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1화 (256/256)

  

외전 11화.

“루벤.”

“당신이 없어도 밥이 넘어가는 내가 끔찍하고, 문득 다른 일에 웃기라도 하면 물밀 듯이 다른 슬픔이 밀려오는 삶이에요. 나는 분명 당신 없으면 안 되는데, 멀쩡히 숨 쉬고 있다는 게 미칠 듯이 고통스럽다고.”

그의 목소리가 절절하다 못해 들끓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것뿐이니, 함께 가자고 약속했었던 모든 곳이 빛을 잃어버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좋은 곳을 가도 당신과 함께하지 못해 슬프고, 나는 당신과 함께했었던 그 시절만 회상하며 그렇게 영원히 과거 속에서 사는데?”

“잠시만, 루벤.”

“그게 다 내 무관심과 무지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면, 순간순간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아 모든 걸 다 부숴 버리고 짐승처럼 날뛰고 싶은데……. 한 번이라도 당신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고,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간을 돌리고 싶어 매일 밤 헛된 생각에 괴로워 몸을 뒤트는 삶이 어떻게…….”

“미안해요.”

르엘라가 침착하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실언했어요. 진정해요. 왜 이렇게 감정적이에요?”

숨을 몰아쉬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손으로 쓸면서, 그녀는 문득 자신이 그에게 먼저 이렇게 체온을 나누어 주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만큼 그의 얼굴이 절실하여 어떻게 해서든 달래 주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요. 안 미치고 안 죽었어요. 당신이 짐작했듯이 당신 어머니가 나를 불러 무리한 요구를 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요.”

그녀가 가만가만 그의 얼굴을 쓸어 주고 눈을 들여다보아 주자, 그는 다시 온순한 짐승처럼 어깨를 내려트리고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꿈이 너무 생생했어.”

그는 연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다시 그녀를 안고 싶다는 듯이 끙끙거렸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너무 마음이 아파 한동안 숨도 못 쉬었어요.”

“원래 꿈에 이렇게 잘 동화되는 편인가요?”

“그딴 거 잘 꾸지도 않아요. 근데 왜 오늘 그런 쓸데없는 꿈을 그렇게 오랫동안 꿨는지 모를 일이야, 재수 없게.”

시무룩한 어조였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그 꿈을 꾸면서 확실히 하나는 알았어요. 내 인생에 중요한 건 당신뿐이라는 것. 당신의 인생을 지켜 주고 그 곁에 있는 게 내 가장 큰 우선순위예요. 아메탄 따위가 아니고.”

“아메탄 시총이 얼마인 줄은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요.”

“그런 건 굳이 아메탄 가지고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당신이 없다면 부질없어. 그걸 알고 있으면 무조건 지켜야지. 빨리 어머니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얘기나 해 봐요.”

“…….”

“당신이 불행해서 조금이라도 다치면, 그러다가 나를 떠나 버리면 나는 정말로 제대로 살 수가 없어.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꿈속에서지만 생생하게 겪었던 내 진심이에요.”

남자의 절절한 말에 르엘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를 위하는 건, 자신이 괜한 배려로 비밀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안위를 똑바로 챙기는 것일 테지. 온전한 자신으로 있는 것이 그에게 가장 절실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꿈 한번 꾸었다고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 역시 어느새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직면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어. 무언가를 내 무신경함으로 몰라서 잃고 싶지 않아.”

그래서 그녀는 아직도 꿈의 잔상에 벌벌 떨고 있는 그에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1년 후.

“르엘라! 나 왔어.”

아셰와 리젠이 발랄하게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르엘라의 조카 리젠과 아셰는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어? 그런데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도 있네.”

아셰는 르엘라 옆에 있는 루벤을 보고 새침하게 코를 찡긋거려 보였다. 루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쪼꼬만 게 건방진 소리 한다. 꼬맹이 넌 저런 영악한 거 배우면 안 된다.”

“네?”

