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물결 따라 흐르는 운명 (6/8)

6. 물결 따라 흐르는 운명

다시 평화로운 나날들이 흘렀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 되어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길가에 맴맴 매미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산호는 여름방학을 맞이했고, 단이도 여름을 맞아 일주일간의 휴가를 가지게 되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카페로 향하던 단이는 막상 낮부터 오후까지 집에 붙어 있자 무료함을 느꼈다. 물론 산호와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일주일 내내 그랬다간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단이는 산호를 피해 거실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에어컨이 낮춰 놓은 실내 온도보다 바닥이 조금 더 차가워서 살에 닿는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틀어 놓기만 한 텔레비전에선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는 소리가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데굴데굴.

단이는 몸을 옆으로 굴려 방 앞에 안착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산호가 방문 앞에 모로 누운 단이를 쳐다봤다.

“단아, 뭐해.”

“나 심심해.”

단이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방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심심해? 뭐 하고 놀아 줄까.”

문장만 본다면 담백하기 그지없는 말인데. 그 말을 건네는 산호의 표정은 이상야릇했다. 저 게슴츠레한 눈은 또 뭐람.

“섹스 안 해.”

난 네 의도를 이미 알고 있다! 단이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산호는 뻔뻔하게도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안 해. 그 좋은 걸.”

그건 인정하지만.

“너무 많이 했어.”

단이가 다시 가냘프게 고개를 떨궜다. 산호는 단이의 말과 행동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기댄 단이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아아,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건가. 이제 싫은 척할 힘도 없다. 단이는 산호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제 곧 옷이 훌렁 벗겨 나가겠지. 자포자기한 듯 팔을 들어 올려 만세 포즈를 하는 단이를 산호가 이상하게 내려다봤다. 그 눈을 마주한 단이는 뻘쭘하게 팔을 내렸다. 이거 아니야?

“궁전 마을 놀러 갈까?”

눈이 확 뜨였다. 아주 솔깃한 제안이었다.

“응!”

그리고 대답은 당연하게도, 예스였다.

단이 저를 아껴 주었던 할배, 할매 모두가 보고 싶었다. 호랑이 할배가 미끼를 잘 끼워 낚시를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고, 순이 할매 허리는 좀 어떤지, 파스는 다 쓰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마을에 그동안 재밌는 일은 없었는지, 얼마나 변했는지도 궁금했다.

그들에게 서울서 본 거, 먹은 거, 배운 거 모두 말해 주고 싶었다. 분명 곱단이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울 게 분명했으니까. 제가 이만큼 컸다고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단이는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확실히 변했다. 좋은 의미로. 산호와 승오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세계를 넓혔고 그는 확실히 성장했다.

이제는 카페 아르바이트 같은 간단한 업무는 혼자서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래와의 관계에 늘 서툴렀던 단이가 이제는 동네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이나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그랬다. 모자란 놈이라 손가락질 받던 궁전 마을과는 달랐다. 이제 단이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힘들 만큼, 단이는 세상에 동화되었다.

단이는 산호를 만나서야 세상이 저를 동화시키도록 허락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궁전 마을에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마을 입구부터 단이와 산호가 지내던 집까지, 달라진 장면은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어제 떠났다가 바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이는 서울에서 보낸 시간이 마치 길게 꾼 꿈처럼 느껴졌다.

차에서 내려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작지만 늘 활기차고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던 집이었는데 잠깐 비워 뒀다고 벌써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먼지가 쌓인 평상이나 텅 빈 하양이 집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단이가 마당 가운데 서서 멍하니 집을 쳐다보는 사이에 산호가 팔뚝에 핏줄을 세우며 짐을 들였다. 산호는 여러 번 대문을 들락거리며 짐을 날랐다.

궁전 마을에서 보낼 날은 단 이틀이었다. 둘이서만 멀리 여행을 떠나는 점을 연주가 걱정했기 때문에 단 하루만 궁전 마을에서 자기로 약속하고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단이 제가 만든 커피며 쿠키를 할배, 할매들에게 선보여야 한다며 우겨서 하루 치 짐치고는 양이 무시무시해졌다.

