마주친 적이 있는 무혁의 후견인, 조원식이었다.
“전부 알고 있었어요?”
민재의 물음에 그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제 사정을 들키지 않으려 그리도 안간힘을 썼건만, 아무리 뛰어도 결국 이 남자의 손바닥 안을 벗어날 길이 없다.
“이유야 어찌 됐든 넌 날 버렸어. 자기 후계자로 삼겠노라 공언했던 그 남자에겐 이게 가장 좋은 복수가 될 테지.”
냉랭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는 애정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혁은 물기 없는 차가운 눈으로 민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얘기했잖아. 이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결혼이라고.”
이제는 제 딸과 결혼시켜 목줄을 걸 속내겠지만 고분고분하게 당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뒤에서 억지로 갈라놓았던 옛 연인과 결혼해버리면, 적어도 완벽하기만 한 조원식의 낯짝에 더할 나위 없는 오점을 남길 수 있다는 건데.
“하지만 난!”
“소영하는 이미 널 버렸어.”
무혁은 잔인한 현실을 들이밀며 민재의 마음을 짓밟았다.
아니라고 반박하기에는 뼈아픈 현실에 더욱 속이 쓰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민재는 무혁의 제안을 절대 거부할 수 없다.
법정에서는 독사보다 더 지독하다고. A&Z의 변호사들은 재판만 치르고 나면 무혁의 욕을 달고 살았다.
적으로 만나면 얼마나 무서운 상대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덫에 걸린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니까 선배는, 복수 때문에 저랑 결혼하겠단 거예요?”
“그래. 아마 본격적으로 조원식과 대립하기 위해서는 여지조차 남기지 않을 거야.”
그걸 위해서라면 마음에도 없는 결혼조차 불사할 거라고.
이미 단단히 각오한 그를 보니 민재도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을 길게 줄 수는 없어. 내일까지 결정해.”
자신과 결혼할 건지. 아니면 이 거짓말을 모두 밝힐 건지.
그는 담담히 민재의 손에 선택권을 넘겼다.
***
문 변호사가 낸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간 모양이다.
무혁의 집을 떠나 집에 도착할 즈음, 소영하의 새 영화 시사회를 보러 간 오 대리에게서 뒤늦게 전화가 걸려 왔다.
“결혼이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됐어.”
“영하 님은 어쩌고? 설마 헤어진 거야?”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밀로 하고 있지만, 민재의 유일한 대나무숲이 되어준 건 오 대리였다.
본의 아니게 들키는 바람에 알게 됐지만, 소영하의 사인은 물론 일본 팬클럽 전용 화보집까지 구해다 준 덕분에 오 대리는 지금껏 기꺼이 입을 다물고 민재의 편이 되어줬다.
“그런 거 같아.”
연애 경험이 많지 않은 탓인지 민재는 이별하는 법을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무혁과 헤어질 때는 그녀 역시 너무 어렸기에, 어떻게든 거짓말을 지어내는 식으로 달아났었다.
- 저 임신했어요. 선배랑은 상관없는 아이예요.
- 민재야.
- 다른 남자가 생겼어요.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니까, 제발 헤어져 주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는데. 필사적인 민재를 보다 못한 무혁은 생각보다 순순히 민재를 놓아줬다.
언제 또 조 변호사가 찾아올지 몰라서, 휴학한 뒤로는 한동안 집 밖에도 나가지 못했다.
- 판단 잘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다치는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인자한 얼굴로 건넨 살벌한 경고가 무서웠다.
외가 쪽 식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곱씹을 때마다 어린 민재는 한없이 겁에 질렸다.
-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만약 무혁에게 도움을 청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그는 천애 고아가 된 무혁을 지금껏 길러준 은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머니까지 쓰러지고 민재는 하루아침에 궁지에 몰린 쥐 신세가 됐다.
- 실망이다. 석민재.
사법고시를 포기하겠다는 말에 학과장 교수님은 분노에 차 민재의 머리에 재떨이를 던졌다.
그러고는 치료를 핑계로 불러다 속 사정을 캐묻기 시작했다.
