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말이죠.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 민재야. 그만 울어.
외가 식구들의 외면 아래 민재에게 남은 가족은 오직 할머니뿐이었다.
손녀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섰던 할머니도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발작이 시작돼서요. 서둘러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간호사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굳어버린 민재보다, 옆에서 보고 있던 무혁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따라와. 내 차로 가는 게 더 빨라.”
“선배.”
“어서, 시간 없잖아. 어디로 가면 돼?”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챈 것 같았다.
도저히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민재는 서둘러 그의 차에 올라탔다.
“미리내 요양병원이에요. 빨리 가면 삼십 분 안에 갈 수 있어요.”
하느님 제발. 애써 숨을 고르며 민재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방향을 확인하고서 그는 서둘러 엑셀러레이터를 밟아나갔다.
***
막히는 도로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민재는 서둘러 병실로 뛰어들었다.
“저희 할머니는요!”
“이리 오세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시설이라 민재는 아예 구두까지 벗고 맨발로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렇게 간호사를 따라 민재는 겨우 할머니가 계신 병실에 도착했다.
“할머니!”
바늘 찌른 자국이 가득 남은 주름진 손에 링거를 맞고 있는 걸 보니 돌아가신 건 아니다.
균일하게 뛰고 있는 심전도 그래프를 확인하고 민재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발작이 있었습니다. 일시적이라 금방 가라앉았지만, 연세가 있으시니 연락을 드렸습니다.”
엉망진창인 민재의 사정을 아는 의사가 먼저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줬다.
어느새 고인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민재는 어떻게든 감정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른 가족분들께도 미리 연락해주십시오. 혼자 매번 이렇게 달려오시는 것도 어려우실 테니까요.”
심장 발작은 이번 달에만 벌써 두 번째.
아들 부부를 먼저 보내고 홀로 손녀를 지켜온 할머니의 심장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몇 번이고 숨을 헐떡였다.
그런 할머니를 돌보는 건 전적으로 민재 자신의 몫이다.
의사 앞에서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여보지만 도움을 청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색색대며 숨 쉬는 주름 가득한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민재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급한 조치를 마치고 의사와 간호사가 자리를 떴다.
힘없이 잠든 할머니의 곁에 앉아 민재는 가는 혈관에 꽂힌 링거 바늘을 바라봤다.
“할머니…….”
만약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면 민재는 이제 영영 혼자가 된다.
굳이 결혼을 서둘렀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주름진 피부는 고생한 세월을 덧댄 듯 거칠다.
“민재야.”
어느새 의식을 차린 할머니가 민재를 알아봤다.
울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어보지만 야속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녀석. 눈물만 많아서야, 이렇게 어려서야 결혼은 어찌하려고 그래.”
“할머니, 그게…….”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전했을 때, 할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러니 더더욱 할머니에게 파혼 사실을 알릴 수는 없다.
무어라 입을 열지 못하는 민재의 손을 잡고 할머니는 참 오랜만에 환하게 미소지었다.
“오늘은 진짜 나도 저승에 가는가보다 싶었는데, 그래도 죽은 영감이 우리 손주사위 얼굴은 보고 오라고 나를 살렸나 보네.”
“그게 무슨…….”
“오랜만이야. 참 잘 자랐구나.”
설마 하며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진무혁이 서 있었다.
섣불리 데려다준다고 할 때 함께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할머니는 몇 년 만에 만난 무혁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가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할머니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할머니!”
“괜찮습니다. 누워 계세요.”
민재가 나서기도 전에 무혁이 먼저 할머니를 보살피고 나섰다.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를 가볍게 들어 바로 눕혀드리고 그는 당당히 민재의 곁에 앉아버렸다.
“내가 한눈에 알아봤지.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야?”
흐린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사실도 어느새 지워진 모양이다.
이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뒤늦게 변명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동안 학위 문제로 외국에 나가 있다가 막 들어온 참입니다.”
“암, 그래서 우리 강아지가 그렇게 뜸을 들였구만. 이 늙은이 때문에 많이 놀랐지?”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지만, 눈치 빠른 무혁이 한발 먼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알고 있다. 할머니의 심장은 민재의 파혼 사실을 알고 버틸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
아주 약간의 충격도 좋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소개하는 것도 차일피일 미뤄왔었다.
