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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4화 (4/103)

4화. 어제 일은 실수였어요.

업계 1위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A&Z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파혼의 슬픔에 빠질 틈도 없이, 오늘도 자리를 비우신 상사 덕분에 민재는 점심도 거르고 업무에 집중했다.

“덕분에 살았어. 이 신세는 단단히 갚을게.”

“괜찮아. 사인도 그렇고, 내가 자기한테 신세 진 게 얼만데.”

아래층에서 일하는 회계팀 오 대리가 바쁜 민재를 대신해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다 줬다.

“맞다. 이거 가져가.”

점심을 사다 준 대가로 민재는 처치 곤란인 시사회 티켓도 함께 건넸다.

“대박. 이건 또 언제 구한 거야?”

예상대로 소영하의 자칭 골수팬 오 대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와 사귄다는 사실을 아는 건 이 세상에 단 한 명. 오 대리뿐이지만 그녀는 뇌물을 받고 기꺼이 입을 다물어줬다.

그렇게 오 대리를 돌려보내고 쓴 커피만 한 모금 마셨다.

영화 촬영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해온 결혼 준비를 수습하는 것도 이제는 민재 혼자 짊어질 몫이 됐다.

“개자식.”

어차피 사람들은 모르는 연애였으니까.

만나는 건 그렇게 힘들었는데 헤어지는 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쉽다.

‘처음에는 만나만 달라고 사정했던 주제에.’

잡은 고기가 되니 소영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꿨고, 그렇게 민재 혼자 바보가 됐다.

얼굴에 분칠하는 것들은 믿지 말라던 문 변호사의 말처럼 이제는 소영하가 한 말 중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도 알 길이 없다.

무거운 마음을 애써 다스릴 즈음 무혁에게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끝나면 연락해. 데리러 갈 테니까.]

왜 이 남자는 이렇게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걸까.

이대로 피하기만 하다간 정말로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민재는 힘겹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떨렸다.

예전에도 늘 그랬듯 정확히 세 번 같은 음이 울리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일은 실수였어요.”

아무리 아쉬운 처지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 이렇게 기대는 게 아니었다.

자꾸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민재는 옹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선배 성격을 아니까 전화한 거예요. 기다리지 마세요.”

민재와 헤어진 후로 무혁에게 다가온 여자는 적지 않았지만, 누구도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지독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더욱 엮이면 안 된다고, 분명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네가 아침에 갈아입고 두고 간 속옷, 아직 내 집에 있는데.”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급하게 수화기에 손을 얹고 민재는 습관처럼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으니 망정이었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언성을 절로 높였다.

“제정신이에요?”

편의점에서 사 왔다는 새 속옷으로 갈아입은 것까진 좋은데 그걸 두고 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겁한 민재와 달리 무혁은 대수롭지 않게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침에 정신없이 뛰어나가느라 두고 간 네 잘못이지.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거면 달게 받아두고.”

“건드리지 마세요. 가지러 갈 테니까.”

이래서 이 남자가 싫은 거다.

손톱만큼의 빈틈을 보인 것만으로 그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제멋대로 제 마음을 헤집는다.

애써 피하려고 애를 써왔지만, 얼굴을 마주하면 무너져버리는 제 꼴이 참으로 우습다.

“퇴근하자마자 들릴 게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요.”

“분부대로 하지.”

전화를 끊고도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혁은 쉬이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게 대체.”

머리를 쓸어올리며 민재는 괜한 분을 삭혔다.

솔직한 말로 무혁이 미국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 앞으로 평생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일가친척 하나 없던 무혁을 맡아 키워준 건 아버지의 친구였던 조원식 변호사였다.

- 좋은 분이네요.

- ……정말 그렇게 생각해?

민재의 말에 무혁은 어쩐지 곤란한 미소만을 남겼다.

업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명인사인 만큼 분명 든든한 뒷배인데, 어쩐지 그는 양아버지나 다름없는 조 변호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 어서 시험에 붙어야지. 그래야 나도 숨을 쉴 수 있겠지.

조 변호사는 친아버지보다 더욱 그를 싸고돌았다.

친부모도 그러진 않을텐데, 수시로 학교를 드나들며 무혁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과시하곤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니 본인은 오죽했을까.