리젠이 아셰와 루벤 사이에 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루벤이 아셰의 이마를 검지로 살짝 밀며 거만하게 말했다.

“르엘라 앞이 아니면 이런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거면서,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거지.”

그 말은 사실이어서 아셰는 입술을 삐죽거려 보였다. 르엘라와 루벤이 공식적인 연인이 되며 둘은 안 마주칠 수가 없는 사이가 되었다.

1년 전, 루벤이 경영권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고 테스티와 완전히 그 문제에 있어서는 결별한 이후로 아셰는 그가 예전처럼 싫지 않았다. 그와 테스티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영권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면서 르엘라와의 스캔들까지 해명했던 기자 회견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전 국민 앞에서, 르엘라와의 열애 사실을 공표하고 그녀가 재벌가에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아 아메탄과 본인이 선을 긋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는데, 모친 테스티에 대한 반감이 분명히 작용했다고 아셰는 생각했다.

루벤은 아메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한때 함께 일했던 젊은 인턴 몇몇과 벤처를 꾸리고 있었다. 나름 성공적으로 잘 운영하고 있는지 최근에는 주식까지 상장했다. 여전히 자유분방한 차림새에 건들거리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아셰는 그가 예전에 아메탄에 있을 때보다 더 안정되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나갔으니 아메탄은 아주 평온하겠다?”

루벤이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말하자, 아셰가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들쑤시고 나가서, 윌리엄이 원래 오빠 쪽 사람들하고 사사건건 부딪히느라 상당히 성가셔해. 요새 엄청 폭력적으로 변했어. 늘 사람 좋아 보이는 것 같더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야.”

루벤은 굳이 아메탄에 사람을 심을 정도로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치 빠른 아셰가 물어 주는 정보가 전부였다.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이 기세로 가다가는 나중에 나도 때릴 것 같은데…… 아주 정도가 심하면 내가 직접 고발해 버린 뒤에 다니엘보고 회장하라고 할 거야.”

“다니엘? 걘 그런 거 적성에 안 맞을걸.”

“그래도 잘할 텐데.”

“그건 그렇지. 뭐, 어떻게 크느냐는 아직 모르는 거지만.”

“고등학생이면 얼추 성향은 정해진 거거든? 오빠는 고등학생 때부터 성적이 엉망이었다며?”

“그러면 이 대학에 들어올 수나 있었겠냐? 몇몇 과목 가지고 일반화하지 마.”

막 입학한 고등학생 이복동생과 말싸움을 하는 루벤을 보고 르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벤처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전문적이고 어른스러운데, 이럴 때는 정말 아직도 애 같았다.

“일단 앉아. 주스라도 줄게.”

르엘라가 그들의 묘한 신경전을 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랑 리젠이랑 할게. 어디 있는지 알아.”

아셰는 폴짝폴짝 뛰어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옆에도 루벤이 선물한 장미꽃 한 다발이 꽃병에 예쁘게 꽂혀 있었다. 리젠이 컵을 꺼내자 그녀가 그중 하나를 냉큼 집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나 이걸로 할래. 이 컵 진짜 예쁘다.”

“안 돼.”

루벤이 턱을 치켜들며 끼어들었다.

“그 머그컵, 내가 르엘라 커피 마실 때 쓰라고 사 준 거야. 넌 그 옆에 대학 로고 박힌 걸로 먹어.”

“별 대단한 사연도 아닌데 무슨…… 애인한테 머그컵 하나 사 준 게 그렇게 대수인가? 동생이 한번 입 댈 수도 있는 거지.”

“그래도 안 돼. 우리한텐 모든 게 다 특별한 사연이야.”

“웃기시네.”

아셰는 콧방귀를 꼈다.

“밖에서 볼 때는 그냥 그저 그런 밍밍한 연애담이거든? 별달리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그냥 서로 수업 같이 하다가 눈 맞은 게 다잖아. 하나도 안 특별해.”