“할머니.”
“자네라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 이젠 정말 여한이 없어.”
안도하는 할머니에게 차마 진실을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민재의 태도만 보고도, 저 완벽한 남자는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파악한 듯했다.
입을 꾹 다문 그녀 대신 무혁은 능숙하게 의자를 당겨와 침대 옆에 앉아서는 주름진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줬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말이죠.”
할머니의 상황을 눈치챈 건지, 무혁은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민재의 약혼자 노릇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 우리 민재 혼자 결혼 준비하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나도 아는 사람이라길래 난 또 누군가 했지.”
“그랬었군요.”
할머니의 말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주무세요. 보아하니 상태도 안정된 것 같고, 민재도 좀 재워야 하니까요.”
“이제 보니 술 냄새가 나는구나. 친구들한테도 청첩장 돌릴 거라더니, 그게 오늘이었나?”
“할머니!”
그만 말하라는 말이 목 끝까지 넘어오지만 어떻게든 억눌러보려 애를 썼다.
아는 얼굴을 만난 탓에 마음이 놓인 건지, 할머니는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다.
그것도 체력이 부쳤는지 채 십 분을 넘기지 못하고 할머니는 약 기운에 취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심박수가 안정된 걸 확인하고서 두 사람은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잘 부탁드릴게요.”
간호사에게 뒷일을 맡기고서야 민재는 자신이 맨발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혁은 놓고 나온 줄도 몰랐던 구두를 민재 앞에 내밀었다.
“신어.”
“선배.”
할머니 앞에서는 그리도 싹싹하게 굴더니, 단둘이 되자 무혁은 다시금 냉랭해졌다.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그는 몸을 기댈 수 있도록 팔을 내밀어줬다.
만나지 않은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습관만은 여전히 흔적처럼 남았다.
다시 구두를 신고 내려오니 어느새 시간은 열 한시가 넘었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길이라서, 집에 가려면 결국 다시 이 남자의 신세를 져야만 한다.
“타. 데려다줄 테니까.”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갈게요.”
그가 내미는 따뜻한 손을 함부로 쥐었다가는 정말로 기대고 싶어질 테니까.
“먼저 가세요. 전 천천히 갈게요.”
차마 집에 갈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그가 나타난 게 왜 하필이면 오늘이었던 건지 야속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배웅 대신, 무혁은 양복 재킷을 벗어 민재의 어깨에 걸쳐줬다.
“너랑 결혼하기로 했다던 사람, 대체 누구야?”
무혁의 등 뒤에 붙은 광고에도 소영하의 얼굴이 선연히 새겨져 있다.
할머니의 일과라곤 병실 구석에 놓인 TV를 보는 것뿐이니, 채널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열두 번은 나오는 그 사람의 얼굴을 할머니가 모를 리 없다.
“할머님도 아는 사람인 모양이네. 나로 착각하신 모양이지만 말이야.”
그런 사람과 결혼을 약속했다가 깨져버렸으니까.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할머니의 연약한 심장에 무슨 충격이 더해질지 모른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적당히 둘러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민재는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까. 헤어진 이유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 비밀도 지켜줄 것이다.
“배우 소영하예요.”
무거운 마음을 안고 민재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소영하?”
그런 쪽에 흥미가 없는 진무혁도 이름 석 자는 알 정도로 유명한 배우다.
어차피 세상에 말해본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혁마저 자신을 의심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말 유명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할머니한테는 말 못 했어요.”
“외가에서 너 이러는 건 알고 계시고?”
예상대로 무혁은 소영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외가란 말이 나오자 속에서 울컥 화가 치솟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다섯이나 되는 외삼촌들은 일부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민재의 존재를 부정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남기고 간 마지막 혈육임에도 장례식이 끝난 이후로는 얼굴 한 번 마주치기 쉽지 않았다.
곤란한 처지라는 걸 뻔히 알면서, 엄마 몫으로 나온 보험금을 십원 한 푼 남기지 않고 모두 긁어간 게 끝이었다.
그날 이후 민재에게 가족은 오직 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할머니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거기랑은 상관없는…….”
