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랑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민재 씨가 죽어도 입을 안 열더라니. 설마 결혼한다는 사람이 진 검사였어?”
낯 두꺼운 문 변호사는 돌리는 법도 없이 대놓고 말을 꺼냈다.
민재는 이런 곤란한 상황을 넘기는 것에 익숙했다.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다.
무혁은 입을 꽉 다문 민재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도 사정이 있으니까요. 아마 문 변호사님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무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럴듯한 말을 꺼냈다.
대놓고 말하지 않는 대신 상대가 추측하게 만드는, 능구렁이 같은 태도가 참 자연스럽다.
법정에서도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라더니.
어설픈 자신과 달리, 진무혁은 배우인 소영하만큼이나 훌륭한 연기자일지도 모른다.
“……뭡니까, 이건?”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김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민재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그의 손에 들린 사진에 손을 뻗었다.
“업무상 기밀과 관련해서는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정식 취재는 언론 대응팀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김영룡 기자님.”
기자라는 말이 나오자 주변의 시선이 절로 따가워졌다.
게다가 상대는 가십 취재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문 변호사는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며 제 명함을 꺼냈다.
“A&Z 시니어 변호사 문성흽니다.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네요.”
로펌A&Z의 고객 중 하나인 HS엔터와도 기사 문제로 몇 번이나 소송이 붙었던 탓에 그녀 역시 김영룡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이미 재판 중인 사건의 전담 변호사가 나서자 김 기자도 더는 나서지 못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요.”
굳이 다음을 기약하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악명 높은 기자가 하필이면 민재를 찾아온 걸 두고 문 변호사는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송까진 아직 꽤 남았을 텐데. 저 인간이 민재 씨는 왜 찾는 거야?”
“지난번 소송 가지고 꼬투리 잡을 거리를 찾나 봐요. HS엔터 건이요.”
그동안 이 일을 하며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적당한 핑계를 대며 상황 수습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조차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 소영하가 결혼 얘기를 꺼낸 것도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위치가 위치니 만큼 자칫 어딘가에 폭로라도 했다가는 직장을 잃게 될 거다.
할머니의 병원비를 대야 하는 민재로서는 참혹한 제 처지에 대해 하소연조차 할 수 없다.
“문 변호사님 덕분에 잘 넘겼습니다. 감사합니다.”
돌발 상황에 반쯤 얼이 나간 민재 대신 무혁이 나섰다.
뻣뻣하기로 소문난 그가 깍듯이 감사를 표하자, 문 변호사는 싫지 않은 듯 웃음을 터트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지 말고 어서 국수나 먹게 해줘. 상대가 진 검사인 줄도 모르고 우리 새끼 변호사들 불쌍해서 어떡해.”
“네?”
“그럼 내일 봐.”
뭐가 그리 재미있는 건지. 전화기를 꽉 쥔 걸 보니, 아마 오늘 밤 안에 온 회사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될 거다.
기자를 어떻게든 따돌린 건 다행이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조용히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가자. 민재야.”
어느새 무혁의 큰 손이 제 어깨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민재는 숨을 꼴깍 삼킨 채 곁에 선 무혁을 올려다봤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당장 눈앞의 늑대를 피하려다, 어느새 호랑이의 아가리 속에 제발로 걸어들어온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강남 모 호텔에서 열린 행사가 끝나고 서원대 출신 법조인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조 대표께서는 좋으시겠습니다? 지난번 제습기 사건도 결국은 승소하셨으니 말입니다.”
혜성전자에서 판매한 제습기 필터에 오염이 생겨 사망자만 서른 명이 넘게 나온 사건이었다.
2심까지만 해도 막대한 배상금이 책정됐지만, 법무법인 조조가 개입한 3심에서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기업에 무죄를 선고했다.
“어차피 곧 장례 치를 노인 몇 명이 죽은 걸 가지고 엄살은, 하여튼 이런 일만 생기면 한 몫 단단히 잡아보려는 놈들이 설치니 말이오.”
“어허. 대법관께서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번 판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이에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조 변호사는 금박이 새겨진 명함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임기가 채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조 대표는 기꺼이 혜성그룹과 대법관 사이에 다리를 놔 줬다.
