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0화 (255/256)

  

외전 10화.

혼자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를 부른 사람은 의외로 테스티였다.

그녀는 루벤이 없는 지금 괜히 스캔들을 부인했다가 더 큰 역풍을 맞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따위 루머는 신경도 쓰지 않는 아들의 성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람을 불러 루벤을 위해 윌리엄을 처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며 그에 따라 줄 것을 부탁했다. 나람은 망설이지도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딱히 스캔들에 대한 부인 기사가 없는 채로 몇 년을 지내 왔는데, 갑자기 루벤이 적극적으로 2년 전 스캔들이 모두 다 거짓이었다며 기자들에게 터트린 것이다. 루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나람은 루벤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사랑했다.

그래도 루벤과의 스캔들로 인해 각종 지저분한 자리에서 열외가 되고 배우로서 유명세도 얻었다. 그녀는 루벤의 새로운 기사에 반박할 정도로 은혜를 모르는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다시 한 번만 만나고 싶었고, 스캔들이 거짓은 맞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며 질척거리는 인터뷰를 내고 나서야 그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을 계속 거부하던 그는, [2차 인터뷰를 내보낼까 생각중이에요.]라는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굉장히 성가시다는 얼굴을 하고 그녀와의 만남에 응해 주었다.

“2차 인터뷰 같은 걸 왜 해? 그냥 여기서 멈추자고. 너도 더 이상 나랑 얽혀서 좋을 것 없어. 기자들 앞에서 질질 짜는 거야 내 알 바 아니지만 그 시나리오에 나는 좀 빼.”

“이유가 뭐예요?”

나람은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그 동안…… 그냥 가만히 계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인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내가 그것까지 설명해야 되나?”

“물론 기자들이야, 본격적인 후계 궤도에 오르시기 위해 절 정리한다고 얘기했지만…… 아니라는 거 잘 알아요.”

“그래? 기자보다 배우가 더 정보력이 강하다니 유명 일간지 기자들은 다 사표 써야겠어. 아니다, 네가 언론사 하나 차리지 그래.”

“테스티 님께서 시키신 일을 다 못했는데 이렇게 정리당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신의 독단적인 선택 아니에요?”

“……뭐?”

루벤은 다리를 떨면서 건들대며 앉아 있다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어머니가 너한테 뭘 시켜?”

“스캔들이 그렇게 나고, 당신은 외국으로 떠나 연락조차 안 되고…… 그때 테스티 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나람과 테스티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루벤의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어머니가 뭘 알고?”

“다 알고 계시던데요. 그리고 윌리엄 님의…… 스캔들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어요.”

나람의 이어지는 말에 루벤은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성추행이든 추문이든 얽어서, 이복동생의 여자를 건드린 남자로 결정적일 때 이미지 깎아내리라고…….”

테스티가 무엇을 계획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윌리엄은 지저분한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인사불성일 때 나람을 투입하면 원하는 사진 정도야 금방 나올 것이 뻔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테스티가 생각하는 ‘결정적인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넌 그걸 또 알겠다고 했어? 노친네가 더듬다가 때리는 거 꼴 보기 싫어서 데리고 나와 줬더니 세우는 인생 계획이 그딴 거야?”

“저는…….”

나람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테스티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

“한 번 끌고 나와 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어머니의 그 미친 소리를 들…….”

“당신을 사랑해서요.”

루벤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인터뷰 내용대로…… 저는 당신을 너무 사랑했어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하고 나면…… 혹시라도 당신과의 인연이 더 이어질 수도 있고요.”

“…….”

“어떤 사랑이 시작되는 건…… 한 번, 단 한 번이면 충분하잖아요.”

그녀의 간절한 말을 듣고 신랄하게 비꼴 줄 알았던 루벤은 의외로 잠자코 있었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

나람은 그의 동의가 왠지 비꼬는 것보다 더 아프다고 생각했다.

“일단.”

그는 피곤한 듯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네가 뭘 바라고 날 불러 냈는지는 알겠어. 너는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라, 기회가 없었을 뿐 네 희생을 각오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 아냐.”

“네, 그러니까…….”

“그래도 너와 내 인연은 여기서 끝이야. 어머니의 그 말도 안 되는 말은 잊어. 너는 그냥 네 인생 계속 살면 돼.”

“안 그래도 저를 따로 부르시지 않는 걸 봐서, 저는 효용성이 다했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2년 전과 지금의 차이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거야.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 감흥이 없어. 그러니 괜한 희망 갖지 마.”

결국 무너지는 나람의 표정을 본체만체하며, 루벤이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테스티가 자신의 여자 문제까지 이렇게 철저히 이용할 줄은 몰랐다. 어쩐지, 그때 귀국하고 나서 그 스캔들에 대해 아무 말도 없더니…….

자신을 차기 회장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수를 쓰고 있는 건 알았어도, 자신이 나람을 충동적으로 구해 준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가 볼게. 잘 살아라.”

루벤은 벌떡 일어났다.

나람에게 접근한 테스티가, 르엘라에게 접근하지 않았을 리가.

* * *

르엘라는 무거운 마음으로 혼자서 연구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중이었다.

나름 평온했던 그녀의 일생에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가득 채운 장미 꽃다발들 때문에 완전히 분위기가 바뀐 연구실처럼, 그녀의 삶이 다른 색채로 정신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테스티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조카인 리젠의 이름까지 듣고 난 이상 아무 생각 없이 넘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루벤의 어머니였다.

