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어차피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전화는 받기 직전에 끊어졌다. 아예 전원을 꺼버리고서 무혁은 벽에 걸린 시계부터 확인했다.
시간은 벌써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상대가 이름난 연예인이라더니, 내일 출근해야 하는 민재의 상황 따위는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
“소영하라고 했지.”
민재의 직장인 A&Z라면야 일로 얽힐 일도 많았을 테지만.
그래도 그런 거물과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침대에 걸터앉아, 무혁은 잠든 민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어지간하면 틈도 안 주는 주제에.”
몹시 지친 건지 그녀는 깨지도 않고 잘도 잤다.
험난했던 그와의 첫 연애만큼이나 여전히 그녀의 사랑은 가시밭길을 벗어날 길이 없는 모양이다.
요령이 좋은 듯하면서도 언제나 손해만 보는 여자라서.
몇 년 사이에 더 야윈 기색이 보인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겠지.”
이별 이후 민재가 필사적으로 제 눈에 띄지 않으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아봤을 때도 일부러 못 본 척하고 넘어갔다.
근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사법고시를 포기한다는 말에 학과장은 민재의 머리에 재떨이를 날렸지만, 졸업할 즈음에는 결국 A&Z에 추천서까지 써줬다고 했다.
출국하기 전, 인사차 잠시 A&Z에 들렸을 때도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봤었다.
‘불과 이 년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또래의 변호사들 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래도 회사 내에서 제법 입지가 생겼다고 듣긴 했다.
몇 년 사이 젖살이 빠진 건지 이젠 제법 어른스러운 분위기도 풍겼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는데.”
함께하지 못한 시간의 여백이 더욱 뼈저리게 다가왔다.
민재와 함께한 시절, 그때는 그 역시 아직 젖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철부지였다.
풋풋하기만 했던 첫사랑이라서.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아든 후에도 무혁은 단 한 순간도 민재를 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가는 깨져버릴 유리 같은 여자라서.
무혁은 흐트러진 민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왜 난 네 앞에선 이렇게 약해지는 걸까.”
애틋하기만 했던 첫사랑은 일방적인 이별 통보로 막을 내렸다.
사법고시 합격 발표가 난 지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지금도 그날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주머니 속의 반지를 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제 이름이 적힌 현수막 바로 아래에서 민재는 잔인한 말을 쏟아내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미련하게 혼자 다 짊어지고 말이야.”
다만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면서까지, 민재는 어떻게든 제 시야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래서 놓아줬다. 어설픈 거짓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가여워서, 그래서 물러난 것뿐이었다.
그때는 그게 그녀를 위한 길인 줄 알았다. 제 곁을 떠나서 다른 남자 품에 안겨 행복하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혼자 힘들어하길 바란 건 더더욱 아니다.
“이건 복수야.”
분명 아침이 오면 또다시 어떻게든 달아날 속셈이겠지만 이 지겨운 숨바꼭질도 이제는 막을 내려야 한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여전히 낮인 미국에서 파트너가 보낸 자료였다.
[그래서, 다음 계획이 뭐야?]
빽빽하게 쓰인 메일 마지막에 적힌 문장을 바라보며 무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그의 계획에 민재는 생각지도 못한 조커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빚 하나를 씌워뒀으니 이제는 민재가 무혁에게 도움을 줄 차례다.
“결혼이라.”
자의든 타의든 결혼은 이미 깨졌으니까.
이제는 그녀에게 때늦은 속죄의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마 이렇게 편하게 자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푹 자 두는 게 좋을 거야.”
민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무혁은 잘 자라는 인사를 대신했다.
***
“어제랑 옷이 같네.”
맞은편 사무실을 쓰는 시니어 변호사 문성희가 민재의 옷차림을 유심히 살폈다.
평소에도 은근히 시비를 걸어오며 어떻게든 시비를 걸고 싶은 모양이지만 민재는 태연히 받아쳤다.
“할머니 병원 다녀오느라고요.”
“아, 그랬었지 참.”
일부러 무안을 주지 않으면 일절로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제대로 이유를 말해도 어차피 멋대로 떠들고 다닐 테니 민재는 그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닫았다.
회사 안에서 민재는 이른바 개천에서 난 용으로 통했다.
학벌로는 어디 나가서 절대 꿇리지 않지만, 배지가 없는 이상 변호사들에게 대등한 대우를 받는 건 불가능하다.
십 년에 한 명 뽑을까 말까 한 자리라고 불리는 포지션이라, 어떻게든 민재를 밀어내고 자기 사람을 꽂고 싶어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질투와 시기 속에 몇 년을 버텼다.
