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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그 어른 곱단이 (7/8)

에필로그 : 그 어른 곱단이

Stella Unicorn(스텔라 유니콘).

SNS 계정을 가지고 있는 젊은 층이라면 그 이름을 듣자마자 백색과 연보라색으로 이루어진 특유의 매장 분위기를 떠올릴 것이다. 혹은 갈기가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는 유니콘 그림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스텔라 유니콘은 10~20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장한 신개념 디저트 가게이다. SNS에 업로드하기 딱 좋은 특유의 사랑스러운 인테리어로 여심을 사로잡아, 각종 SNS에서 스텔라 유니콘에 대한 내용은 상당한 비중을 자랑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스텔라 유니콘은 세계의 다양한 간식들을 소량 판매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여, 1호점 개업 후 2년도 채 되지 않아 체인점 오십 개의 점포를 낼 만큼 인기몰이 중이다. 지금의 스텔라 유니콘은 중국, 대만,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위한 투자까지 따낸 어엿한 중소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

각종 쿠키는 물론 캔디, 초콜릿, 케이크와 같은 누구나 좋아할 법한 간식거리들을 진열해 놓고 원하는 만큼 고른 뒤에 무게를 달아 판매한다. 머랭 쿠키, 생크림 케이크, 각종 과일 맛 캐러멜처럼 비교적 스탠더드한 디저트는 물론 몽블랑, 터키쉬 딜라이트, 펑리수 등의 디저트를 생산국에서 직접 조달해 오는 특별한 디저트까지.

스텔라 유니콘의 진열장을 둘러보는 고객들의 눈에는 하트가 솟아오르고 입에서는 탄성이 끊이질 않는다. 제품 하나하나 퀄리티도 떨어지지 않아 인터넷 상에서는 ‘스텔라 유니콘 안 가 본 이는 있어도 한 번만 간 이는 없다.’라는 말이 정설처럼 돌 정도였다.

처음에는 테이크 아웃 전문점이었으나, 인기를 얻으면서 점포 내 취식이 가능하도록 테이블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근래에는 음료 판매까지 시작하여, 스텔라 유니콘의 매출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 중인 신생 업체였다. 젊은 청년 둘이서 시작했다고 알려진 스텔라 유니콘은 대표의 특이한 이력으로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바로 대표 윤산호가 국무총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간에서는 그의 성공이 혹시 아버지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궁금해 했다. 의혹들이 커지자 거듭 거절해 왔던 인터뷰 요청에 응한 그는, 아버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자력으로 일으킨 사업이라며 항간에 나도는 의혹들을 일축했다. 그리고 산호 손에 의해 그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스텔라 유니콘의 창시자, 김단이 있었다.

스텔라 유니콘은 “과자 뷔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단의 말 한 마디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단은 언젠가 꿈에서 봤던 과자 집처럼 다양한 과자를 마음껏 집어 먹을 수 있는, 그런 가게가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산호에게 영감을 주었고, 영감은 곧 구체적인 사업 구상으로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통 계열을 장악하고 있는 대기업에 입사한 산호는 꽤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 실무를 익혔다. 그리고 구상했던 사업이 실체를 갖출 준비를 끝내자 곧바로 사표를 던지고 ‘스텔라 유니콘’의 창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대학가에 작은 매장을 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일절 집안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산호와 단이 일하며 모아 둔 돈으로는 딱 그 정도의 시작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산호의 분석력과 단의 창의력, 그 둘로 곧장 대박이 났다. 작은 매장은 지금보다 취급하는 디저트의 가짓수도 훨씬 적었고, 대부분 단이 노아의 힘을 빌려 수제로 만들어 낸 것들이라 수량이 적었기 때문에 매일 매진되어 마감 시간 한참 전에 매장 문을 닫는 날들이 이어졌다.

1호점 성공에 힘입어 근처에 체인점이라 할 만한 점포가 몇 개 늘어나자 대기업에서 인수 제의가 들어왔다. 모두가 산호의 예상대로였다. 산호는 과감히 제안을 거절하고 스텔라 유니콘을 하나의 회사로 키워 갔다.

단은 더 이상 디저트를 만들지 않았다. 디저트 자체 생산을 위한 공장이 만들어졌고 산호가 뚫어 놓은 여러 경로로 다양한 제품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꼭 자체 생산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외주 업체를 선별해 더 좋은 제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외국 제품이라도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하고 질이 좋으면, 계약을 맺어 제품을 공수해 오곤 했다. 이것이 바로 스텔라 유니콘의 인기 요인이었다.

한국 특유의 빠른 확산 속도에 힘입어 이제는 전국 각지에 지점을 둔 스텔라 유니콘의 기세는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국 내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한류가 먹히는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도 수요가 생겼다. 자본, 기획력, 마케팅 모두를 꼼꼼히 따져 계약한 중국의 한 기업과 함께 해외 1호점 준비가 시작되면서 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특히 스텔라 유니콘에 유통되는 모든 제품의 감독을 맡은 단이는 브랜드 모델 섭외 건을 추가로 감독하게 되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거대한 외국 기업의 투자를 따내면서 각종 미디어 매체에 광고를 내기로 결정했고 스텔라 유니콘의 첫 얼굴이 될 모델을 기용해야 했다.

친근하면서도 톡톡 튀고, 젊은 연령대에 호감을 주는 인물일 것. 그 후보로 단연 모 아이돌 그룹 출신의 연기자, 이도원이 떠올랐다.

“안 돼.”

광고 모델로 도원이 어떻겠냐는 단의 물음에 산호가 곧바로 반기를 들었다. 단정히 묶인 넥타이를 살짝 풀어내는 산호의 미간에 곱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왜? 마케팅부 사람들이랑 회의로 결정한 건데.”

자세한 내용을 듣지도 않고 딱 잘라 안 된다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단이 대표이사의 명패가 놓인 커다란 테이블 안쪽으로 엉덩이를 걸쳐 산호와 마주했다. 산호는 단이 테이블 안으로 자리하자 뒤로 살짝 물러나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기대었다.

“회의? 네가 이도원 쓰자고 하면 마케팅부에서 ‘오구오구, 그래요.’하는 게 회의야?”

“아니야! 모델 이미지, 영향력, 비용 다 따져서 결정한 거란 말이야.”

“아무튼 걘 안 돼. 다른 후보 있었을 거 아냐. 그중에서 다시 골라.”

단의 몸이 산호를 향해 기울었다. 산호에게 가까이 다가간 단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나름의 압박을 가하고자 한 행동이었으나 산호에게는 귀여운 투정 정도로 느껴질 뿐이었다.