문득 르엘라는 자신이 루벤을 꽤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 그렇다면 고민조차 할 여지가 없을 텐데, 자꾸만 새로운 아메탄을 이끌고 싶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자꾸만 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신념이라는 게 있고, 연구에 뛰어들 때 공언했던 원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실체 없는 교수님의 신념 때문에 당장 장학금이 필요한 대학원생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줄 수 없는 학교 입장은 생각 안 합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힘겨운 환우들을 위한다고 교수님 밑의 인재들이 마음 놓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발로 걷어차신다고요?’

교수 회의에서 들었던 온갖 비난의 말까지 떠올라, 르엘라는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개인의 신념 같은 건 힘이 없어요. 이 복잡한 사회에서 무작정 옳은 가치관이 있을 리도 없고. 혼자만의 고집으로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르엘라는 리젠의 엄마가 죽었을 때를 기억했다. 여러 가지 합병증 때문에 출산 후 결국 어쩔 수 없이 하늘로 가 버려야 했던 그녀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리젠은 엄마 없는 아이로 크지 않았을 테고, 오빠는 새언니가 그리운 마음에 속세를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새로운 약물로 치료를 하면 살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다만 천문학적인 금액인데다가 소생의 확률도 높지 않았다. 새언니는 오빠에게 말도 하지 않고 그 치료를 거부했다.

르엘라는 그때 이후, 자신이 개발하는 신약만큼은 만인에게 접근이 용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갖 제약 회사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여러 가지로 조건이 좋지 않은 학교 연구팀에 남은 이유가 그것인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이 밤중에 그녀의 연구실을 찾아올 사람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아, 르엘라는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나예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 모든 고민의 중심에 있던 남자가 한없이 복잡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연락도 없이 왜…….”

“불안해서.”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불안해서.”

“네?”

“혹시 어머니가 부르지 않았어요?”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 집안에는 비밀이라는 게 없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르엘라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내 생각보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중이었고…… 이용할 수 있는 걸 다 이용하는 사람이더라고. 내가 안일했어요. 어머니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하든 나와 목적이 같으니 상관없다고 여긴 게 오만했어.”

“…….”

“이미 내겐 소중한 사람이 생겼는데, 그러면 당신 주위의 모든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어야 했는데.”

“진정해요.”

르엘라는 그녀를 안고 있는 그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눈치채고, 가만히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아직 아무 일도 안 벌어졌는데, 왜 이렇게 떨어요.”

“무서워서…….”

그의 거침없던 첫인상을 생각해보면 ‘무섭다’라는 단어 자체가 그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르엘라는 그 와중에 피식 웃고 말았다.

“일단 앉아요. 앉아서 얘기해요.”

“떨어지기 싫은데.”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가뜩이나 몸집이 작은 르엘라는 그에게 폭 감싸인 형태가 되었다.

“비웃지 말아요.”

“네.”

“사실 여기로 오는 길에 차 안에서 살짝 졸았거든. 그때 꿈을 꿨어요. 나 원래 꿈 같은 거 잘 안 꾸는데 말이에요.”

“무슨 꿈인데요?”

“어머니가 나를 핑계로 당신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꿈.”

“그건 꿈 아닌데요. 합리적인 추론이에요.”

“그런데 내가…… 계속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거야.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고, 나는 그냥 사랑에 눈이 멀어 등신같이 칠렐레팔렐레 행복한 미래만 생각하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꿈에서는…….”

그녀의 귀에 울리고 있는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당신이 나한테 헤어지자고 해 놓고, 미쳐 버렸어요.”

“네?”

르엘라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제가 왜 미쳐요?”

“워낙에 똑똑한 사람인 데다가 신념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고의는 아니었는데 어머니 말을 듣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갔던 것 같기도 하고.”

르엘라는 자신이 그럴 리 없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난 당신이 미쳐도 상관없어서…… 어떻게든 옆에 두려고 했어요. 밥을 먹이고, 몸을 씻겨주고, 이유 없이 웃으면 함께 웃어 주고, 난동이라도 부리면 끌어안아 얼러 주고, 옆에서 잠을 재우고.”

그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나서 그냥 꿈 얘기를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헤어지자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당신이 미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의 좌절감이 꿈에서 깨고 나서도 너무 생생해서 온몸이 벌벌 떨렸지. 세상이 무너지고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거든요.”

르엘라는 그의 정처 없이 떨리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매만져 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다독이듯 물었다.

“그래서 내 뒷수발 열심히 했나요? 꿈에서?”

“아니…… 당신이 결국 죽었어.”

이러다 울겠다 싶어서, 르엘라는 간신히 그를 떼어내고 눈을 마주쳐 주었다. 불안함에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꿈 한번 꿨다고 이런 표정을 하는 남자라니, 아무리 자신의 인생이 복잡해져도 도저히 그를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는 살짝 웃으며 그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그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평생을 당신을 그리워하면서, 모든 걸 뒤로한 채 바람처럼 떠돌이로 살았어요.”

“여행을 좋아하니 나쁜 결말은 아니네요.”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루벤이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작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게 어떻게 나쁜 결말이 아니에요. 당신이 내 인생에 없는데. 내 부족함으로 당신을 보냈는데 그게 왜 끔찍한 결말이 아니야.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그 세계가 완전히 평화롭다고 하더라도 내 세상은 이미 무너졌는데.”

꿈을 얼마나 생생하게 꿨는지 몰라도, 그는 완전히 가상 세계에 몰입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이 없어도 비는 내리고, 장미꽃은 피는데. 그런 것들이 아니어도 당신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오만 군데에 다 있는데. 지나가는 연인들만 봐도 그때의 우리가 생각나고, 따라 죽지 않는 나 자신이 환멸스러워 욕지기가 치미는 삶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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