진무혁의 애인 노릇을 하던 시절에 비하면야 오히려 회사 생활은 수월했다.
차라리 일이 꼬이는 편이 나았을 텐데.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보인 낯선 풍경만으로도 이미 등골이 서늘해졌다.
- 슬슬 일어나야 할 텐데.
처음에는 정말 꿈인 줄만 알았다.
눈을 뜬 순간 처음 보인 건 낯선 침대였다.
셔츠 한 장 걸치지 않은 진무혁의 어깨를 베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 선배!
- 너무 깊이 잠들어 깨울 수 없었어.
슬슬 출근 준비를 해야 할 거라는 말에 민재는 황급히 스마트폰부터 찾았다.
뒤늦게 전원을 켜고 시간을 확인하니 출근 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빠듯했다.
- 대체 여긴 어디예요?
- 내 집이야.
태연한 무혁의 대답을 무시하고 민재는 창문에 다가가 바깥 풍경을 살폈다. 바로 맞은편에 너무나 익숙한 A&Z의 로고가 박힌 고층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제 회사 바로 맞은 편에 살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샤워부터 해. 편의점에서 대강 필요한 건 사 왔어.
뭐라고 따질 틈도 주지 않고 무혁은 민재를 곧장 욕실로 밀어 넣었다.
편의점 로고가 그려진 봉투에 여성용 화장품과 갈아입을 속옷까지 준비해둔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상투적인 변명에도, 어쩐지 그의 손에 놀아났단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무혁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허락도 없이 들어와 깊이 숨겨둔 마음을 헤집곤 했다.
- 일단 출근부터 해.
뭐라고 말하려는 건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무혁의 태도에 입을 다물었다.
당장은 부랴부랴 도망치듯 뛰어나오기에 바빠서, 사무실 책상에 앉은 후에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 일을 어쩐다.”
결혼은 아예 없던 일이 되어버렸고, 그토록 피했던 무혁에게 신세까지 져버렸다.
거기다 할머니는 진무혁이 결혼 상대라고 완전히 오해해버렸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팀장님.”
“커피 한 잔 내려서 방으로 들어와. 웬일로 간밤에 푹 잔 모양이네.”
서둘러 거울부터 확인하니 정말로 잘 잔 건지 눈이 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몇 년 만에 깨지도 않고 달게 잠들긴 했었다.
그래도 그렇지. 옛 애인의 집에서 이렇게 외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젠 이것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건가.’
어차피 결혼은 어제부로 파투가 났으니까. 혼자 꿋꿋이 알아봐 주지도 않을 지조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는 건가?”
“없던 일로 해주세요.”
이제야 점점 실감이 났다.
원래대로라면 결혼식 때문에 휴가를 낼 참이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필요 없게 됐다.
딱 잘라 말하는 민재의 말에 팀장은 눈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게 일정을 표기했다.
“잘됐네. 네가 빠지면 나도 곤란했거든.”
민재보다 15년 선배인 민재의 상사, 안 팀장은 서원대 출신의 변호사다.
꼰대가 넘쳐나는 이 바닥에서 이례적으로 부하 직원의 사생활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럼 다음 케이스로 넘어가지.”
우여곡절조차 묻지 않고서 팀장은 곧장 본론으로 넘어가 줬다.
안 팀장은 원래도 로펌 내에 소문난 괴짜였다.
사법연수원 수석 졸업 후 판사로 일하다, 갑자기 이제 소송에는 관심이 없다며 배지가 무색한 행정 업무로 갈아탔다.
“오늘은 나도 대학 쪽에 강의 나가야 하니까, 무슨 일 있으면 문자 넣어놓고 알아서 적당히 하고 일찍 퇴근해.”
“네. 팀장님.”
판사 시절에도 워낙 튄다고 소문이 났을 만큼 대학 강의에 저술 활동까지 외부 활동을 일삼지만, 꼼꼼한 민재가 있어 회사 일에는 차질이 없었다.
대외적으로 이름난 안 팀장으로서는 실수 하나 없는 민재를 유독 아꼈다.
그런 든든한 팀장의 뒷배 아래 민재도 회사 안에서 마냥 무시만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밥 잘 챙겨 먹고. 그렇게 멍하니 있다 갓 들어온 어쏘들한테 까지 무시당할라.”
“제가 경력이 몇 년인데요. 안 그래요.”
초면에야 배지가 없다는 이유로 우습게 보일지라도 경력 없는 어쏘 변호사들 정도를 상대 못 할 만큼 어리숙하진 않다.
전관예우로 들어온 대단한 경력을 가진 법조인도 판사 출신인 안 팀장을 봐서 내부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는 시늉이라도 했다.