루벤이 결국 벌떡 일어나 아셰의 머리를 꾹 눌렀다. 덕분에 아셰는 주스를 따르다가 살짝 흘리고 말았다. 아셰가 신경질을 내기도 전에, 루벤이 천천히 말했다.

“그저 그런 밍밍한 연애담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의 푸른 눈에 이상한 애수가 서려서, 아셰조차도 더 빈정대지 못했다.

“이렇게 그냥 서로 평범하게 사랑하고, 르엘라의 연구가 하나 끝날 때마다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이러다가 결혼하고…….”

묘하게 아련한 그의 표정과는 다르게,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꼬맹이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신부 입장은 내가 같이 해 줄게. 서운해 하면서 걱정하는 르엘라 옆에서 누구보다도 크게 박수를 쳐 주지. 아, 그 신랑이 될 놈은 미리 나한테 인사시켜라. 적당히 괜찮은 놈인지 아닌지 내가 술 좀 먹이면서 잘 봐 줄 테니까.”

갑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리젠은 고모의 애인에게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아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음, 리젠은 누구랑 결혼하려나. 아! 한 학년 위에 류스카 문 선배 어때? 문 그룹도 상당히 알짜배기인데.”

“글쎄, 류스카라면 둘째 아닌가? 거기 자식 교육 험하게 시킨다고 소문났던데 인성 파탄 났을걸?”

“오빠보다?”

“어디에 비해? 나 정도면 인성이 꽤 괜찮은 편이지.”

그 말에는 르엘라마저도 혀를 찼지만, 루벤은 턱을 긁으며 뻔뻔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걔 누나, 레비에가 만만치 않아. 경영권 절대 안 뺏길 거야. 지난번에 투자 건 때문에 한번 만났는데 보통이 아니더라. 류스카가 성인이 되고 경영권 싸움에 끼어들면 꽤 살벌할 거다. 좀 평범하면서도 건실한 놈 없냐? 재벌가랑 얽혀서 시끄러운 건 르엘라면 충분해.”

“아, 그런 애 있어! 건실하기 그지없는 학생, 카이든 루스!”

“무슨 소리야?”

리젠이 질색을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걔 이름이 거기서 왜 나와?”

“잘생겼잖아.”

“잘생긴 걸로 치면 다니엘이지.”

“운동도 우리 학교에서 제일 잘하고, 성적도 너랑 엎치락뒤치락하고…… 그 정도면 집안도 좋은데? 다니엘이랑 결혼하면 끔찍한 아메탄에 들어오게 되는데 카이든이 나을 걸?”

“아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운동은 뭐, 잘하긴 하지만 여자애들이 건네주는 음료수 한 번을 제대로 안 받아주는 애잖아? 성적이야…… 음, 나랑 비슷하니까 더 기분 나쁘다고!”

르엘라는 갑자기 말이 빨라진 리젠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말수도 완전 적고, 매사에 무뚝뚝하고…… 다니엘하고만 좀 얘기하지 나머지 애들하고는 말도 잘 안 섞잖아. 모르긴 몰라도 단둘이 같이 있으면 엄청 재미없을 텐데, 그런 애랑 무슨 결혼이야?”

“와, 리젠.”

아셰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 갑자기 말 되게 많아졌다.”

“꼬맹이, 너 그 카이든이라는 애 좋아하는 거 아냐?”

루벤은 건들거리며 장난스럽게 이복동생의 편을 들어주었다.

“나도 르엘라에 대해서 누가 물어보면 말 되게 많아지는데.”

르엘라는 피식 웃으며 이어지는 루벤의 주책을 모두 다 들어 주었다.

“남들 귀에는 딱히 별거 없는 그저 그런 사랑이겠지만, 나한텐 사소한 일 하나하나 엄청 소중해서 말이야.”

루벤의 말마따나, 별다른 위기조차 없었던 그저 그런 사랑을 하고 있어서 행복한 날들이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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