쪽.

산호가 이제는 젖살이 다 빠져 조금밖에 남지 않은 볼을 잡고 재빨리 입을 맞췄다. 예전에는 말캉한 볼이 손안을 한가득 채웠었는데, 언젠가부터 갸름해진 볼이 아쉬웠다.

갑자기 입맞춤 당한 단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금세 제 모양을 찾았다.

“예전에 내가 이도원 잘생겼다고 해서 이러는 거지.”

“뭐?”

단이 팔짱을 끼며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제 앞에 선 단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드라마 볼 때마다 싫어했잖아, 산호 너.”

여전히 주말 저녁의 드라마 시청은 단이의 취미 생활 중 하나였다. 최근에 단이 챙겨 보고 있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인 도원은 아이돌로 데뷔 후에 인기가 살짝 사그라지자, 재빨리 연기로 노선을 변경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자상한 남자 친구를 연기하며 상대 여배우에게 달콤한 대사들을 쏟아 낼 때는 단이 쿠션을 끌어안고 바닥에 뒤꿈치를 마구 찍어 대기도 했다.

십 년이 지나도 산호의 소유욕은 사그라지지 않았는지, 단이 그럴 때마다 속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아무리 봐도 별로인 것 같은데, 괜히 뒤에서 가만 지켜보다 텔레비전을 꺼 버리고 모른 척한다거나, 괜히 화면 앞을 가리며 어슬렁거려서 단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고작 드라마 속 주인공에게 질투하는 속 좁은 남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언제. 나 걔 누군지도 몰라.”

“그래? 그런 거 아니면 이도원 써도 되겠네?”

산호는 속으로 혀를 세게 찼다. 단이 언제부턴가 제 뜻대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재주가 생겼다. 결국 이번에도 또 단의 승리였다.

광고 제작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지면 광고 촬영이 있는 날이라 스튜디오가 스텔라 유니콘의 매장 분위기와 비슷한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채워졌다.

단이 총책임자 신분으로 촬영장을 찾았다. 촬영장 입구부터 많은 인원이 촬영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단을 알아본 회사 측 직원 몇 명만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빠르게 제 할 일을 찾아갔다.

난생처음 본 광고 촬영장이 단이에게는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입을 헤 벌리고 여기저기 두리번대는 꼴이 마치 방송국 견학 온 어린이 같아서 대부분의 스태프는 그가 광고주일 거라 생각지 못했다.

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대기실 근처에 다다랐을 때, 어려 보이는 스태프가 상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딜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소품부터 옮겨 놓으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죄, 죄송합니다…… 커피 심부름 때문에…….”

“지금 커피가 중요해? 너 여기 커피 타러 왔어?”

“……죄송합니다.”

“빨리 소품부터 옮겨! 어디서 이런 걸 데려와서는, 나 참!”

세상 모든 어른이 노아 같지 않다는 것을 단이도 이제는 알았다. 혼나고 있는 스태프가 불쌍하다기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윽박지르는 남자에게 화가 났다.

양손에 가득 커피가 든 캐리어를 쥐고 있던 여자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단이 그 뒤로 천천히 다가가니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거 어떡하지…….”

“내가 가져다줄게요. 어디다 주면 돼요?”

단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듯한 여자가 휙 뒤를 돌아봤다. 토끼 눈을 뜬 여자의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그녀는 경계하듯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단을 위아래로 훑는 그녀의 표정이 곧 풀어졌다. 단의 어려 보이는 생김새나 편안한 옷차림 때문에 아마 저와 같은 막내 스태프 정도겠거니, 생각했다.

“소품 가지러 가야 되잖아요. 커피 내가 대신 가져다줄게요.”

단이 다시 한번 돕겠다고 나서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캐리어를 단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지금 이도원 씨 메이크업 중인데, 거기로 가시면 돼요.”

부탁드릴게요! 여자는 손을 흔들고 다급히 사라졌다.

“커피 왔습니다!”

단이 씩씩하게 외치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양손에 든 캐리어를 높게 들어 올리며 흔들었다. 하지만 분주하게 각자의 일에 열중한 사람들은 단의 말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뻘쭘해진 단이 테이블 위로 캐리어를 놓고 커피를 하나씩 꺼내 건네기 시작했다.

“뭐야, 커피가 왜 이렇게 녹았어?”

누군가가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불평했다. 투명한 컵 안에는 색이 연해진 커피만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커피를 사 온 스태프가 잔소리를 듣는 동안 얼음이 다 녹아버린 듯했다. 뒤이어 커피를 집어 든 다른 스태프도 얼굴을 구기며 다시 컵을 내려놓았다.

“너 누구야? 커피 심부름도 제대로 못 하는 앨 누가 데려다 놓은 거야!”

“나 김단인데…….”

“뭐? 이게 지금 장난하나. 너 뭐 하는 새끼야.”

남자는 단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 위협적인 행동에 단의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여기 일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들 화가 나 있는 거지. 제 잘못도 아닌데 험한 꼴 당하고 있는 단의 얼굴에 억울함이 떠올랐다.

“새끼라뇨? 왜 욕을 해요? 부탁받아서 커피까지 가져다줬는데.”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지금 커피 심부름했다고 생색내냐?”

“생색이 아니라요. 커피를 대신 사다 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죠. 녹은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이제 단이도 나이 서른의 성인이었다. 산호와 십 년 넘게 함께 지내면서 지켜본 팩트 폭력의 현장만 해도 그 수를 다 셀 수도 없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십 년이나 산호의 언변을 배워 온 단이 산호를 닮아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어디서 대들어! 남자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로 몸을 들썩이는 남자를 향해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실장님, 딱 봐도 막내인 것 같은데 뭘 그렇게까지 해요.”

남자와 단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꽂혔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붓질을 받던 그는 다름 아닌 오늘 광고의 주인공, 이도원이었다.

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실 오늘 산호 몰래 촬영 현장을 찾은 데에는 드라마에서 보던 이도원, 그를 직접 보기 위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굴 위를 쓸던 붓을 거두자 그가 천천히 눈을 떠 단이를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켜 단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나. 신기한 마음에 단의 입이 벌어졌다.

도원은 단의 옆으로 손을 뻗어 다 녹아 버린 커피를 집어 들었다.

“먹을 만하네, 뭐.”

대기실에 있던 이들을 향해 들으란 듯 중얼거리는 그는 따뜻한 커피 하나를 단의 손에 쥐여 주며 웃었다.

“고마워요. 추운데 커피 사 오느라 고생했어요.”

