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제 약혼자예요.
“야, 너 자꾸 이런 거 자꾸 시킬래?”
무혁의 동기, 한용식 변호사는 불륜과 이혼 소송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뒷조사는 기본에 모르는 게 없는 위인이라 무혁은 곧장 그에게 소영하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돈은 입금됐을 텐데?”
“이 자식이. 나도 일단은 변호사거든? 내가 무슨 흥신소인 줄 알아?”
사내 녀석에게 친절을 베풀 이유는 없으니 무혁의 태도는 오만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돈만 많이 주면 뭐든 하자’가 그의 신조인 만큼 용식은 투덜대면서도 금방 소영하의 근황에 대해 알려줬다.
“너도 알다시피 혜성 그룹 장남의 현금줄이 HS엔터니까. 요즘 여기저기 줄을 대는 모양이던데?”
“그래?”
“거기 간판이 소영하니까. 이번에 대작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나름 필사적인 모양이야.”
소속사나 본인은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소영하에게 일반인 여자친구가 존재한다는 그것까지는 어느 정도 알려진 모양이었다.
“중요한 시기니까. 네 말대로 갑자기 결혼 같은 소리가 새어 나오기라도 했다간, 당장 투자자들부터 뒤집힐걸?”
“그렇단 말이지.”
돌아가는 사정은 대강 짐작이 갔다.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를 하루빨리 안심시키고 싶었던 민재는 결혼을 서둘렀을 테지만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썩은 동아줄을 잡아버린 셈이다.
“연예인이라.”
자기 딴에는 고르고 고른 남자일 테지만 그 남자는 왕자님이 아닌 개구리란 사실을 그 똑똑한 여자가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면 이런 선택을 할 만큼 궁지에 몰렸던 걸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이후로 민재의 작은 손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정말로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게 된다면?
그녀는 정말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영하가 결혼한단 얘기는 이제 없던 일이 될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런 게 있어.”
아무래도 일이 골치 아파질 모양인데.
전화를 끊고 무혁은 우선 텅 빈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마트로 향했다.
일이 이 지경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민재는 밥 한술 제대로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여자니까. 요리에 취미가 생겼던 것도 전적으로 입이 짧은 석민재 때문이었다.
‘이놈이란 말이지.’
마트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매대 곳곳에 소영하의 사진이 박혀 있다.
카레 봉지에 선명하게 새겨진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고서 무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단한 연예인이라더니, 반반하게 생겼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힘들다.
다만 지나치게 과장된 인위적인 미소가 싫어서 무혁은 일부러 그 옆에 있는 밋밋한 무늬의 카레를 집어 들었다.
“우리 영하 님도 잘생겼지만, 총각도 참 잘생겼네. 우유 한 잔 맛봐. 싸게 해줄게.”
우유를 사러 오니 냉장고 앞에는 아예 소영하의 대형 등신대가 서 있었다.
시식용 우유를 억지로 받아들고 무혁은 괜히 판넬을 째려봤다.
가는 곳마다 안 보이는 곳이 없으니,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다름 없다.
돌덩어리처럼 입이 무거운 석민재였으니 지금껏 비밀을 지킬 수 있었을 테지만.
“야, 무혁아 큰일났다.”
트렁크에 짐을 싣던 중, 갑자기 용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야.”
“벌써 기자들 사이에 말이 돈 모양이야. 당장 내일 조간에 터질 모양인데?”
원래도 HS엔터와 사이가 좋지 않은 기자 하나가 소영하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오늘 직접 여자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며 데스크에 일갈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아무래도 서두르지 않으면 곤란해질 모양이다.
“알았어.”
“설마 석민재냐?”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친구의 물음에 무혁은 대답 대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석민재. 매사에 이성적인 그도 민재와 관련된 일이면 유독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무래도 여유를 부릴 시간 같은 건 없는 모양이니까.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곧장 차에 올랐다.
***
- 이름만 보고 남자분인 줄 알았는데, 뜻밖이네요.
중고 물건을 거래하러 나왔을 때, 그걸 사러 나온 사람이 하필이면 연예인일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안 팀장이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았다는 한정판 스마트폰을 대신 팔아주러 나왔던 날.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도 민재는 제 앞에 선 남자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 우리나라에선 오백 대 밖에 안 풀린 물건인데, 하필이면 해외 촬영이 있어서 예약을 놓쳤지 뭐에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굳이 직접 사러 나올 정도로 전자기기를 좋아하는 얼리어답터라고 했다.