단이 그 짐들을 보자 기운을 차리고 손뼉을 짝짝 쳤다. 빨리 가자! 산호가 서울부터 가져온 물건과 가방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단이는 얼른 회관에 가고 싶어서 몇 번이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 빨리, 빨리! 지금 가자. 응? 이건 나중에 정리하고 커피랑 쿠키랑만 챙겨서 빨리 가자고!”

*   *   *

“할매! 할배! 단이 왔어!”

후다닥, 단이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회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어르신들이 반가운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메! 우리 곱단이가 왔어야!”

“참말 우리 곱단이여? 웬일이래, 어멈 아범까정 서울로 싹 올라가 부렀는디.”

“할매들 보고 싶어서 왔지!”

“아야, 여그서도 곱단이 너 얼마나 보고잡았는디.”

단이 주위로 하나둘 모여든 노인들이 연신 오메, 오메 하며 단이 얼굴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두드렸다. 단이는 그 가운데서 저보다 작은 할매들 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응석을 부렸다. 그리고 산호는 뻘쭘히 현관에 서 있었다.

‘이 비슷한 장면 언젠가 본 것 같은데.’

산호는 단이가 벗어 던진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어색하게 회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산호가 들고 있던 가방을 놓고 꾸벅 인사하자 단이에게로 쏠렸던 시선이 거두어졌다.

“서울 아가도 왔어야.”

“인자 아그도 아니여. 대학생인디! 서울에 좋은 대학 갔담서?”

“근디 서울 아가는 뭔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당가?”

이장 할아버지가 산호 손에 들린 가방을 가리키자 단이가 할매 품에서 쏙 빠져나와 둘러앉은 어르신들 가운데에 섰다.

“내가! 서울 가서 커피랑 쿠키랑 만드는 거 배워 왔지!”

단이 양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었다. 뭣이여, 코피랑 쿠우키? 커피는 다방 가면 파는 것이고 쿠키는 슈퍼 가면 파는 것인디 뭐 따로 배울 것이 있당가. 할매, 할배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곱단이 기 살려 주느라 박수를 짝짝 쳐 댔다.

“허허…… 곱단이 서울 가더니 요리사 다 되어 부렀으?”

샐쭉 기분 좋은 웃음을 입꼬리에 건 단이가 산호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산호가 가방을 열어 주었고 단이는 챙겨온 것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단이는 카페 일이 완전히 손에 익자 노아에게 간단한 베이킹을 배우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으로 배운 것은 당연히 단이가 제일 좋아하는 머랭 쿠키. 만들기도 간단해서 궁전 마을로 내려오기 전에 할매, 할배들 줄 거라고 잔뜩 만들어 왔다. 예쁜 깍지를 끼워서 동그랗게 짜낸 머랭 쿠키는 꼭 단이 제 얼굴처럼 하얗고 반질반질했다.

그리고 단것만 먹으면 물릴까 봐 커피도 준비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못하는 단이지만 산호와 같이 골라 제일 좋은 핸드 드립용 원두를 샀다. 노아가 말하길 쓴 걸 마셔야 단 게 단 줄 안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커피와 디저트는 서로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강조했던 게 기억나 핸드 드립 세트를 궁전 마을까지 가져왔다.

단이가 원두가 가득 담긴 드리퍼 위로 회관 주전자에 팔팔 끓인 물을 천천히 부었다. 여과지를 타고 커피가 조금씩 내려왔다. 동시에 원두의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회관 안에 가득 퍼졌다. 미리 깔아 둔 종이컵 위로 커피를 나눠 붓고, 잔뜩 포장해 온 머랭 쿠키와 함께 나눠 주었다.

“요것이 뭐시라고? 머래? 머래 쿠키? 아따 모양은 기냥 옷장 안에 나푸탈렌 만치로 생겼구먼.”

“아니, 할매. 머랭. 머랭 쿠키라구.”

“허허, 그냐? 우리 곱단이가 만들어 왔응께 맛있것제. 잘 묵을게?”

“응, 아메리카노랑 같이 먹어야 맛있어!”

“뭐, 뭔 카노? 뭐라카노?”

“아니, 아메리카노! 커피랑 같이 먹으라구.”

“아아, 그런 것이여? 알었어. 곱단이가 그리 묵으라면 그래야제.”

어르신들이 머쓱하게 웃으며 단이에게 받은 커피와 머랭 쿠키를 맛보기 시작했다. 단이는 자신이 만든 머랭 쿠키와 직접 내린 커피를 맛보고 할매, 할배들이 저에게 쏟아 낼 칭찬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워메! 씁은거!”