불만을 늘어놓던 이들은 무안함에 애써 모른 척,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이는 멍하게 제 손에 쥐어진 커피 컵을 만지작거렸다. 커피는 이미 다 식어서 미지근했다.

써서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가 식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눈앞에 이도원이 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더 현실감 없는 얼굴이 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 이도원이다.”

단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간 말에 도원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단이가 흥미로웠다. 앳된 얼굴을 해서는 험악한 인상의 매니저에게 당당히 맞서는 단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어디 스태프예요? 나 막내가 이렇게 당돌한 거 처음 봤어. 다른 스태프들도 그쪽처럼…… 아, 단이 씨라고 했죠?”

단은 홀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드라마 보는 것 같아.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단이 귀여웠던지, 도원이 동그란 머리통을 쓱쓱 쓸었다.

“어디서 왔어요? 어느 쪽 스태프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스텔라 유니콘…….”

“응? 스텔라 유니콘 쪽 사람이라고? 근데 우리 커피 심부름을 왜 했어요?”

“아, 아니. 소품 팀 스태프분이 바빠서 제가 대신 가져다준 건데…….”

도원이 아차, 하며 단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다. 광고주 쪽 사람일 거라 생각은 못 했다. 그래 봤자 회사 쪽에서 파견한 스태프나 마케팅 팀원이 아닐까 했지만 어쨌든 제 매니저가 윽박지른 일이 신경 쓰였다.

“아, 그랬구나. 그럼 우리 실장님이 완전 실수한 거네. 어쩌지.”

도원은 제 매니저를 향해 눈을 돌렸다. 실장이라 불린 남자는 당황한 듯했으나 그 속내를 내비치기 싫은 듯 큼큼, 헛기침을 하며 더 큰소리를 쳤다.

“뭐, 막내들은 어디 가든 심부름 좀 할 수 있고 그, 그런 거지 뭐!”

“여기 아무도 커피 사다 주려고 온 사람 없어요, 형. 다음부터 커피 마시고 싶으면 그냥 형이 사 와요.”

차가운 얼굴로 매니저를 향해 일침을 날린 도원이 단이에게 미안하다며 대신 사과했다. 단이는 촬영장에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직급이 낮은 스태프란 이유로 윽박지르는 남자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도원이 웃으며 사과하는데 그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원 씨, 촬영 시작이야. 이제 나와야 돼요!”

대기실 안으로 다른 스태프가 급히 들어서며 도원을 불렀다. 도원은 아쉬운 듯 단이를 향해 다시 한번 미안하단 말을 남기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단이도 곧 대기실을 나서 조용히 카메라 뒤로 향했다. 예쁜 세트와 밝은 조명 밑에 선 도원은 누가 봐도 천상 연예인이라 할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렇게 덕질이 시작되는 건가. 실제로 도원을 마주하고 나니 왠지 그를 향한 팬심이 더 두터워지는 듯했다.

“저기요.”

단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단은 도원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돌렸다. 단을 부른 이는 아까 단이 도와주었던 그 소품 팀 스태프였다.

“아, 커피 잘 배달했어요! 소품은 잘 해결됐어요?”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여기 사람들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뭐 큰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까도 커피 다 녹고 식었다고 되게 화를 내더라고요.”

진짜 못됐어. 단이 고자질하듯 좀 전에 겪은 일을 늘어놓으며 흥분해 콧김을 흥흥 뿜어냈다. 스태프는 촬영장엔 세상 또라이들이 많다며 맞장구를 치다가 갑자기 단이 뒤로 다가선 커다란 인영에 슬쩍 뒷걸음질 쳤다.

“누가 너한테 화를 내?”

익숙한 목소리에 단이 입을 헙, 하고 다물었다. 뒤를 돌아 확인하지 않아도 익숙하게 풍겨 오는 체향만으로 그가 산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 산호야? 여기 웬일이야?”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광고주한테 커피 심부름을 시켜.”

누구냐고 이를 갈듯 묻는 산호를 향해 단이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커피는 내가 대신 가져다주겠다고 한 거고.”

“그럼 누가 기껏 가져다줬더니 녹았니, 식었니 화를 냈냐고.”

단이 곤란한 듯 눈을 굴렸다. 주위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단은 산호에게 슬쩍 몸을 붙이며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단이 산호에게 다가선 순간, 산호의 주름진 미간이 살짝 풀어지는 것을 단이는 똑똑히 보았다. 그 풀어짐을 눈치챈 단이 확신을 얻고 산호 눈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 거 아니래도? 나중에 얘기하자, 응? 여긴 사람 많잖아.”

“사람 많은 거랑 상관없이 어떤 새끼가 너한테 지랄했…….”

“자기야…… 응?”

미쳤다. 자기래.

산호는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하늘로 솟으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렸다. 단이 이렇게까지 나온 이상 더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산호도 단이도 알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스태프는 단이 광고주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여태 봐 왔던 광고주들과는 공통점이 하나 없었다. 이렇게 젊고, 친절하고, 배려 깊은 광고주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단과 함께 서 있는 남자를 보면, 젊긴 했지만 ‘윗사람’ 포스가 풀풀 풍겨 나와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광고주…… 셨어요?”

단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산호가 단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깨 위로 다정히 손을 올리며 멍하니 둘을 보고 선 스태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가서 좀 전해요. 스텔라 유니콘 공동 대표 둘 다 왔다고.”

광고주 둘 다 촬영장에 납시었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뛰쳐나온 관계자들에게 한바탕 지랄, 아니 충고를 날린 산호는 이도원의 매니저에게까지 사과를 받아내고 나서야 촬영장을 떴다.

단이는 촬영장을 조금 더 구경하고 싶어 사진 셀렉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이미 심기가 뒤틀린 산호의 손에 끌려 촬영장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거긴 왜 갔어, 사람 보내도 될 걸.”

“내가 총괄인데, 내가 가야지!”

“이도원 보러 간 거 아니고?”

“……아뇨? 대표님,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누가 지나쳐.”

마침 신호에 걸리자 핸들을 놓은 산호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지그시 단의 눈을 바라보는 산호의 눈빛에 단은 저절로 시선을 내리고 말았다. 산호의 깊은 눈빛은 언제나 단이를 꿰뚫어 보는 듯해, 감히 마주하기가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내, 내가…… 내가 지나쳐. 단이 왜 그랬대? 어휴, 진짜 지나치다…….”

“다음부턴 단이 너 혼자 다니지 말고 팀장이라도 데리고 다녀.”

“왜? 다들 바빠 보이기에 그냥 혼자 왔어.”

“아까 같은 상황 생기면 네가 나서지 말고 부하 직원한테 부탁하란 말이야.”