어린아이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신이 난 남자를 보며 민재는 간단히 용무를 정리했다.
- 물건 확인하셨으면 이쪽 계좌로 입금해주세요.
- 저기요, 나 몰라요?
충분히 놀랐고 충분히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얼굴에 드러나진 않았나 보다.
일부러 선글라스를 벗으려는 손을 애써 뜯어말리고서 민재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 아니까 벗지 마세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하긴, 그건 좀 곤란하겠죠?
민재가 넘긴 휴대폰을 꽉 쥔 채 남자는 굳이 커피를 사겠노라며 민재를 카페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행여 누가 볼까 싶어 민재는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 확인하셨으니까 전 이만 실례할게요.
- 사진 안 찍어요?
- 네?
- 그래도 사인해달라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 어떤 대접을 받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민재는 애초에 연예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
- 그쪽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는 몰라도 저한텐 그냥 거래하러 나온 사람이에요.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정말 별 느낌 없어요?
-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잘도 하네요.
무심결에 튀어나온 본심이었다.
언짢은 기색이 보일까 싶어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소영하는 화를 내는 대신 폭소를 터트렸다.
한참을 소리 내서 신나게 웃고 난 그는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미소를 머금고서 민재의 잔에 제 잔을 튕겼다.
- 신기하네요. 요 몇 년간 날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민재 씨가 처음이에요.
-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던 모양이네요.
숨만 잘못 쉬어도 구설에 오르는 게 연예인이다.
국내 최고의 로펌에서 일하며 톱스타들과 관련된 소송은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보니 민재도 그쪽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세간에 떠도는 가쉽 기사들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지는지, 그리고 그런 뉴스들 속에 은밀하게 숨은 사실들이 어떻게 묻히는지도 똑똑히 봤다.
남의 비밀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윗사람들은 민재가 입이 무겁다는 점을 유독 높이 샀다.
굳이 타인에게 쓸데없는 호기심을 품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폭력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뿐인데 저 대단하신 한류 스타께서는 그 점에 무척 감격한 기세였다.
- 뭐 그래도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 민재 씨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네요.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과 달콤한 미소에 넘어가지 말아야 했는데.
너는 특별하다며 속삭이던 입바른 소리를 믿은 자신이 어리석었다.
“진짜 안 갈 거야?”
오 대리는 민재의 속도 모르고서 퇴근 직전까지 시사회에 함께 가자며 졸라댔다.
“약속 있어.”
어차피 모두 끝난 마당에 굳이 거기를 왜 갈까.
오 대리를 먼저 보내고서, 민재는 할머니가 계시는 병원에 전화부터 걸었다.
“할머님 상태는 많이 좋아지셨어요. 결혼 소식 듣고 많이 기쁘셨던 모양이에요.”
“그랬군요.”
간호사의 밝은 목소리에도 웃을 수 없다.
줄곧 얼버무리기만 하던 손녀가 미덥지 못했던 건지, 그동안 할머니는 몇 번이고 민재에게 되물었다.
- 정말로 결혼하는 게 맞는 거니?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던 것도 그래서였는데.
너만은 특별하다며 입에 발린 소리를 지껄일 때는 언제고 소영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말을 바꿨다.
“개새끼.”
이번 영화는 정말로 중요한 건이라고. 그렇게 수많은 중요한 건들 앞에서 민재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만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의 연인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거라고.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니 할머니 앞에 데려갈 결혼 상대로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민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아까는 인터뷰 때문에 급하게 끊었어.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해. 사랑해.]
“사랑 좋아하시네.”
이 지겨운 가짜 사랑 놀음도 이젠 끝이다.
습관적으로 덧붙인 것 같은 저 세 글자에 진심 따위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입버릇처럼 늘어놓는 저 달콤한 말을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할머니를 잘 부탁한다는 연락을 해두고 민재는 창 너머 주상복합 아파트를 바라봤다.
“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
진무혁을 무작정 피하려고 했지만, 할머니의 증상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말에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로 이게 효과가 있다면 당분간만이라도 이 오해를 풀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무혁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드린다면 할머니도 조금은 안심하실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아주 약간의 거짓말 정도는 죄가 되지 않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말을 꺼내기에는 냉정하게 외면했던 과거가 마음에 밟혔다.