할매가 얼른 컵을 입에서 떼어 내며 혀를 내밀고 얼굴을 찌푸렸다. 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야, 단아. 할배는 이런 거 못 묵어. 다방 커피 맨치로 달달해야 묵지.”

할배는 못 먹을 것을 먹은 듯 컵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단이 적잖이 당황했다. 하늘로 치솟던 입꼬리가 금세 땅을 향해 축 처졌다. 하지만 단이는 포기하지 않고 할배 앞으로 얼른 머랭 쿠키를 내밀었다.

“많이 써? 그럼 이거 먹어, 할배. 이거 엄청 맛있어.”

미심쩍은 눈으로 포장지를 만지작대는 할배 손에서 머랭 쿠키를 뺏어 든 단이가 하나를 꺼내 할배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곧 바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달달함이 입안에 녹아들겠지. 단이는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할배 표정을 살폈다.

“아따, 쌧바닥 다 녹아불것네. 설탕을 기냥 들이부은 것이여?”

“요것은 또 너무 달아부러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단이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단이 입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행복이 모여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맛이었는데, 어르신들 입맛에는 아니었나 보다.

말이 없어진 단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다들 한 마디씩 보태었다. 오직 산호만이 단이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야, 단아. 맛있어. 진짜 맛있는데?”

정말?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는 단이의 처연한 눈에 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산호의 노력을 무산시키는 할매들의 원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곱단이 너그 엄니는 요리 잘만 헌디, 너는 요리에 소질은 영 없나벼.”

심지어 요리 솜씨 이야기까지 나오자 자존심이 상한 곱단이가 울먹거리며 눈에 눈물을 가득 채웠다.

서운했다. 할매, 할배들한테 맛있는 거 선물하고 싶어 서울에서부터 바리바리 싸들고 온 건데. 심지어 시간과 공을 들여 직접 만든 건데. 아무리 쓰고 달아도 그렇지 다들 너무했다.

단이가 차마 어른들 앞에서 말은 못하고 입술만 꾹꾹 씹어 댔다. 산호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손으로 단이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어르신들이 허둥지둥하며 단이를 달래려 들었다.

“아따, 뭔 쓸데없는 소리를 허고 그라요! 여그 다 촌놈들이라 서울서 파는 것은 못 묵어 봤응께 그라제.”

“맞어, 곱단아 나는 요것 아주 맛있다?”

“요게 달달허니께, 커피에다가 녹여 갖고 먹으믄 되겠구먼.”

“잉, 그라믄 되겠네! 아따, 역시 이장이라 머리가 좋아야?”

“암만! 이장은 아무나 한당가!”

껄껄 웃은 이장님이 뜨거운 커피 안으로 머랭 쿠키를 푹 담갔다. 그러나 각설탕도 아니고, 오븐에서 한 번 구워진 머랭 쿠키가 어르신들 생각처럼 사르르 녹을 리가 없었다.

으와앙!

커피 위에 볼품없이 동동 떠다니는 머랭 쿠키를 본 단이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다 망했어! 할매, 할배들 바보!

결국,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타서 어르신들이 모두 한 잔씩 마시고, 머랭 쿠키는 꼭 두고두고 먹겠다며 약속을 받은 뒤에야 단이 울음을 그쳤다. 속상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산호가 좋아하는 커피를 단이도 먹지 못하는 것처럼 다 입맛이 있는 거니까. 할매 할배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참, 근데 호랑이 할배가 안 보이네? 호랑이 할배는?”

원체 말이 없는 할배니까. 회관을 둘러본 단이가 호랑이 할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장님이 “곱단이 왔다고 마을에 방송이라도 돌려?” 라고 하는 걸 단이가 손사래 치며 겨우 막았다.

“낮에 낚시하러 간다고 가더만. 여즉 거 있나 본디.”

낚시? 주말도 아닌데. 늘 주말에 호랑이 할배랑 같이 낚시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끼는 제대로 끼우는 걸까. 그럼 호랑이 할배한테 간다며 단이가 엉덩이를 떼자 할배, 할매들이 아쉬워했다.

“쪼매만 더 놀다 가제.”