“왜 그래야 하는데? 커피 정도야 내가 건네줄 수 있는데.”

“높은 자리라는 게 원래 그래. 넌 선의로 나선 거래도, 결국 감독이고 매니저고 다 한 소리 들어야 했잖아. 그 덕에 촬영도 지연됐고. 그러면 그 커피 심부름 받았던 스태프도 또 혼날 거고.”

“……아.”

“그렇다고 내가 우리 대표님 건드린 새끼를 가만둘 수도 없는 거고. 안 그래?”

‘내가 나서서 오히려 다른 사람이 피해 입을 수도 있구나…….’

미처 몰랐다. 그냥 곤란에 처한 이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선의가 누군가에게 화살로 바뀌어 꽂힐 수 있다는 사실을 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십 년 동안 많이 배우면서 남들만큼 평범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세상은 단에게 너무 어려웠다.

“단이 네 잘못이란 소린 아니야. 그냥…… 나서지 않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이거지. 잘못은 갑질 하는 놈들이 한 거고.”

응? 산호가 시무룩해 하는 단이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 단이는 그 따뜻한 손을 잡아 제 얼굴을 기대었다. 이제 와서 산호 몰래 이도원을 보러 간 일이 살짝 미안해졌다.

*   *   *

지면 광고 촬영 이후로는 미디어 매체로 내보낼 영상 광고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디지털 TV는 물론, 스트리밍 사이트, SNS용 쿠키 영상까지 다양한 영상을 한꺼번에 제작하는 날이었다. 직원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단이 공들인 광고였다. 처음으로 기획한 광고지만 단의 아이디어가 여기저기 묻어 있는 콘셉트라 기대가 컸다.

하지만 지난번 일로 산호에게 미안함을 느낀 단이는 촬영 현장을 다시 찾지 않기로 했다. 도원에 대한 팬심보다 산호와 스태프들에 대한 죄책감이 컸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도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단이 자신이 가는 것보다 전문가를 보내는 게 나았다.

그래서 현장에 광고 마케팅팀 팀장을 저 대신 보내 놓고 하루 종일 책상 위에 한숨을 푹푹 뱉어내는 중이었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에 참다못한 산호가 검토하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저기요, 대표님.”

“네, 대표님…….”

“일 없으면 디자인부에 연락해서 일 좀 드릴까요?”

제 이름이 잘 달린 대표실도 따로 있는데 굳이 산호의 책상에 의자를 놓고 앉은 단이었다. 넓은 유리 위로 한숨을 얼마나 뱉었는지 단의 얼굴 앞만 하얀 김이 서려 불투명했다.

단은 유리에 볼을 붙이고 산호를 올려보았다. 예전엔 찐빵처럼 찌그러들었던 볼이 이제는 조금 밀릴 뿐이었다.

“나 요즘 일 너무 많이 했는데.”

단의 말에 산호가 제 앞으로 놓인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단은 슬쩍 외면했다. 대신에 몸을 일으켜 넓게 펼쳐진 책상을 빙 둘러 산호 옆으로 다가갔다. 산호는 자연스레 의자를 돌려 단을 제 다리 위로 앉혔다. 단이 힘없이 산호 품에 머리를 기대자 그는 단을 다정히 끌어안았다.

“출장 안 가면 안 돼?”

동남아 진출을 위한 출장이 잡혀 있었다. 불가피한 것이었다. 대표가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고, 단은 광고 건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회사 창립 이후에 처음으로 산호 혼자 떠나는 출장이었다.

“가지 말까?”

단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중요한 출장인지 단이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적으로 동남아에 진출하고 나면 회사가 지금보다 두 배, 아니 열 배는 커질 것이었다. 그 반증으로 스텔라 유니콘의 주가가 나날이 오르고 있었다.

“이틀이야, 이틀. 혼자 있기 싫으면 어머님께 가 있어. 박노아 씨 내외한테는 가지 말고.”

“아니야, 내가 애야? 혼자 있을 수 있어…….”

말은 그리 했지만 단은 벌써 외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산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손이 단의 뒷머리를 감싸고 쓰다듬어 주었다.

“대표님, 회의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호출기에서 흘러나온 비서의 목소리가 산호와 단 사이를 갈라놓았다. 산호는 단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회의가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산호를 알고 있었다. 단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목덜미를 팔로 감았다. 책상 위로 단을 앉히려는 산호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단 사이에 달달한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 대표님, 3분 전입니다.

다시 한번 산호를 재촉하는 목소리에 단의 팔이 힘을 잃었다. 산호 목에 감았던 팔을 푸니 엉덩이에 닿은 유리 책상이 지나치게 차갑게 느껴졌다.

“다녀올게.”

산호는 시선 아래에 놓인 단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러나 그 가벼운 키스가 꼭 작별 인사 같아 단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리 와.”

산호가 걸음을 떼려는 순간에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긴 단이 그대로 산호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쳤다. 놀라 그대로 끌려온 산호가 곧 단의 허리를 감싸며 눈을 감았다.

─ 대표님, 회의…….

그대로 손을 뻗어 호출기를 꺼 버린 단이 산호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입술 사이로 유혹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타이 매듭을 살짝 풀어낸 산호가 단을 책상 위로 눕혔다.

결국, 대표실 안으로 들어온 비서에 의해 산호가 끌려 나갔다. 단은 혼자 남아 무료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분명 촬영장에 가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막상 촬영 날이 되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단이 컨펌 내린 콘티는 잘 구현되고 있는지. 배경 색감은 스텔라 유니콘 특유의 색감을 잘 살렸는지. 디저트 소품은 다 제대로 세팅되었는지. 도원의 메이크업은 잘 되었는지. 오늘도 얼굴이 열일 하는지…….

“아, 궁금해!”

안 되겠다. 책상을 짚고 벌떡 일어선 단이 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팀장님? 현장이에요?”

단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지면 촬영 때보다 더 커진 세트와 더 많아진 스태프에 단이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바쁘게 움직이다가 단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가곤 했다. 단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팀장님 어디 있지…….’

현장이라던 마케팅 팀장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단은 그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예쁜 세트로 눈을 돌렸다.

구름 위 세상처럼 꾸며진 세트는 단의 아이디어였다. 스텔라 ‘유니콘’ 의 직관적인 느낌을 살려 몽환적이면서 포근한 이미지를 연출하자는 단의 의견이 고스란히 세트로 옮겨진 것이다. 스텔라 유니콘의 컬러인 연한 라벤더빛과 흰빛으로 이루어진 세트는 과연 신비로우면서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몽글몽글, 스텔라 유니콘.”

