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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결혼-1화 (1/103)

가짜 결혼

1화. 결혼은 취소야

“인상 펴.”

초조한 자신과 달리 무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등을 갑갑하게 조이는 웨딩드레스 탓에 숨이 막혔다.

민재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손에 든 부케를 거머쥐었다.

‘어차피 이 결혼은 가짜니까.’

기쁜 얼굴로 앉아 계신 할머니를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무혁의 손을 잡기로 했던 날, 그는 분명히 말했다.

-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오래 가진 않을 거니까.

두 사람 사이에 더는 사랑처럼 얄팍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눈동자를 보며 민재는 깨달았다.

이건 복수다. 자신을 냉정하게 버렸던 옛 연인에게, 이제라도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서였던 건지도 모른다.

“신랑 신부, 입장.”

무혁의 커다란 손이 민재의 작은 손을 꽉 거머쥐었다.

더는 달아날 수 없다는 그의 뜻이 족쇄처럼 민재를 감쌌다.

눈부신 조명 아래 두 사람의 은사였던 학과장이 주례를 섰다.

동문 출신인 수많은 법조인 앞에서, 학과장은 이미 다 지나버린 옛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학생 시절부터 오랜 기간 서로를 소중히 여긴 두 사람이, 이렇게 하나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특합니다.”

사정을 모르는 주례사는 모두 거짓이지만, 잔뼈가 굵은 판사들조차 고개를 끄덕였다.

“신랑 진무혁 군은 신부 석민재 양에게 평생 진실한 사랑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대놓고 사기를 치고 있으니 심장이 조여오는데 곁에 선 무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숙하게 거짓을 말했다.

법정에서도 떠는 법 하나 없던 사람이니 그에게는 이조차도 참 쉬운 걸지도 모른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옛 연인과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신부, 맹세합니까?”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그녀에게 학과장이 되물었다. 민재는 고개를 들어 무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가 민재를 내려다보고 있다. 무혁을 앞에 두고 더는 대답을 미룰 수 없다.

“맹세합니다.”

쥐어짜듯 힘겹게 한마디를 꺼내고서, 민재는 죄 없는 제 입술만 있는 힘껏 깨물었다.

***

[결혼은 취소야.]

짧디짧은 메시지를 앞에 두고 민재는 걸음을 멈췄다.

청첩장을 돌리기 위해 모임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난데없이 도착한 연락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석민재 씨?”

“네. 저에요.”

영혼 없는 대답부터 하자, 직원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석민재. 제법 눈에 띄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 같은 이름은 언제나 이런 반응을 받곤 했다.

삼대독자인 아버지와 오남 일녀 중 고명딸인 부모님이 무려 십 년이나 기다려 어렵게 얻은 외동딸이라서, 양가의 할아버지들이 두 달을 싸워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벌써 삼십 년을 살았으니 이제는 이 이름으로 사는 것도 제법 익숙해져서 굳이 바꾸고 싶은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니 먼저 와 기다리던 동기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일이 좀 늦어서.”

일 년에 한 번, 힘들게 짬을 내서 모인 대학 시절 소모임 친구들과의 술자리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서 가방 안에 든 청첩장을 건넬 예정이었지만, 그가 보낸 문자 하나로 모든 계획은 수포가 됐다.

“그래서 오늘은 왜 모이자고 한 건데?”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다들 어렴풋이 눈치는 챈 모양이라서, 결혼이 깨졌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상대가 누구인지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게 다행일 줄은 민재 자신도 몰랐다.

“그냥 좀.”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결혼이 깨졌다는 사실을 말하기에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민재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입을 닫았다.

“이젠 좀 알려줘라.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과 사귀길래 얼굴 한 번을 안 보여주는 거야?”

갑작스러운 통보는 언제나 익숙했다.

그렇게 상대가 누구인지 주변에 밝히지도 못한 채 이 년을 만났다.

만약 민재의 연인이 누구인지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온 나라가 들썩일지도 모른다.

“얜 말 안 한다 하면 절대 안 해. 나중에 식장 들어갈 때나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겠지. 맞지?”

워낙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탓에 다들 이제는 이런 제 성격을 탓하지도 않는다.

이걸 고맙다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쓴웃음만 지으며 민재는 시계를 봤다.