“요샌 우리 삐약이들이 안 덤비나 보지?”
되려 갓 로스쿨을 졸업한 햇병아리들은 오히려 대놓고 민재를 무시하며 나대곤 했다.
갓 졸업한 치기 어린 오만함이 실수를 만든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수습은 자연스레 민재의 몫이 된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을걸요.”
그걸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상대는 어느새 꼬리를 내리고 이쪽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몇 년째 반복되는 일이라 그조차도 익숙하다.
유난할 것도 없는 내용을 차분히 기록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팀장이 책상 위에 있는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영화 시사회 티켓이라는데 난 선약이 잡혀서 말이야. 오늘 저녁인데 친구랑 같이 다녀와.”
“시사회요?”
엉겁결에 받은 봉투를 열어봤다가 선명하게 프린트된 소영하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팬들은 이 티켓을 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테지만, 민재는 도무지 이 영화를 보러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곤란할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어?”
어지간하면 물리지 않는 민재의 거절에 팀장은 의아한 기색을 표했다.
뭐라고 변명하면 좋을까, 거짓말은 귀신같이 알아보는 팀장을 속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진무혁을 팔았다.
“아는 사람이 오랜만에 한국 왔다고, 저녁에 만나기로 해서요.”
의심 어린 그의 눈초리를 애써 피하며 민재는 손에 든 폰만 괜히 꽉 잡았다.
“흐응. 문 변이 자기 달라는 걸 일부러 안 줬는데. 대단한 상대인가 보지?”
“다음에 갈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됐어. 생색내려고 한 말은 아니니까,”
티켓은 회사 안의 아무에게나 주라고 해서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말투는 저렇게 퉁명스러워도 뒤끝은 없는 상사다.
꾸벅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선 후 민재는 죄 없는 제 폰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면 연락해.]
진무혁에게 온 메시지가 눈에 밟혀서 난감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미치겠네.”
아침 일찍 급하게 나온 탓에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왜 갑자기 한국에 돌아온 거지.”
그가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무슨 이유로 찾아온 건지 들었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 전화로 얘기하자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한데.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버겁기만 하건만.
머리가 아팠다.
***
허겁지겁 민재가 출근하고, 무혁은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내리고서 신문을 집어 들었다.
[혜성 그룹 상속 분쟁 재점화. 대규모 소송 예고]
한국에 들어온 건 비단 민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준비해 온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무혁은 기꺼이 새 클라이언트와 손을 잡았다.
소송 내용을 검토하던 중, 익숙한 번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제 귀국 소식이 그의 귀에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조원식 변호사]
어린 무혁을 데려와 아들처럼 키운, 법무법인 조조의 대표 조원식.
정계는 물론 재계에까지 두루 발이 넓은 그는 변호사 협회장도 몇 번이나 연임한 베테랑 변호사다.
그런 그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무혁에게도 나름대로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귀국 사실을 숨겼던 건데, 한숨을 한 번 쉬고서 무혁은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한국 들어왔다면서 연락도 안 하고. 섭섭하구나.”
자상함을 가장한 염려가 달갑지 않다. 무혁은 건조한 대답을 이어나갔다.
“바쁘실 것 같아서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절친한 친우였던 그는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된 무혁을 친아들처럼 키워줬다.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지. 나중에 잘 상대하려면 네 몸으로 직접 느껴보는 게 나을 게다.
연수원을 마치고 검사가 될 것을 권유한 것도 조 대표의 권유였다.
장차 사위로 삼아 회사마저도 넘겨주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조원식 변호사는 이번 혜성 그룹 후계자 경쟁에서 일찌감치 장남의 편을 들고 나섰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네 연락 하나를 못 받을까. 식사나 하자꾸나. 저녁에 잠시 들리거라.”
친아버지처럼 인자한 권유에도, 무혁은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전했다.
“선약이 있어서요.”
그런 태도에 언짢을 법도 한데 조 대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껄껄 웃기만 했다.
“녀석,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으니 바쁘겠지. 나중에 시간 정해서 연락 다오. 비워놓을 테니.”
“네. 그러겠습니다.”
“녀석 참. 미국물을 먹더니 더 싸늘해졌구나.”
아직 무혁의 계획을 모르니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거겠지만, 조 대표는 굳이 뼈 있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위선자.”
무슨 의도로 전화한 건지 뻔하다. 말 잘 듣는 개로 부리기 위한 수작질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조 변호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역시 민재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차피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그녀의 결혼이 깨진 건 무혁에게도 천우의 기회가 됐다.
민재가 있을 맞은편 빌딩을 바라보며 무혁은 만연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