도원은 양손에 스텔라 유니콘의 디저트를 들고 카메라를 향해 이번 광고의 카피를 읊었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부드러운 인상, 다정한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져 이번 광고의 콘셉트를 정확히 구현해 내고 있었다. 광고를 기획한 단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잠깐 쉬었다 갑시다!”

감독의 말이 끝나자 세트 주위로 몰려 있던 사람들이 각자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단이 역시 다시 팀장을 찾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단이 씨?”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더니 세트장을 벗어난 도원이 단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단을 향해 다가왔다.

“아, 광고주님…… 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 아니,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 주세요.”

“하하. 저번엔 정말 실례 많았어요. 멋대로 막내 취급하고…… 기분 상하신 거 아니죠?”

또 마네킹이 단이에게 웃음을 날렸다. 이 남자는 볼 때마다 비현실적인 미모를 표출하는데, 그게 매번 적응이 안 되는 게 더 신기했다. 단이 또 입을 헤 벌리고 서 있다가, 도원이 단의 어깨를 살짝 잡자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제가 제대로 말 안 해서 벌어진 일이죠, 뭐…….”

“그래도 우리 실장님이 너무 큰 실수를 해서…… 아, 혹시 오늘 촬영 끝나고 시간 되면 밥 한 끼 대접해도 될까요?”

“네?”

깜빡깜빡. 단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남자가 나한테 밥 사 주겠다는 건가? 왜? 실수 때문이라면 실수한 사람이 밥을 사야 되는 게 아닌가? 도원이 제게 밥을 살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단둘이 밥을 먹다니. 산호가 알면 기분 나빠할 게 분명했다. 아무리 산호가 출장 가고 없다고 해도 그가 싫어할 일을 하긴 싫었다.

“광고주한테 제가 대접하는 게 뭐 이상한가요? 제가 진짜 맛있는 고깃집 알거든요. 같이 가요.”

단의 표정이 부정적인 대답을 품자 도원이 먼저 선수를 쳤다.

고기? 순간 단의 눈이 반짝, 하고 뜨였다. 안 그래도 요즘 바빠서 제대로 외식을 못 한 차였다. 배에 기름칠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단의 마음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으음, 글쎄요……. 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촬영 언제 끝나죠?”

먹을 것 사 주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 그것은 진리. 밥만 먹고 헤어지면 된다. 혼자 쓸쓸히 집에서 밥 먹는 것보다 내가 맛있는 걸 먹는 게 산호한테도 좋을 거야. 제 마음대로 합리화를 끝낸 단이 도원을 향해 웃어 보였다. 돼지고기가 그냥 커피라면, 소고기는 티오피니까.

광고 촬영은 해외에 내보낼 것까지 며칠에 나누어 찍는다. 해서 오늘 촬영은 저녁 시간에 맞춰 끝이 났다. 단은 도원의 차를 기다리기 위해 세트장 바깥에 서 있었다. 해가 지니 날이 제법 추웠다. 단은 코트 소매를 주욱 빼내 제 손등을 덮었다.

“어, 대표님? 여기 계셨어요?”

“팀장님! 어디 있었어요? 전화도 안 받고…….”

“어머, 죄송해요. 내일 촬영할 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어휴. 촬영하는 건 좀 보셨어요?”

“네, 좋았어요. 팀장님 수고하셨어요.”

“대표님이 수고하셨죠, 제가 뭘. 호호. 집으로 가세요? 태워 드릴까요?”

“네? 아뇨, 그게…….”

왜 그러냐는 듯한 팀장의 눈빛에 단이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저 이도원 씨랑 밥 먹기로 했어요.’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 단이 연예인과 무슨 친분이 있다고.

그때, 단의 뒤에서 잘 빠진 외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소리도 없이 창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검은 마스크를 쓴 도원이 단을 향해 손짓했다.

“아, 약속이 있어서요. 팀장님 먼저 들어가세요.”

후다닥, 단은 팀장이 도원을 볼까 봐 얼른 뛰어 차 안으로 올라탔다.

“회사 사람이에요? 제가 내려서 문 열어 주려고 했는데, 단이 씨가 곤란할까 봐 안 나갔어요. 저 잘한 것 맞죠?”

착하고, 예의 있고, 눈치까지 갖춘 남자다. 단은 새삼 이도원에게 감탄했다.

“와…… 진짜 없는 게 뭐예요?”

“하하…… 단이 씨는 진짜 특이해요. 저 없는 거, 음…… 애인?”

“애인 없어요? 왜요? 이상하네.”

도원은 그저 웃기만 했다.

톱스타 A의 성적 취향. 스포츠 뉴스 1면을 장식하기에 얼마나 적합한 헤드라인인가. 이도원, 그는 동성애자였다. 조용하고 물 좋은 클럽이나 바를 꽤 찾아다니는데도 여태 소문이 나지 않은 것은 성 소수자 그들만의 ‘룰’이 있어서였다.

사회적으로 외면받는 그들끼리는 철저히 서로를 감싸 주었다. 아웃팅이란 그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평판 좋고 매너 좋은 도원은, 그들 사이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이라 그에 대한 것은 동류가 아니면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태 루머 하나 시달리지 않고 무사히 연예계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도원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단에게만큼은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터놓고 다가가는 게 오히려 잘 먹힐 것 같다는.

“사실 남자 좋아해요, 저. 그래서 잘 맞는 짝 찾기가 힘드네요.”

도원은 마치 남의 얘기를 늘어놓듯 담담히 제 치부를 드러내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단을 바라보면서, 그가 어떤 반응을 할까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곤란해 할지, 혐오스러워 할지, 혹은 무관심할지도 몰랐다.

“어, 정말요? 나돈데!”

하지만 단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아니, 그가 이쪽 세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으나 이런 상큼한 반응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 도원은 조금 벙찌고 말았다.

단은 마치 취미가 같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를 향해 반갑게 웃었다. 사실 도원의 커밍아웃은 단에게 딱 그 정도 의미일 뿐이었다.

“잘됐네요…… 정말.”

도원이 실소를 뱉으며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역시 제 예상을 깨는 사람이었다. 저를 향해 맑은 웃음을 보낸 단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단은 도원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배고파 죽겠는데 왜 여태 차를 출발시키지 않는 걸까 속으로 툴툴거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도원의 상체가 단이 앉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는 천천히 단에게로 다가갔다. 단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온 도원의 숨결이 붙었다.

“이제 출발할게요. 배고프죠.”

아슬아슬하게 단을 빗겨 나간 손이 벨트를 끌어당겼다.

“아, 깜짝이야.”