“아드님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조 대표 덕에 한시름 덜었지. 우리 집사람이 아주 좋아하지 뭔가.”
조원식 변호사의 인맥 관리는 비단 본인에만 그치지 않는다.
도피유학을 떠나 망나니처럼 사는 그의 아들에게 취업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조원식 변호사다.
대표가 직접 크고 작은 민원을 해결해주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 역시 ‘조 변호사의 부탁’이라면 언제든 기꺼이 들어주곤 한다.
이번 재판 역시 그 모든 일상적인 일의 일환이었다.
“큰 재판도 이겼겠다, 이제 조조도 곧 A&Z를 따라잡겠구먼.”
매머드급 규모를 자랑하는 A&Z와 달리 법무법인 조조는 철저히 대표 조원식 변호사의 능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 쏟아져도 조 변호사는 선배인 대법관들 앞에 겸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무혁이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간판만 안 떨어지도록 잘 간수할 생각입니다.”
“하여튼, 조 대표. 사람 좋은 건 알아줘야지.”
“아무리 사법연수원 동기라지만 남의 새끼를 데려다 회사까지 물려줄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한이 그 친구의 아들이니까요.”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진이한 검사는 검찰 내에서도 촉망받는 엘리트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조직폭력집단 ‘독사파’를 괴멸시키며 최연소 부장검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였다.
원인 모를 차량 충돌 사고로 진 검사 부부가 숨을 거두고 수사는 자연스레 흐지부지됐다.
항간에는 진 검사의 죽음이 독사파의 복수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탓에 누구 하나 쉽사리 무혁을 맡겠다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천애고아 신세라, 홀로 남은 무혁을 맡아 키운 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 변호사였다.
“이한이 그 친구의 아들은 제 자식이나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그럼 진무혁이 장미랑 결혼해 조조를 물려받으면 되겠구먼.”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던 그도 자식 문제만은 예외였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겨우 얻은 건 외동딸인 장미뿐이다.
입양 절차를 밟지 않은 것도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 위한 조 대표의 꿍꿍이라는 사실을, 굳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암요. 그러라고 검찰에 보냈던 거니까요.”
제 아버지를 닮아 무혁은 기대한 것 이상의 성과를 보여줬다.
특히나 A&Z 킬러라고 불릴 만큼 내로라하는 변호사들도 유독 진무혁 손에만 걸리면 줄줄이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그간 기업 소송에 다소 취약했던 법무법인 조조에 있어 무혁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재원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국에 들어왔단 얘기가 있던데. 언제쯤 보여주실 참인가?”
“차근차근 진행해야지요.”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서 조 변호사는 싸늘했던 무혁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녀석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예전에도 말을 잘 듣는 건 아니었지만 머리가 커가며 점점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허락도 없이 유학길에 오른 것도 모자라 진작 돌아오라고 할 때는 소식 하나 없었던 주제에 무혁은 돌연 연락도 없이 한국에 돌아왔다.
어쩜 그런 점마저 제 아비를 닮은 건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했다.
- 아무리 네가 내 친구라 해도, 아닌 건 아닌 거야.
자신을 궁지로 몰았던 친구의 마지막 말이 여전히 뇌리에 남았다.
그토록 자신을 경멸했던 진이한의 자식과 제 딸을 결혼시켜 자신의 뒤를 잇게 할 것이다.
죽고 없는 옛 친구의 자식을 애지중지 키운 건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끝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던 옛 친우도 무덤 속에서 마음 편히 눈을 감지는 못할 터.
‘그런 네 아들이 내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걷게 된다면, 그때 이한이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분명 모든 것이 순조로웠건만 무혁이 때아닌 반항을 시작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조 변호사는 이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고작 길 하나를 건너 또다시 무혁의 집에 돌아왔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민재는 그동안 쌓인 사정을 털어놨다.
“처음부터 사귈 생각은 아니었어요.”
첫 만남 이후로 소영하는 끈질기게 연락을 넣어대곤 했다.