“그래도 왔는데 호랑이 할배한테 인사는 해야지! 가자, 산호야!”

날이 더워서 수풀을 헤치며 산을 오르려니 땀이 삐질삐질 났다. 작은 동산이라도 길이 험해 넘는 데 시간이 퍽 오래 걸렸다.

겨우 동산을 넘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푸른 바다와 방파제 끝에 호랑이 할배 혼자 그림처럼 낚싯대 앞에 서 있었다.

“할배!”

바닷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단이 소리쳤다. 그러나 할배는 들리지 않는 듯 미동도 없는 채였다. 조급해진 단이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방파제 근처로 다가서서야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제법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배! 호랑이 할배!”

할배등 뒤로 달려가며 단이 소리쳤다. 할배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본인을 향해 달려오는 단이의 모습에 놀란 듯 멍하니 서 있던 할배는 곧 낚싯대를 내려놓고 품으로 뛰어드는 단이를 끌어안아 주었다.

“왜 온 거여, 여그는 잊어불랑께….”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만큼 만나지 못했는데, 잘 왔다 소리는 아니어도 반갑다 소리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단이가 불퉁하게 입을 삐죽였다.

“할배는 나 서울 갈 때도 그러더니. 안 반가워? 나는 할배 진짜 보고 싶었는데…….”

여기도 얼마나 오고 싶었다고. 단이가 응석 부리듯 할배 품에 얼굴을 비볐다. 할배 옷에서 약하게 나는 비릿한 바다 냄새와도 같은 바람 냄새가 났다.

“여그 자꾸 미련 두면 안 된당께. 단이 너는 더 커야 하니께.”

“나 서울에서 엄청 좋은 카페에서 일해! 이제 커피도 내릴 줄 알고 쿠키도 만들 줄 아는데? 나, 미련 두는 거 아니고 그냥 할배 보고 싶어서 온 거란 말이야.”

나 다 컸어! 단이가 제 가슴을 두드리자 할배가 단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크라고 했으면서, 꼭 어린 손주를 쓰다듬듯 단이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려, 곱단이 많이 컸구먼.”

키도 좀 큰 것 같은디? 할배가 단이를 세워두고 위아래로 눈대중해 키를 재어 보는 듯했다. 그런가? 헤, 기분 좋게 웃은 단이가 할배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 진짜 키 컸어? 어쩐지, 아까 순이 할매 만났는데 더 작아졌더라고. 나는 할매 허리가 더 굽은 줄 알고 얼마나 마음 아팠는데.”

단이가 진짜 다행이다, 하며 눈을 접어 웃었다.

할배는 허허, 하고 작게 웃기만 하고는 다시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릴을 감아올린 할배가 낚싯바늘 끝에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뭍으로 건져 올렸다. 낚싯바늘이 방파제 근처로 오자 단이가 얼른 낚아채 바늘에 미끼를 끼웠다. 그러자 할배가 다시 낚싯대를 휙, 돌려 저 멀리 바늘을 던졌다.

“나 없어서 미끼 어떻게 했어, 할배?”

“……대충 끼워서 던지는 것이제. 그러니 고기들이 자꾸 미끼만 빼묵고 도망가 부러.”

할배는 이래도 저래도 좋다는 듯 잔잔한 어조로 말했지만 단이는 못내 가슴이 아팠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한참을 낚싯바늘과 사투를 벌였을 할배를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지려 했다. 물고기들이 미끼만 먹고 도망갔으면 고기도 예전에 비해 훨씬 못 잡았을 텐데. 코끝이 찡해졌다.

“저놈은 잘해 주냐.”

애써 눈물을 삼키던 단이가 갑작스러운 할배의 질문에 “응?”하며 고개를 돌렸다. 할배는 늘 그렇듯이, 여전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낚싯바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서울 아그가 단이 너한티 잘 허냐고.”

할배 말에 단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산호가 어디 갔나 했더니 방파제 저 끝에, 그러니까 예전에 단이와 나란히 앉았던 그곳에 혼자 앉아 있었다. 산호는 뒤로 손을 짚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응! 엄청 잘해. 나 산호가 너무 좋아.”

단이가 웃었다. 수줍게 볼을 붉히는 모습이 꼭 만개하는 복숭아꽃처럼 고왔다.