“응?”

“뽀뽀하는 줄 알았어요.”

“하하, 단이 씨 진짜 솔직하네요. 사실 잠깐 고민하긴 했어요.”

도원이 호탕하게 웃어넘기자 단도 따라서 웃어 버렸다. 이 남자 유머 센스까지 갖추었구나. 도대체 없는 게 뭘까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도원이 데려온 식당은 모든 좌석이 방으로 나누어져 있어 오직 서빙 하는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해 두었던 건지 안내 받은 방으로 들어가 앉자 곧바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치지직, 침샘을 자극하는 소리를 내며 빛깔 훌륭하고 마블링 훌륭한 소고기가 구워졌다. 철판 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은 단이 젓가락을 입에 꾹 물었다.

“맛있겠다…….”

역시 고기는 언제나 옳다. 산호와 자주 외식을 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소고기와 몇 년 만에 조우한 것처럼 식욕이 돋았다. 도원이 핏기가 가신 고기 한 점을 단의 앞 접시 위에 놓아 주었다.

“먼저 먹어요. 배고파 보이길래.”

“앗, 고맙습니다.”

고기 앞에서 사양은 사치다. 단은 얼른 잘 익은 고기를 입안으로 쏙 집어넣고 오물거렸다. 적당히 핏기만 가실 정도로 익힌 소고기는 입안에서 곧바로 녹아들었다. 그 황홀한 맛에 단이 눈을 접으며 으음, 하고 만족스러운 탄성을 흘렸다.

“맛있어요?”

“네! 진짜 맛있어요.”

“다행이다. 억지로 끌고 왔는데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많이 먹어요.”

미식가라.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 대식가라는 소리는 좀 들었다.

단은 도원이 건네는 고기를 족족 집어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쉬지도 않고 말도 없이 처음 주문한 고기를 모두 먹어치운 단이를 도원이 조금 놀란 눈으로 보았다.

“와, 말랐는데 되게 잘 먹네요.”

진짜 보기 좋다. 도원이 생긋 웃으며 칭찬하자 단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도원은 직원을 호출해 고기를 더 주문시켰다.

“우리 술도 한잔할까요?”

단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얼마만의 알코올인가. 산호의 단속이 심한 탓에 일 년에 한두 번 마실까 말까한 술을 고기와 함께 마실 수 있다니. 단은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무릉도원의 구름 위처럼 느껴졌다.

서울에 올라와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도원처럼 착한 이는 또 처음이다. 단은 그가 마음에 쏙 들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술 잘 마셔요?”

도원이 긴 팔을 뻗어 단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맑은 액체가 쪼르륵, 청량한 소리를 내며 잔에 채워졌다. 알코올과 함께 향긋한 꽃향기가 퍼지는 게 퍽 고급스러운 화주의 한 종류 같았다.

“저 좀 마셔요. 술 좋아해요.”

“정말요? 술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의외네요.”

사나이를 뭐로 보고. 단이 잔을 들어 올려 도원의 잔에 부딪혔다. 보란 듯이 한입에 털어 넣고는 ‘크으으!’ 하고 어른의 소리를 내보였다. 테이블 위에 잔을 딱 소리가 나게끔 내려놓으니 도원이 큭큭대며 웃었다.

“어때요? 입에 안 맞으면 그냥 소주 마실까요?”

“아니요! 이거 진짜 맛있는데.”

도원이 고기 한 점을 건넸다. 단은 도원의 젓가락 끝에 걸린 고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무신경한 단이라도 이건 너무 친밀해 보이는 행동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내민 고기를 거절해 도원을 무안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젓가락을 집어 고기를 조심히 받아 든 단이 도원을 향해 살짝 웃었다.

도원은 마주 웃으며 단의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그는 적당한 때에 적당한 말을 건네었고 꽤 재치 있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단은 대화에 빠져 취기가 오르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잔을 비워 냈다.

“단이 씨, 괜찮아요? 무리해서 마시지 말아요.”

“괜찮아요. 무리 안 했는데?”

단이 제 혀를 콱 깨물었다. 혀에 감각이 둔해진 것을 보아하니 취하긴 취했다. 하지만 왜 술만 들어가면 센 척이 하고 싶은 걸까, 단은 자꾸만 불끈거리며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주머니 안으로 곱게 욱여넣었다.

‘야, 주먹. 아니야, 지금 아니야. 안 돼, 들어가.’

도원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순 없었다. 회사 회식에서조차 맥주 한 모금 못 마시며 참아 온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어, 단이 씨 전화 울리는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화?”

“단이 씨 거 아니에요?”

“어…… 맞네. 산호다.”

이 시간쯤이면 잘 도착했다고 연락이 올 법도 했다. 무심코 전화를 받으려다 지금 산호 몰래 도원을 만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거짓말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단이었다. 산호가 오늘 뭘 했는지, 혹은 지금 어딘지만 물어도 말을 더듬고 발음이 씹혀 거짓말이 들통 날 게 뻔했다.

‘아, 어쩌지…….’

안절부절못하며 휴대폰 화면만 쓸던 단이 결국 전원 버튼을 꾹 눌러 휴대폰을 꺼 버렸다.

‘난 배터리가 없었다. 배터리가 없었던 거야. 왜냐면 충전하는 걸 깜빡했기 때문이지.’

혼자 중얼거린 단이 술 한 잔을 또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긴장한 탓인지 목이 말랐다.

도원은 단이 비워낸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면서,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겼다.

그는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방해받기 싫어 단이 휴대폰을 꺼 버렸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그린라이트, 도원의 눈앞에 초록 불빛이 선명하게 빛났다. 이보다 더 일이 술술 풀릴 순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도 드디어 애인이 생기는 것일까 기대했다.

“이봐요, 이도원 씨. 내 얘기 좀 들어볼래요?”

단의 눈꺼풀이 몇 번이고 무겁게 내려 감겼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 덕에 도원은 길고 풍성한 단의 속눈썹이라든가, 예쁘게 진 쌍꺼풀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단이 술에 취해 주절주절 늘어놓는 얘기들이 듣기 좋았다. 도원은 어느새 술잔도 내려놓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제가요, 사실…… 어릴 때 아파가지고, 지능이 발달을 못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열을 배울 때 둘밖에 못 했어요. 다 나더러 바보라고 그랬어요…….”

단의 듣기 좋은 미성에 집중하던 도원이 미간을 구겼다. 지능이라니,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저 조금 특이하고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부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수준 이하의 지능을 가진 이를 비정상이라 분류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능이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촬영 첫날 단이 보여 준 행동만으로도 이미 그가 배려심 넘치고, 당당하며, 특별한 이라는 것을 단이 스스로 증명해 내었다.