애써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 유명인에, 하필이면 그는 민재의 직장과도 인연이 있었다.
- 어라, 또 만났네요. 석민재 씨.
업무차 HS엔터에 방문한 후에야 그의 소속사임을 알았다.
사람들 앞에서 너무 친근하게 구니 곤란해서 민재는 초장에 딱 잘라 거절의 뜻을 표했다.
- 전 연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그럴 여유도 없고요.
눈앞에 앉은 톱스타를 두고 민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연애 따위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가져본 적이 없다.
아니, 결혼이란 단어조차도 제게는 사치처럼 느껴졌었다.
- 잘됐네. 그러니 더더욱 나랑 만나야지.
- 네?
병원에 계신 할머니 얘기까지 꺼냈음에도, 소영하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민재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 이 대한민국에 나보다 나은 남편감은 없을 것 같은데?
자기가 잘났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남자다.
소영하 정도의 연예인이 일 년에 얼마나 버는지는 그가 찍는 광고의 개수만 봐도 능히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니까.
만약 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라면 할머니도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 나는 소영하야.
그 대단한 사람이 자기 이름을 걸며 유혹해왔다.
할머니가 쓰러진 이후로 기댈 곳 하나 없이 혼자 버티던 민재에게 그는 너무나 달콤한 미끼였다.
“무서웠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그러면 정말 난 혼자가 되는 거니까.”
대중 앞에 나서는 그에게는 입이 무거운 연인이 필요했고, 민재에게는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동안 줄곧 참고 견뎌온 것도 억울하건만, 기자까지 찾아온 이상 더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어차피 아쉬운 건 내 쪽이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결혼 같은 건…….”
“할머니를 안심시킬 수 있는 결혼 상대가 필요했다는 거지.”
“네. 그것뿐이에요.”
지난 이 년 간 정말로 소영하를 사랑하긴 했던 걸까?
사랑과 외로움은 분명 다른 감정인데,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받고도 아무 느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알았다.
“사랑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냥 할머니를 안심시킬 수만 있으면. 그거면 충분했는데.”
밑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추한 본심이 드러났다. 이 연애는 시작부터 완전히 글러 먹었다.
그가 입 무거운 민재를 연애 상대로 택한 것도 분명 자신과 마찬가지였으리라.
변명이 다분한 민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며 무혁은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설탕 하나 넣지 않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뜨거운 액체를 한 모금 머금은 후에야 겨우 이성이 돌아와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반질반질한 대리석과 화사한 빛의 조명. 대학 시절 그가 살던 오피스텔은 좀 더 썰렁했던 것만 같은데 이 집은 어쩐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다.
‘변했구나.’
반질반질한 소파의 가죽을 만지작거리며 민재는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이제는 달라진 서로의 위치가 더욱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야?”
그러게,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옹색하기 짝이 없는 제 처지 탓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무혁이 애인 행세를 해주긴 했지만, 문 변호사가 안 이상 분명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터.
“거짓말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이번 일의 후폭풍은 쉽사리 사그라들진 않을 것이다.
할머니 앞에서도, 그리고 지금마저도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지고 말았다.
다시 만난 옛 애인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고개 숙인 민재를 보며 무혁은 쥐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놨다.
“괜찮아. 딱히 널 위해서 한 일은 아니니까.”
다정함 따위는 손톱만큼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말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고개를 들자, 무혁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오만한 눈으로 민재를 내려다보고 있다.
“결국 넌 할머니가 안심할 수 있는 상대라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다는 거니까.”
“선배!”
“내 말이 틀렸어? 너도 그 남자도 서로를 사랑한 게 아니야. 그저 서로를 이용했을 뿐이지.”
일부러 상처 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무혁은 조목조목 민재의 상처를 헤집었다.
소영하에게 자신은 그저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머리로는 모두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그걸 굳이 진무혁의 입으로 듣고 싶진 않았다.
“저는…….”
“그 남자 대신 날 선택해.”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민재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삼켜보려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으려던 찰나 무혁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선배?”
“결혼하자, 석민재.”
제법 나는 키 차이 탓에 그늘이 졌다.
무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민재의 어깨를 그대로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