-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무혁은 오직 민재에게만 제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서일까.

검찰에 사표를 내고 돌연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올 것이 왔다고 여겼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왜 한국에 돌아온 걸까.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포스터 봤어? 때깔 죽이더라, 진짜.”

“당연히 봤지. 날이 갈수록 더 잘생겨지는 거 같아.”

문밖에서 떠드는 잡담 소리가 민재의 귀를 때렸다.

꼴도 보기 싫은 소영하는 왜 하필이면 연예인이라 사방에서 이렇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들려오는 건지 끔찍하기만 하다.

그래도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진무혁과 달리 소영하는 가끔 보면 아예 딴 세상 사람처럼 제멋대로 굴기 일쑤였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민재와 달리 소영하는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처음에는 그런 자유로움이 마냥 부러웠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구가 온전히 제 중심으로 돈다는 것처럼 안하무인이기만 했던 그에게 휘둘린 시간이 씁쓸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내 남자]

이제는 바꿔야만 할 이름의 번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만 이 비참한 연애도 내려놓을 때가 온 걸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어차피 피할 수 없으면 맞부딪칠 수밖에.

거리의 전광판이며 TV광고에 인터넷 배너까지, 대한민국에 살며 소영하의 모습을 보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야.”

“길게 통화는 못 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해요.”

어차피 파투가 날 거라면 변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예상대로 소영하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서 태연히 입을 열었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았어. 영화 막 개봉한 시점인데 지금 말이 나오는 건 곤란해.”

“또 그 레퍼토리지.”

그의 변명은 언제나 비슷했다. 중요한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민재는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소영하란 이름 석 자의 무게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제 일만 소중한 뻔뻔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민재는 이를 악물고 못다한 말을 쏟아냈다.

“할머니 병원에서 연락 왔어. 이제 정말 얼마 못 버티실 거야.”

늙고 병든 할머니의 심장이 언제까지 더 버텨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결혼을 서두른 이유도 오직 그런 할머니를 안심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자나 깨나 민재를 걱정하느라 병세가 더 나빠진 거라는 의사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하늘 아래 기댈 곳이라고는 할머니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일렀건만.

노골적으로 책망하는 민재의 말을 잠자코 듣던 소영하가 긴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그래서?”

“뭐?”

“소영하 씨,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스태프의 목소리에 전화는 예고도 없이 끊어졌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취급에 민재의 속은 더욱 썩어 문드러졌다.

만인의 연인이라며 잘도 떠들고 다니지만, 현실은 최악보다 더 밑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줄 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서 결혼해야 하는데, 유독 무혁을 반가워하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밝은 모습은 민재도 오랜만에 봤다. 티나게 안심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더욱 억장이 무너졌다.

‘만약 무혁 선배랑…….’

정말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할머니는 분명 기뻐하시겠지.

가짜라도 좋다.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면야 민재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건 아니야.”

그래도 진무혁은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뚜렷한 답이 보이지 않아서 민재는 키보드에 머리를 박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

평소에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소영하도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를 피할 수 없었다.

연예기자 김영룡은 살벌한 분위기를 마주하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돌발적인 인터뷰 질문은 사양하겠습니다.”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매니저의 경고에 아니꼬운 속내를 애써 삼키며 김 기자는 먼저 자리에 앉은 소영하를 바라봤다.

주변 사람들의 매서운 비호 속에서 본인은 사람 좋은 미소로 여유롭게 기자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 기자님.”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앉은, 소영하는 같은 남자조차 홀려버릴 만큼 매력적이다.

모니터나 렌즈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한들 이 남자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점만은 매사에 까탈스러운 김 기자조차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5년 연속 대한민국 미남 랭킹 일위 자리를 거머쥔, 누구에게 물어도 부정하는 사람이 없는 최고의 미남 배우.

“반갑습니다. 영하 씨. 거의 일 년 만이죠?”

새 작품이 나올 때가 아니면 외부에 얼굴 하나 내비치지 않을 만큼 비협조적인 대스타다.

까다로운 톱스타에게 도가 튼 김 기자도 소영하를 상대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럼 우선 작품 얘기부터 해볼까요?”