“그래서 나느은! 두 개씩 다섯 번을 했어요. 그러면 똑같이 열 개가 되잖아요. 그렇게 해서라도 평범해지고 싶었어요. 그게 우리 엄마 소원이었거든요…….”

단은 제대로 술에 취했는지 저 아픈 얘기를 자꾸만 늘어놓았다. 도원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 주고 대화를 이끄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숨겨 둔 이야기들이 고삐 풀린 듯 술술 풀어져 나왔다.

“근데 왜! 세상이 말이야, 자꾸자꾸 더 어려워지냔 말이야! 어? 아주 그냥. 하나 넘으면 다음은 더 어렵고, 그거 겨우겨우 넘으면 그다음은 더 더 어렵고! 에이씨, 더러워서 진짜….”

“단이 씨……?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슬픈 얼굴로 이야기하던 단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지더니 그의 입에서 거친 언사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젓가락을 들어 테이블을 탕탕 쳐 대는 단의 행동이 거칠었다.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곧 욕이라도 할 기세였다. 도원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단이에게 다가갔다.

“단이 씨, 이제 집에 가요. 데려다줄게요.”

“어어? 어딜 만져. 내 주먹 맛…… 어, 내 주먹 어디 갔어. 아직 주머니 속에 있네에?”

도원은 이마를 짚었다. 단이 졸린 듯 보일 때 말렸어야 했는데. 커다란 눈이 느리게 깜빡이는 게 너무 예뻐 그만 말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겨우 단을 부축해 일으켰다. 하지만 좀처럼 걸으려 하지 않는 단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억지로 단을 둘러업고 식당을 나선 도원이 차 뒷좌석으로 그를 눕혔다. 대리 기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물 좀 가져올게요. 여기 잠깐만 있어요.”

차로 올 때까지만 해도 술 더 가져오라며 난리를 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단은 천사처럼 잠들어 버렸다. 의자 밑으로 축 늘어진 단의 팔을 곱게 배 위에 올려놓은 도원이 차 문을 닫고 식당으로 다시 돌아갔다.

생수 한 병을 얻어서 돌아온 도원이 차 문을 열었을 때, 단은 그새 잠이 깼는지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나른한 숨을 훅 뱉으니 진한 알코올 향기가 풍겼다. 그 냄새가 역해 단이 제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물 마셔요, 단이 씨.”

도원이 재빨리 뚜껑을 연 물병을 단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단은 꼴깍꼴깍 소리를 내며 잘도 받아 마셨다.

목을 축이고 눈을 감으니 문득 산호 생각이 났다. 산호는 단이 술을 마실 때면 항상 옆에서 물부터 챙겨 주었다. 이젠 하다 하다 물만 봐도 산호가 생각나는 지경에 이르렀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근데 산호는…… 산호랑 같이 있으면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돼요. 평범하게 사랑을 하는 사람이 돼요. 근데 산호는 또 나를 막, 특별하게 만든단 말이지? 신기해…….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그래요. 아직도…….”

중얼거리던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단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도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머리가 창가에 부딪히지 않도록 막았다.

“윤산호…… 말하는 건가.”

도원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신문에도 몇 차례 나기도 했고, 광고주였으니까. 아까 술자리에서 단의 전화가 울릴 때도 윤산호, 그자의 이름을 보았다.

‘……그랬던 거구나.’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 곁에 아무도 없었을 리가 없지. 도원이 쓰게 웃었다. 십 년이 넘게 함께했고, 회사까지 같이 키운 그들 사이에 감히 도원이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그저 도원을 배려한 단의 행동에 저 혼자 착각했구나, 하고 자책하며 긴 한숨을 뱉었다.

*   *   *

“에구구, 죽겠다…….”

집으로 들어선 단이 거실 벽을 더듬었다. 단이 어두운 실내를 싫어하는 탓에 늘 불을 켜 두고 생활했는데 어쩐 일인지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이쯤에 있어야 할 스위치가 만져지지 않았다. 단은 짜증스레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휴대폰, 켜지네?”

으악! 순간 어둠 속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단이 기겁하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탁 소리를 내며 거실의 불이 켜졌고, 그 가운데에 산호가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산호야?”

단은 술에 취해 헛것을 보나 싶어 눈을 비볐다. 산호가 전혀 움직이지 않은 탓이다. 분명히 목소리를 들었는데, 지금 산호는 마네킹처럼 거실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단은 잘 되었다 생각했다. 헛것이든 아니든, 마침 산호가 보고 싶은 참이었다. 헤실거리며 산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우와, 산호다……. 우리 산호…….”

익숙한 향이 느껴지는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졸음이 쏟아졌다. 단은 자꾸만 무너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산호에게 매달렸다.

“보고 싶었어……. 근데 나 너무 졸리다. 우리 얼른 자, 자자. 산호야…….”

산호는 아무 말 없이 단을 달랑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다소 거칠게 단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산호가 그의 윗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단은 산호가 씻겨 주려는 줄 알고 팔을 달랑 들어 그가 옷을 벗기기 쉽도록 도왔다. 눈을 감은 채 침대 위를 이리저리 구르며 속옷까지 다 벗어 낸 단이 실눈을 뜨고 산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빨리……. 나 졸려…….”

“나한테 거짓말까지 하고 촬영장에 갔어?”

딸꾹.

“이도원 그 새끼랑 둘이서 술도 마시고?”

흡, 딸꾹.

단이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러면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잖아! 하지만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단을 내려다보는 음험한 산호의 눈이 너무 무서웠다.

“전화도 꺼 놓고?”

“아니, 산호야…….”

화가 난 산호에게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단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땐 변명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는 것도.

“산호야, 나 안아 줘.”

산호의 무서운 얼굴에 진작 정신을 차린 단이였지만, 아직 취중에 있는 듯 시트 위로 하얀 몸을 비비적거렸다.

산호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으나 단이의 몸짓에 한쪽 눈썹이 빠르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단은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산호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단 말이야…….”

달콤한 말투로 산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손에 닿은 산호의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단은 산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고 드러난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었다.

“섹스하고 싶어.”

한숨 쉬듯 흘러나간 목소리에 단의 턱이 거칠게 잡혔다. 들어 올려지나 싶더니 곧바로 산호의 입술이 닿았다. 그다음, 머리 뒤로 느껴지는 푹신한 시트의 감촉에 눈을 감은 단이 산호의 허리에 허벅지를 감았다.

“오늘 안 봐줘, 김단.”