단이는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 산호가 사 줬던 맛있는 음식들, 술 취해 사고 친 얘기까지 종알종알 할배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엄마가 화를 내 산호와 떨어지게 된 단이가 많이 아팠던 이야기까지.

할배는 그저 가만 듣고만 있었다. 주름으로 작아진 눈을 끔벅거리며 소식이 없는 낚싯대를 바라본 채로 가끔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했다.

“근데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단이가 방파제 위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 조각을 운동화 끝으로 퍽, 찼다. 가볍게 튕겨 나간 돌은 바닷속으로 퐁당 빠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왜 엄마가 그렇게 화를 냈는지 말이야. 할배도 내가 산호 좋아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할배도 엄마랑 비슷한 생각을 할까. 엄마보다 더 어른이니까 더 질색을 하진 않을까. 제가 물어봐 놓고도 괜히 조마조마했다.

한참 말이 없던 할배는 단이가 이를 내어 아랫입술을 잘근 씹기 시작했을 때, 입을 열었다.

“곧 죽는다고 생각하믄 다 별일이 아니게 되어…… 그라고 세상이 달러, 인자는.”

“그게 뭐야. 할배는 왜 맨날 단이가 못 알아듣게 말해?”

단이가 삐죽하게 입술을 내밀자 할배가 허허 웃었다. 단이는 샐쭉하게 눈을 돌려 할배가 보고 있는 바다를 눈에 담았다.

푸른 바닷물이 오래된 방파제에 부딪히며 하얗게 부서졌다. 잘게 부서진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이 한여름인 것도 잊을 만큼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좋으믄, 행복하믄 됐단 말이여. 평생을 살아도 진정 사랑하는 이 하나 못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디…… 괴로움뿐인 인생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헌 연인디.”

“할배 말이 맞아. 나 산호랑 있으면 진짜 행복하거든.”

그게 엄청 소중한 거였어. 단이는 고개를 돌려 앉아 있는 산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단이를 가만 쳐다본 할배가 아주아주 환하게 웃었다.

“잉, 그러믄 된 것이여.”

어느새 단이가 산호 옆으로 다가섰다. 처음 단이가 산호를 여기로 데려온 그날처럼 둘은 나란히 붙어 앉았다. 방파제 밑으로 단이의 하얀 종아리가 흔들흔들, 리듬을 타며 흔들렸다.

파도가 시원한 바람을 싣고 다가와 머리칼 사이로 빠져나갔다. 형체도, 향도 없는 바람은 얇은 머리칼을 흩트려 놓는 것으로 제 흔적을 남겼다.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던 산호가 단이의 손을 천천히 잡아 쥐었다. 눈을 마주한 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산호야, 여기 처음 온 날 기억나?”

“그럼. 곱단이가 다짜고짜 나 끌고 왔었잖아.”

“이렇게 우리 둘이 다시 올 수 있을 줄 몰랐어.”

깍지 낀 손을 그대로 들어 올린 산호가 단이 볼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그날 마주했던 색이 옅은 눈을 지금은 더 가까이 마주할 수 있다는 게, 갑자기 믿기지 않는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때, 넌 여기 오면 다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었지. 늘 밝고 걱정 없는 네가 뭐가 안 괜찮을 게 있다고,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난 몰랐어. 근데 이젠 알 것 같다. 네가 내면으로 겪은 고통과 괴로움도, 외로움도.’

그때만 해도 그냥 방파제 위를 각자 짚고 있던 손이 이제는 서로의 손을 다정히 감싸고 있었다. 산호는 단의 자그마한 손을 힘주어 잡고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동그란 눈이 산호를 향했다.

‘그리고 나도 지금 다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아.’

“우리 나중에도 또 오자.”

“정말?”

단이 기뻐하며 환하게 웃자 볼에 박힌 보조개가 예쁘게도 쏙 들어갔다. 그때 들었던 청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이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파랗게 청량감을 주었던 바다는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어 바다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 붉게 타오르는 빛들이 오늘을 보내는 애틋함의 색인지 내일이 기다리는 희망의 색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의 노을은 항상 함께 보게 될 것을 알았다.

“사랑해, 곱단아.”

“나도 사랑해, 산호야.”

그날, 산호 안에 하얗게 떨어진 곱단이가 후후 불어 번져 들더니 어느새 산호 속을 가득 채워 눈부시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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