잔인했던 이별 이후, 이런 식으로 무혁을 마주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그렇게 헤어진 것도 모자라 몇 년이나 피해 다녔던 주제에.
이제 와 가짜 약혼자 노릇을 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하진 못하다.
“역시 이건 아니야.”
그냥 어제 있었던 일은 잊어달라고, 모두 없었던 일로 하자.
무거운 결심을 안고 사원증을 찍은 후 로비로 걸어나올 즈음이었다.
“석민재 씨죠?”
퇴근 시간이 겹쳐 분주하던 중 낯선 중년 남자가 말을 걸었다.
얼핏 보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서 남자는 민재 앞에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스타커넥트 연예부 김영룡 기자]
연예인 가쉽을 다루기로 유명한 신문에 김영룡 기자라는 이름은 민재도 분명 들은 기억이 있다.
“소영하 씨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얘기 좀 하죠.”
“누구시죠?”
경계하는 민재를 앞에 두고서 남자는 품에 숨겨둔 사진 하나를 내보였다.
사진을 보는 순간 민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을 잡고 나란히 집 밖으로 나오는 모습.
이 사진만으로는 소영하라는 걸 알아볼 수 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저쪽은 뭔가 알고 온 게 분명하다.
“무슨 의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다 알고 왔습니다. 석민재 씨. 소영하 씨와 아주 가까워 보이시던데요.”
설마 기자에게 사진이 찍혔을 줄은 몰랐는데.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더욱 어지러웠다.
“여기가 어딘 줄은 아세요?”
“암, 아니까 이렇게 찾아왔지요. 이제 퇴근하시는 모양이니 어디 조용한 카페라도 가서 천천히 이야기 좀 나누시죠.”
민재는 폰을 꽉 쥐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기자가 직접 증거를 쥐고서 여기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뭐라고 상의할 틈도 주지 않고서 기자는 민재에게 무언가를 캐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모면하면 좋을까.
눈앞에 깜깜해졌다.
“어, 저거 진무혁 아니야?”
머릿속이 더 복잡해질 즈음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설마 싶어 고개를 들자 건물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 익숙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건물 전체가 같은 업계 종사자다 보니 민재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그의 모습을 알아봤다.
동부지검 형사 5부에 있을 때부터 A&Z의 베테랑 변호사들을 줄줄이 물 먹인 장본인이다.
“민재야.”
낯선 남자에게 잡혀 곤란한 상황을 금방 알아챈 건지, 무혁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곧장 민재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야?”
“그게 말이죠.”
기자의 존재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데, 막 퇴근하던 문성희 변호사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진 검사 아니야?”
“안녕하세요. 문 변호사님.”
몇 년 전 문 변호사 역시 무혁과의 재판에서 제대로 털렸던 탓에 대놓고 아는 체를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가뜩이나 미운털이 박혔는데 진무혁과 함께 있으니, 그녀는 평소처럼 민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서 이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한국엔 또 언제 들어온 거래, 그것도 우리 민재 씨랑. 아, 맞다. 둘이 사귀었다고 했었나?”
“문 변호사님!”
“안 그래도 우리 민재가 신세 많이 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에 선 기자를 무시하고서 무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두 사람이 같은 서원대 출신에 사귀었던 사이라는 건 이미 유명한 일이라서, 일부러 시비를 걸기 위해 한 말이었겠지만.
태연한 무혁의 대답에 문 변호사 쪽이 되려 당황한 기색이었다.
“우리 민재라니.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린데, 설마 민재 씨 결혼한다는 사람이 진무혁이었어?”
민재 대신, 문 변호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로비 전체에 울렸다.
아까부터 은근슬쩍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도 이젠 아예 대놓고 두 사람 쪽을 쳐다보고 나섰다.
“그게 사실입니까?”
진무혁이 누구인지 모르는 김 기자에게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무혁은 아무 말 않고 민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이 말하고 있다.
어제 할머니 앞에서 한 연기를 계속하자고.
그의 눈빛이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손을 잡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진무혁 씨, 제 약혼자예요.”
쥐어짜듯 꺼낸 그 한마디가 모든 상황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