아직 동이 트지 않은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 왔다. 먼저 눈을 뜬 산호는 단이 깰까 봐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품에 잠든 단의 얼굴에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선명했다. 상황을 넘기고자 유혹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차마 거스를 수가 없었다. 대신에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조금 과격하게 굴었더니 결국엔 단이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서른 먹고도 아이처럼 우는 모습에 발정해 버린 산호가 한 번 더 단을 덮쳤을 때는 콘돔마저 바닥나 그대로 단이 안에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산호는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잘 짜인 근육이 도드라진 나체 아래로 시트가 흘러내렸다. 그는 하얀 엉덩이를 드러낸 단의 위로 시트를 덮어 주고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원래는 어제 대만에 도착해서 숙소에서 컨디션을 회복한 뒤, 오늘 오후에 미팅을 갔어야 했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쯤, 부하 직원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그대로 비행기 티켓을 취소한 산호는 집으로 돌아와 단을 기다렸다.

단을 못 믿어서, 의심해서가 아니다. 연예인이든 누구든 단둘이 밥을 먹는다 해서, 단이가 다른 이에게 여지를 주거나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다만 단이와 바로 닿지 못할 거리에 떨어지는 것은 처음인 데다가, 하필 그때 다른 남자 차를 타고 갔다는 말을 들으니 천하의 산호도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십 년도 넘은 일이지만 여전히 둘의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그 사건은 출장을 떠나려던 산호의 발길을 돌리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단. 그리고 도중에 꺼졌는지 신호조차 가지 않는 전화. 불 꺼진 집 안에서 산호는 분노와 두려움을 삭였다. 힘을 키우면 모든 게 산호의 손안에서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단을 위해 힘을 갖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힘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단이었다.

산호는 집을 나서기 전, 침대로 들러 단에게 키스했다. 그의 입맞춤에 잠깐 눈을 뜬 단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벌써 가……?”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단의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쉿. 단의 말을 막은 산호는 그저 자상하게 단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공항 가기 전에, 들릴 곳이 있어서.”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단이 다시 눈을 감았다. 체력을 회복하려면 오늘 하루 종일 침대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단은 산호가 떠나는 기척을 느끼며 마지막 남은 의식을 붙들어 입을 열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단의 이마에 온기가 닿았다 떨어졌다. 곧이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단은 완전히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   *   *

어제에 이어진 촬영에 모두들 지쳐 보였다. 촬영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산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알아본 한 스태프가 자리를 마련할까 물었으나 산호는 연기자 대기실이 어디냐 물을 뿐이었다. 도원의 대기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킨 스태프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떴다. 광고주 둘이 왜 번갈아 가며 촬영장에 자꾸 드나들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

“이도원?”

도원은 촬영에 앞서 부은 얼굴을 가라앉히려 얼음 팩을 얼굴에 대고 있었다. 어제 과음을 한 탓일까. 아니면 시작도 못 해 본 짝사랑으로 쉬이 잠들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의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낯선 음성에 눈 위에 대고 있던 얼음 팩을 떼어 내니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정장을 빼입은 윤산호, 그가 서 있었다.

그는 거만한 손짓으로 코디며 매니저를 대기실 밖으로 내보낸 뒤, 당당한 걸음으로 도원에게 다가왔다. 연예인인 도원에 버금가는 비율과 비주얼에, 권력 가진 자 특유의 위엄이 더해져 강한 위압감을 내뿜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도원입니다.”

“몰라서 물어본 것 아니니, 인사는 됐고.”

날이 선 말투에 도원이 흠칫, 몸을 굳혔다. 남자가 왜 혼자 저를 찾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상대하기 싫었다. 도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주인이 있는지부터 알아봐야지.”

안 그래? 특유의 낮은 목소리를 잇새로 뱉어내는 산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아 오히려 섬뜩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단의 주인이라 칭하는 그의 말에 도원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야 사리 분별도 못하고 감히 내 것에 손대는 일이 없을 것 아냐.”

주름 하나 없는 정장 주머니에 불량스럽게도 손을 찔러 넣은 산호가 주위의 의자를 하나 끌어다 제 앞에 놓았다. 천천히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는 긴 다리를 반대편 무릎 위에 걸치며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생각해 볼까? 이도원이 게이라는 기사가 나면 말이야. 어떻게 될까?”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도원의 음성이 떨렸다. 데이트 신청 한 번에 아웃팅이라니, 정도가 지나쳤다. 물론 당연히 단이 저에게 호감을 가졌을 거라 착각한 도원의 실수이기는 했다. 하지만 만약 그의 비밀이 세상에 새어 나간다면,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도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제 인생을 망가뜨리겠다 말하는 남자가 두려웠다.

“이미지 훼손으로 인한 전속 모델 해지 및 위약금. 그것부터 걱정해야 할 거야.”

그런 일 없게 하자고, 응? 도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손이 꽤 매서웠다. 산호의 말이 맞았다. 도원은 처음 그가 대기실로 들어섰을 때, 혼자 오해해 단에게 마음을 품은 일을 사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공기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그의 차가운 태도와, 무시무시한 협박에 사과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산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만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번 미팅을 잘 끝내고 돌아오면, 단에게 프러포즈할 것이다. 나라에서 기록으로 남겨 주지 않아도, 사실혼 관계 정도는 맺어야 저런 낯짝만 멀쩡한 것들이 단에게 달라붙는 일이 없을 테니까. 대만까지는 세 시간 반이 걸렸다. 그는 서류 대신에 슈트 안주머니 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프러포즈 때 단에게 건넬 편지였다.

*   *   *

나의 과거, 나의 현재, 나의 미래인 단이에게.

검게 썩어 들어간 나를 하얗게 물들인 너를, 혹여 내가 도로 검게 물들이진 않을까 걱정했었다. 이미 나 대신에 다친 적 있는 너를, 내가 또다시 다치게 하진 않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단이 너는 오히려 나를 바꾸고 가르치고 키워 냈다. 세상을 향한 분노로 거칠었던 입버릇도, 한숨 대신 뱉었던 담배 연기도, 꿈도 미래도 없었던 나도 모두 고치고 나를 이만큼 키웠다, 네가.

서울로 널 데려오기 전에 우리가 했던 약속, 둘 다 사장님 되어서 맛있는 것 먹자는 그 철없는 약속을 결국 너도 나도 지켜 냈다. 우리가 꿈꾸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약속해야만 한다.

내가 너에게 약속할 것이고, 네가 나에게 약속해 줘야만 하는 미래가 있다.

평생 나와 함께해 줄래.

서로의 반려가 되자. 곱단아.

<『곱단이』 2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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