소영하의 소속사에서 전액을 출자한 이번 영화는 대자본을 출연한 블록버스터다.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 없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서 소영하는 황제처럼 우아한 몸놀림으로 다리를 꼰 채 상투적인 이야기를 읊어댔다.

“이게 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우리 팬분들 덕분이죠.”

교과서에서 찍어낸 것 같은 위선적인 대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래서 도발하기 위해 짓궂은 질문을 끼워 넣었다.

“팬들이라. 안 그래도 이번에 팬들 사이에 결혼설이 돌아서 한동안 골치 아프셨다면서요?”

날이 선 물음에 곧 뒤에 선 매니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에 비해 소영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본인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테랑 배우답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뗐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닌 건지. 워낙 근거가 없는 말이라 많이 놀라긴 했죠.”

분명히 확실한 정보를 받았음에도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퍽 자연스럽다.

연예인들을 꾸준히 봐 온 게 아니었다면 그 역시도 다른 사람들처럼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꽤 구체적이긴 했어요. 동년배의 일반인 여성과 제법 오래 교제하셨다면서요?”

김 기자도 이번 취재에는 제법 공을 들였다.

유력한 증언이 새어 나오며 이젠 제법 알 사람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가 됐건만, 정작 소속사 쪽에서는 모두 사실무근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 결혼은 어렵죠.”

딱 잘라 부정하는 그를 앞에 두고 김 기자는 슬그머니 낚시대를 드리웠다.

“하긴, 소영하 씨 팬분들이 좀 극성이시긴 하죠.”

친위대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극성맞은 팬덤은 소영하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못했다.

국회의원 하나가 소영하의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을 때는, 배우가 원치 않는 스킨십을 이유로 고발까지 진행한 전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정말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팬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말릴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당사자인 소영하 정도지만, 정작 그는 말리기는커녕 되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여러분의 사랑을 먹고 사는 저야 좋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건 곤란하니 말입니다.”

시비가 트일 요소를 원천차단하며 소영하는 유들유들한 미소로 모든 질문을 웃어넘겼다.

단 한마디로 좋으니 말실수를 해주기만 그토록 기다렸건만 그는 끝내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손톱만큼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뵈니 더 노련해지셨네요. 역시 김 기자님이에요.”

건수 하나 잡지 못한 채 돌아서자니 미련이 남건만, 소영하는 약을 올리려는 듯 그런 김 기자의 속을 대놓고 긁었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저렇게 모르쇠를 해버리니 되려 취재 본능이 들끓었다. 특종을 잡기 위해 카메라를 고쳐 매고서 김 기자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남자가 입을 안 열면 여자 쪽에서 입을 열게 만들어야지.”

어떻게든 천만 관객을 찍겠노라며 벼르고 있는 모양인데, 이렇게 된 이상 소영하와 일반인 여자친구의 투샷 정도는 던져줘야 한다.

만약 이번 스캔들이 제대로 터지게 된다면 그 파급력은 비단 국내에서만 끝나지 않을 터.

“사람이 말이야. 좋은 말로 할 때 알아들어야 하는데 말이지.”

그저 순순히 인정하고 납작 엎드리면 이쪽도 좋은 말로 예쁘게 포장해주는 정도는 해줬을 텐데.

이렇게 뻔뻔스럽게 전면부정을 하고 나서면 그 역시도 고분고분 입을 다물어줄 이유가 없다.

‘운이 좋았지.’

설마 이름만 듣고 남자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사실은 여자였을 줄 누가 알았을까.

“너 카메라 잘 들고 있어. 내가 가리키는 사람 잘 찍어야 해.”

“A&Z에는 갑자기 왜 오신 거예요?”

후배에게 카메라를 들려놓고서 그는 로비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멍청하기 짝이 없다지만 사진 실력 하나는 출중한 놈이다.

당장 새벽에라도 특종을 띄우면 내일부터는 온 나라가 뒤집힐 테니까.

‘두고 보라지.’

석민재. HS엔터의 법무대행을 맡고 있는 A&Z의 직원이자 소영하의 연인.

이 여자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면 소영하의 영화도 적잖은 타격을 입을 터.

이번 기회에 그 잘나신 콧대를 단단히 꺾어놓을 생각에, 김 기자는 한껏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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