휴학도 인정하지 않고, 아예 퇴학까지 감행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민재는 결국 모든 사정을 털어놓았다.
- 내 이럴 줄 알았지.
무섭게 몰아세우던 학과장 교수의 표정은 조원식의 이름이 나온 후에야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다른 이들 몰래 할머니의 병원 수속까지 도와줬다.
- 치료비 대신인 줄 알아.
구태의연한 명목까지 달아서 써준 화려한 추천서 덕분에 A&Z에 취업도 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쩌면 교수님은 일부러 민재를 도와줄 빌미를 만든 걸지도 모른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그때는 불같이 화를 내는 교수님을 앞에 두고 겁에 질렸지만, 덕분에 이제는 할머니 한 분을 건사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어른이 됐다.
어차피 지금처럼 소영하에게 질질 끌려다닐 바에야 차라리 무혁과 결혼해 하루 빨리 할머니를 안심시키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라는 건 원래 한번도 내 마음대로 굴러간 적이 없으니까.
반쯤 자포자기한 민재를 두고 오 대리가 물었다.
“영하 님도 알고 있어?”
“어차피 나한텐 관심도 없는걸.”
무심하게 온 문자 외에는 그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애초에 워낙에 바쁜 인간이다 보니, 한 번 프로모션을 돌기 시작하면 두세 달 정도는 아예 연락도 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다.
촬영 중에도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위인이니까.
그런 제멋대로인 남자에게 맞춰줄 만큼 속 좋은 여자였으니 사랑한다는 말도 참 쉽게 나왔을 것이다.
“이젠 내가 못 하겠어.”
소영하가 제 손으로 붙여둔 커다란 포스터의 끝을 잡고서, 민재는 단번에 잘난 얼굴을 반으로 찢어버렸다.
몇 번이나 약속을 어기고서 제멋대로 구는 이 남자의 장단에 더는 휘둘려주고 싶지 않다.
“뭐야, 차라리 찢을 거면 날 줘!”
“많으니까 가져가. 이제 다 필요 없어.”
결혼 문제를 얼버무렸다고 안도할 테지만 아무리 잘난 소영하라고 해도 한 번 지나간 버스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설령 기자가 소영하와 찍힌 사진을 공개한다고 해도, 무혁이 있는 한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터.
‘정말 거절할 수가 없네.’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영하의 소속사인 HS엔터도 더는 군말없이 모든 일을 없던 일로 되돌려줄 것이다.
이대로 끝이구나. 해묵은 미련을 정리하고 나니 차라리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졌다.
물건을 정리하며 티비를 켜자, 참 보기 싫은 소영하는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화면 안에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떠들기 바빴다.
[제 애인은 오직 사랑하는 팬들뿐인걸요.]
“어련하시겠어.”
갑자기 또 어느 광고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이제는 티비를 보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외국에 나가 살면 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말로만 지껄이는 저 달콤한 말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사랑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지.”
소영하처럼 알량한 사랑 타령을 늘어놓았다면 오히려 거북했을 텐데, 무혁은 딱 잘라 이 결혼이 거래란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말처럼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서 하는 거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기자가 회사까지 찾아온 이상, 이 상황을 넘길 방법은 무혁과의 가짜 결혼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선뜻 그가 던진 미끼를 무는 건 쉽지 않다.
차가운 그의 태도가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헤어지던 날. 미련이 뚝뚝 남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당당히 민재를 이용하겠다고 나섰다.
어쩌면 진무혁을 그렇게 만든 건 민재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
언제 또 기자가 찾아올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민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조용히 울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은 건지, 그 좋은 학교를 나오고도 누구 하나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당장 내일 아침 기사에 제 이름이 실리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때늦은 후회가 민재의 결심을 더욱 부추겼다.
***
“눈이 부었네.”
아무리 힘들어도 아침은 온다더니, 밤사이 여기저기에서 온 연락들을 확인하고서 민재는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석민재,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결혼한다는 게 진짜 진무혁이었어? 와, 너 진짜 너무 한다.]
지난번 함께 술자리를 했던 동기들에게 원망의 메시지가 줄줄이 와 있었다.
“다행이네. 기사는 안 난 모양이라.”