아홉 시 반.

원래대로라면 그는 민재를 위해 직접 이 자리에 얼굴을 비칠 예정이었다.

“소영하다. 잠깐만 다들 조용히 좀 해봐.”

그의 광적인 팬인 친구 하나가 스트리밍 생중계화면을 틀었다.

[이번 영화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그의 소속사는 대놓고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렇게 또다시 결혼은 없던 일이 됐다.

“소영하 결혼설 돌던데, 거짓말이겠지?”

친구의 중얼거림에 말을 삼켰다.

참담함은 민재 혼자만의 몫이었던 건지, 그는 평소에 연기하던 모습 그대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놨다.

[제 연인은 오직 팬들뿐이죠. 그래서 아직 결혼 계획은 없습니다.]

말은 잘한다.

지난번에는 드라마였고 이번에는 영화가 결혼을 미루는 핑계가 됐다.

그렇다고 어디에 말할 수도 없다. 아니, 말을 한다고 믿어주기나 할까.

민재는 썩어 문드러지는 마음을 삼키며 술잔을 기울였다.

“석민재랑 결혼하는 놈은 좋겠다. 학부 때부터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또 시작이네.”

같은 학번 내에서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던 탓에 동기 중 몇몇은 여전히 민재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기색이었다.

“얼굴 예쁘지, 집에 돈 많지, 직장도 좋아. 그래, 거기다 네가 사시만 쳤어도…….”

“야!”

학부 시절부터 과톱을 자랑했던 석민재였기에 다들 현역으로 사법 고시를 패스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시험이 아닌 유명 로펌의 법률 사무원으로 취업해버렸다.

사법 고시를 치지 않겠노라고 하자, 분노한 학과장이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며 석민재의 머리에 재떨이를 날린 건 유명한 일화였다.

돌덩어리 꼴통 석민재.

대체 무슨 이유냐며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민재는 끝내 그 이유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연예인은 연애조차 쉽지 않다고, 달콤했던 그의 속삭임이 떠올랐다.

전 국민을 홀려버린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그는 몇 번이고 민재에게 되뇌였다.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여자라고.

결혼이 파투난 후에야 대단하신 연예인의 그늘 뒤에 숨겨진 연인 노릇이 얼마나 비참한지 깨달았다.

차라리 평범한 남자를 사랑했다면 좋았을 텐데.

팔자가 사나운 건지, 민재의 연애는 언제나 가시밭길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첫 단추를 잘못 꿴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몰랐겠지만, 비교도 안 될 대단한 남자와 엮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첫 연애만 해도 그랬다.

“그건 됐고, 그 선배는 요새 어떻게 산대?”

“누구?”

“그 있잖아. 우리 두 학번 위의 그 소년등과 말이야.”

“아, 그 인간?”

여우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다는 게 이런 건지.

겨우 화제가 제게서 비켜나갔다 싶더니 하필이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제는 그에게로 쏠렸다.

힐끗 민재의 눈치를 살피고서 동기들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그의 근황에 대해 소상히 떠들어댔다.

“그 인간이야말로 좋은 인생이지. 부럽다. 진무혁.”

굳이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기어코 입에 올리는 동기가 원망스러웠다.

이제는 잊고 살았던 옛 연인의 이름을 들먹이자 가슴에 묻었던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법대의 귀공자.

완벽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어 두면 딱 저럴 거라는 말이, 학생도 아닌 교수들 입에서 나오게 한 장본인.

까탈스럽던 학과장조차도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했던 민재의 첫사랑.

첫 연인.

그리고 첫 남자였던.

“그 인간이야 뭐. 검사하다가 그만두고 미국 넘어가서 학위 따고 거기 아예 눌러앉을 거라는 얘길 들은 거 같은데.”

“설마. 조조에 들어가겠지.”

대단한 연예인과 사귈 수 있었던 건 이미 한 번 대단했던 연애를 해본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진무혁의 존재는 학생 시절부터 이 업계에서도 전설로 손꼽혔다.

최연소 부장검사로 유명했던 진무혁의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이후 그는 부친의 친구였던 조원식 변호사의 손에 자랐다.