말을 하다 말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다 들키는 바람에 할머니와는 종종 인사를 나눴다지만 그에게 외가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먼저 민재의 외가 얘기를 꺼낸 걸까.
“하버드에서 만났어. 너희 외삼촌.”
“선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외삼촌이 무혁과 민재의 관계를 알았다면 진작 전화가 걸려왔을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지만 그래도 내보이기 싫은 제 치부들이 그의 앞에 고스란히 드러날 줄은 몰랐다.
“서원대 출신이라고 말하니 먼저 물어보시더라고. 조카가 서원대 법학과 출신이라고.”
“그럴 때만 조카겠죠.”
“그래도 네 가족이잖아.”
차라리 남이면 나았을 사람들이라 민재는 더는 가족 취급도 하고 싶지 않다.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진무혁은 저리 태연한 얼굴로 민재의 자존심을 하나하나 짓밟아나갔다.
할머니도 안정되었으니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이만 갈게요.”
뒤늦게 택시를 불러보려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이 후미진 곳까지 달려올 택시가 없다고 했다.
곤란한 민재를 앞에 두고 무혁은 기꺼이 조수석의 문을 열어줬다.
“길은 아니까 좀 자. 도착하면 깨워줄게.”
매일 같이 바래다주던 길이니 그는 지금도 민재의 집 주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로 복수라도 하려고 찾아온 걸까.
그의 친절조차 곱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제 마음이 꼬인 탓일지도 모른다.
“덮어. 감기 걸리지 말고.”
재킷을 돌려주려던 것도 실패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민재는 무혁의 향기가 남은 재킷을 덮고 조수석에 앉았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히터에서 열기가 도니 때늦은 피로가 밀려왔다.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자 무혁은 잠시 차를 멈췄다.
곧 그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민재가 앉은 시트를 뒤로 젖혀줬다.
“편하게 눈 좀 붙여.”
나른한 그의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잠이 밀려왔다.
진무혁의 이런 지독한 상냥함에 질식할 것만 같다.
그래서 사랑했고 그래서 헤어졌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고마워요.”
무혁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진 못했을 테니까.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한 물음이 머릿속에 뒤섞였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무혁은 제 앞에 나타난 걸까.
묻고 싶은 건 많지만 더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걸 마지막으로 이 남자에게 다시는 신세 지지 말아야지.’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게 두 번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토록 초라하고 비참한 석민재는 화려한 진무혁의 인생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오늘까지만 하자.
몇 번이고 다짐해보지만, 그것도 피곤 앞에서는 버틸 수 없어서 민재는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
“잘도 자는군.”
흐트러진 가방을 팔에 끼우고서 무혁은 능숙하게 고이 잠든 민재를 안아 올렸다.
민재는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는 줄도 모르는 건 여전했다.
좋게 헤어진 사이가 아니었던 만큼 민재는 여전히 그를 보며 두려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더 야위었네.”
본인은 열심히 피해다닌 모양이지만 무혁은 줄곧 민재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다.
굳이 석민재가 다니는 로펌 A&Z의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집을 산 것도 헤묵은 미련 때문이었다.
온기 하나 없는 집 안에 들어서자 차가운 공기가 맴돌아 히터부터 틀었다.
그렇게 민재를 침대에 눕히고 보니 아까 맨발로 뛰었던 탓에 스타킹 발바닥이 엉망이 됐다.
“이런 건 여전하네, 석민재.”
야무진 얼굴을 하고서 은근히 허술한 여자다.
침대에 바로 눕히고서 무혁은 흐트러진 민재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묻어둔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피곤한 날이면 민재는 이렇게 제 품에 안겨 몸을 웅크리고 잠들곤 했다.
아마 오늘도 그녀에겐 그런 날이었나보다.
“소영하라고 했지.”
민재의 결혼 소식에 귀국을 서둘렀다. 필사적으로 숨긴 상대는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유난히 울적해 보이는 얼굴을 빤히 보며 머리를 쓰다듬는데 가방에 던져둔 민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나 깨지 않을까 전화를 들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내 남자]
녹색으로 흔들리는 통화 버튼 위에 선명한 세 글자가 그의 눈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