칫솔을 문 채 민재는 아예 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고작 하룻밤 사이였는데, 이 바닥도 은근히 좁아서 그런지 이런 류의 소문은 잘도 퍼졌다.
“다들 이런 게 재밌는 걸까.”
흥미를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민재 본인보다는 진무혁의 이름값 때문일 것이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종종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적어도 이 바닥에서만큼은 그도 소영하 만큼이나 유명인사다.
그런 사람과 결혼한다는 말이 나왔으니 오죽할까.
괜히 늦게 가기라도 했다간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 테니 오늘은 아예 일찌감치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는데 길에 선 남자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헛기침했다.
“선배?”
그가 여기는 어쩐 일일까. 이 이른 시간에 무혁은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새하얀 세단에 기댄 채 불만 가득한 얼굴로 민재를 마주했다.
“왜 답이 없어.”
“네?”
설마 하며 폰을 확인하니 온갖 대화창 사이에 무혁에게 온 메시지가 섞여 있었다.
[데려다줄게. 몇 시까지 가면 되는지 알려줘.]
새벽에 온 연락에 답이 없으니 아예 일찌감치 마중을 나온 모양이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예요?”
“한 시간 정도. 불이 켜져 있길래 언제 나오나 싶었지.”
한 시간 전이라면 해도 뜨지 않았을 때인데, 이제 보니 차가운 아침 공기 탓에 얼굴이 차갑게 얼어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바깥 일에는 유능하다는데 이런 면에는 참 요령이 없다.
“그냥 가도 되는데.”
“일단 타. 커피는 이미 다 식었지만, 그래도 못 마실 정도는 아닐 거야.”
생각지도 못한 친절이 낯설었다. 남들 눈을 피해 만나야 했던 탓에 소영하와는 이런 사소한 즐거움 한번 함께 누려본 적이 없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토스트와 커피를 보니 정말 한 시간은 넘게 기다린 모양인데.
무혁은 일부러 민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앞만 보며 운전에 전념했다.
“안 피곤해요?”
“피곤하면 한숨 더 자던가.”
슬그머니 히터까지 켜는 걸 보니 아예 아침을 먹이고 재울 생각이 만만인 모양이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지만, 햄치즈 토스트는 눈물이 날 만큼 맛있었다.
“정말 자도 돼요?”
“도착하면 깨워줄게.”
대답을 종용하지 않는 것마저도 예전과 변함이 없다.
반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고 민재는 아예 좌석을 뒤로 젖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억지로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정말 피곤이 밀려와 잠이 쏟아졌다.
‘결혼하자, 석민재.’
어쩌면 이 모든 건 꿈이 아닐까. 결혼이 엎어진 뒤 거짓말처럼 찾아온 무혁의 존재가 참 낯설면서도 신기하다.
정확히는 너무 오랜만에 받아보는 이런 사소한 친절조차 지금의 민재에게는 참 낯설기만 했다.
분명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사랑에 목말라 있었을 거라고는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랑 같은 건 관심 없다는 그의 냉정한 제안을 듣고도 어쩐지 심장은 제 뜻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왜 일부러 날 찾아온 거예요?”
눈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민재는 눈을 감은 채 그에게 물었다.
정식으로 그의 제안을 수락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은 확인하고 싶었다.
“선배라면 굳이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상대는 얼마든지 고를 수 있잖아요.”
두 사람이 사귀던 시절에도 무혁을 노리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헤어진 후에도 몇 번이나 그와 어울리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글쎄, 왜 석민재일까.”
일부러 신경을 긁는 질문을 던져봐도 능구렁이 같은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다시 눈을 번쩍 뜨기 무섭게 차가 어두운 터널로 진입했다.
군데군데 박혀 있는 오렌지빛 조명 아래로 굳어버린 무혁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정말 듣고 싶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겁쟁이인 제 속을 훤히 읽는 그가 참으로 얄밉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의 속은 알 수 없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이제 더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거야.’
긴 밤 동안 내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라, 지금은 이게 소금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실 수밖에 없다.
“그 계약. 어떻게 하면 돼요?”
민재의 물음에 무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