업계 2위 로펌인 법무법인 조조의 대표이자 전 변호사협회장까지 지냈던 조 변호사의 바람대로 진무혁은 단번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지난주에 한국 왔다던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라서,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그의 근황은 어떤 형태로든 민재의 귀에 들려왔다.

석민재는 왜 진무혁과 헤어진 걸까.

법대 내에서도 유명한 커플이었던 두 사람의 결별 이유는 지금도 서원대 법대 내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몇 가지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문제는 민재가 천하의 돌덩어리라 절대로 입을 열지 않기에 누구 하나 그 이유에 대해 제대로 들은 사람이 없다는 거지만.

“그랬구나.”

가슴 아픈 첫사랑의 기억에 그만 흘리듯이 본심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민재에게 쏠렸다.

그냥 평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의식적으로 반응해버린 게 실수였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좀 물어보자. 대체 둘이 왜 헤어진 건데?”

말이 나오자 하나둘 질문이 쏟아졌다.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것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사이니까 이제는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기들의 시선이 조금은 따갑기까지 하다.

이래서 같은 학교 안에서 사귀는 건 아니라고 했던 건지.

만난 시간보다 헤어져 있었던 시간이 훨씬 길었음에도 사람들에게 석민재는 여전히 진무혁의 여자였나보다.

“너도 이제 결혼 얘기 오갈 정도면 이제는 말해줘도 되잖아.”

“그러게. 왜 헤어진 건데?”

헤어지는 날은 최악이었다. 민재는 자신의 머리로 떠올릴 수 있었던 가장 잔인했던 방법으로 그를 상처입혔다.

-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어요. 헤어져 주세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놓아주지 않았을 테니까.

아직 미숙했던 과거의 자신은 그런 궁핍한 변명거리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참혹했던 첫사랑은 막을 내리고 민재의 마음에도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벌써 몇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사람들은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내 잘못이야.”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들먹인 진짜 이유는 끝내 숨긴 채 민재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무혁을 위해서 악녀를 자처했고 그 이후로는 그의 눈에 띄지 않게 피해다니기 바빴다.

몇 년 전, 오후 재판에 필요한 급한 서류를 전하느라 동부지검에 들렀을 때도 무혁을 마주하고 제 발로 숨었다.

학생 시절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눈매와 단정한 양복 차림을 하고서, 수사관들과 함께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은 익숙했던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이젠 정말로 먼 사람이 되어버렸어.’

급히 나무 뒤에 숨었던 덕분에 겨우 그에게 제 모습을 들키지 않았다.

그 후로 다시는 법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었다.

‘만약 그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다.

“무혁 선배?”

맞은 편에 앉은 동기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네, 다들.”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우아해서,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온 걸까.

한 걸음씩 그가 다가올 때마다 등줄기로 피가 식었다.

“그리고 민재도.”

한때는 세상 전부였고 이제는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은 옛 연인을 다시 만났을 때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 걸까.

제 이름을 입에 담는 무혁을 바라보며, 민재는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결코 닿아서는 안 될 남자.

그런 상대를 오랜만에 마주하고 나니 손에 땀이 절로 났다.

“선배…….”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당황한 민재와 달리 무혁은 변함없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했다.

마치 민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것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민재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오랜만이네.”

최악의 형태로 이별을 고하고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건 처음이라서 덜컥 숨이 막혔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저 깊은 눈동자가 이제는 쳐다보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힘에 겹다.

“미안한데 먼저 일어날게.”

“뭐야. 갑자기 왜?”

가방을 챙기는 둥 마는 둥 민재는 도망치듯 회장을 빠져나왔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얘기 좀 해.”

뒤늦게 따라나온 무혁이 민재의 손을 낚아챘다.

“난 선배랑 더 할 얘기 없어요.”

그 손을 뿌리치고서,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해 보려던 찰나였다.

민재의 외침과 동시에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빠져나갈 기회가 생겼으니 서둘러 전화부터 받았다.

“여보세요.”

그런데 어딘지 상대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윤말녀 환자 보호자 분. 여기 병원인데요.”

그가 곤란해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결혼을 서두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이유가 오늘 밤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째서 나쁜 일은 이렇게 연달아 일어나는 걸까.

“할머니.”

사색이 된 민재는 그만 수화기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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