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9화 (254/256)

  

외전 9화.

“그게…….”

르엘라는 담담하게 대꾸하려다가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술에 그의 손가락이 슥 스쳤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말하지 말아요.”

루벤은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이 아는 불량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무심한 얼굴, 관심 주제가 나오면 문득 날카로워지며 진지해지는 얼굴, 요즈음 그녀의 앞에서 많이 보이는 장난스럽게 보채는 아이의 얼굴.

그러나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잔뜩 긴장해서, 살짝 떨기까지 하고 있는 얼굴. 어딘가 수줍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르엘라는 문득 깜짝 놀랐다. 루벤과 수줍음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실히 수줍어하고 있었다.

“지금…… 너무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르엘라는 살짝 미묘해진 분위기에 마른 침을 삼켰다.

수줍어하면서도 천천히 그는 다가오고 있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그의 얼굴과 숨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 손을 루벤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감쌌다.

긴장한 티가 역력하면서도 열기를 숨기지 못하는 그의 푸른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이, 살짝 각진 코끝이, 제멋대로 넘긴 금발이, 그리고 살짝 떨리고 있는 붉은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딪힌 입술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평소의 루벤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나하나 기억하겠다는 듯이 느리면서도 서툰 입맞춤에 차차 열기가 어리기 시작하여, 르엘라는 눈을 감고 말았다.

* * *

“……그래?”

한밤중, 와인을 마시고 있던 테스티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온갖 사치스러운 것들로 몸을 치장한 그녀가 고혹적으로 다리를 꼬았다. 제펠탄의 두 번째 아내로 아메탄에 들어와 온갖 편법으로 각종 사업에 슬금슬금 기웃거리기 시작한 그녀가 결국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짙은 야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는 지금까지 루벤에게 이 모든 것을 주기 위해 달려왔다. 그런데 지금 루벤이…….

측근의 보고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싱긋 웃었다.

“르엘라 하카트를 불러와.”

* * *

“여기까지 발걸음하고, 고마워요.”

테스티는 그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고아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르엘라는 딱딱하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하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연구실에 출근하려고 아침에 나오니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학교 측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조금 늦는다고 모두 통보해 놓았다는 말에 살짝 질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 고급 호텔에 발걸음을 했고, 따라서 호텔 깊숙한 곳에 이렇게 사적인 공간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보는 것만도 아찔한 고급 티세트를 앞에 두고 테스티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일단 축하할게요. 이번 연구 결과가 대단하다면서.”

“감사합니다.”

르엘라는 반사적으로 지난 교수 회의를 기억해 냈다. 여러 제약회사에서 독점을 요구했고 약학 대학 측에서는 후원의 이름으로 연구비를 따내길 원했다. 그러나 르엘라는 수익이 목적인 연구가 아니었고, 약이 비싸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연구 성과물의 무료 배포를 선언한 상태였다.

그때 독점을 원했던 회사 중, 아메탄 계열의 제약 회사 역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미리 약속하지 못하고 급히 모셔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많이 바쁘실 텐데 실례가 많았어요.”

테스티의 말에 르엘라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차를 마셨지만 대체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예의상으로라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르엘라를 보며 테스티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잠시 지어 보였다.

“교수님의 성향을 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서로 시간 낭비하지 않게.”

딸깍,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루벤이 교수님한테 미쳐 있다면서요.”

“……미쳐 있다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아니, 미쳐 있는 거야.”

테스티가 눈 밑 애굣살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내 아들은 내가 잘 알아요. 미쳐 있는 것 맞고, 앞으로도 아마 계속 미쳐 있을 거예요.”

“…….”

“나도 교수님이라면 완전 찬성이에요. 사실 나람 같은 애는 다루긴 쉬웠지만 마음에 안 들었거든. 끝까지 질척거리는 게 아직도 기분 나쁘고. 어쨌든 교수님만 결심하면…….”

르엘라는 이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우리 모두에게 정말로 큰 이득이 되는 결합일 거예요.”

“이득이라뇨?”

“기자들이 떠들어 대기 전에 빠르게 약혼 발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결혼도 괜찮고.”

루벤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먼 미래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외부에서 결혼 이야기를 들으니 상당히 불쾌해졌다.

“왜냐하면 곧 회장님이 돌아가실 것 같고.”

그 말을 꺼내는 테스티의 얼굴에 하나도 슬픔이 묻어나지 않았다.

“그 전에 루벤의 입지를 세우는 데에 하나라도 더 보태야 되거든요. 그런데 아주 잘되었네요. 내가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건지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확실히 루벤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이번 연구 결과로 만들어질 신약, 아메탄과 독점 계약 맺읍시다. 학교에서 나와서 아메탄 제약 회사 수석 연구팀장으로 모실게요.”

“죄송합니다.”

르엘라는 즉시 대답했다.

“공익적인 목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굉장히 활용 범위가 넓고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병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필연적으로 이익을 내야 하는 분야에 두어 상업적 논리에 휘둘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루벤은 아메탄을 원하는데? 그 애는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것처럼 무능하지 않아요. 정말로 답 없는 양아치 새끼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지. 벌써부터 줄 서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나는 안 될 일을 되게 한답시고 교수님을 이용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 정도 반대는 예상했다는 듯, 테스티가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공익……, 학문…… 다 좋지. 하지만 루벤이 행복한 것도 좋지 않겠어요? 그리고 둘 사이에 아이라도 낳아 봐. 그 아이에게 아메탄 물려주고 싶지 않을까? 아이를 낳으면 세상이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거든요. 언젠가 나를 이해할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확신해요.”

“…….”

“물론 언론에서 엄청 때려 대겠지. 고고한 학자인 척하다가 재벌가 들어갈 생각에 신념 팔았다고 난리일 거야. 연구한다고 돈 한 푼 준 적 없는 것들이 염치도 없이 핏대 세워 가면서 욕할 텐데, 다 순간이에요.”

르엘라는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걸어 온 여자의 눈을 고요하게 들여다보았다. 아니, 목적이 뚜렷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에서 오히려 서로 닮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당연히 다른 소중한 것은 포기해야지. 무형의 신념이나 남들의 인정 같은 것이 루벤보다 소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어요. 아.”

반응이 없는 르엘라를 보며, 테스티가 우아하게 덧붙였다.

“조카도 한 명 있던데.”

그 말에 르엘라의 표정이 바뀌었다. 오빠가 남겨 두고 간,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단 하나뿐인 조카 리젠의 존재까지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 나라는 돈과 권력이면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아요. 그 조카가 입학 예정이라는 고등학교가 또 때마침 우리 아메탄의 후원을 받고 있네? 10대 아이들은 예민해서 학교생활에 영향을 많이 받을 텐데……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

“개인의 신념 같은 건 힘이 없어요. 이 복잡한 사회에서 무작정 옳은 가치관이 있을 리도 없고. 혼자만의 고집으로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 * *

“야.”

루벤은 팔짱을 낀 채로 성의 없게 말했다. 표정이 얼마나 싸늘했던지 가뜩이나 날카로운 인상이 더 섬뜩하게 보였다.

“그렇게 끈질기게 불러 냈으면 얼른 용건이나 말해. 스토커로 신고하기 전에.”

그의 앞에는 큰 눈망울을 깜빡거리고 있는, 아직 앳된 얼굴의 나람이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꽤 이름을 알린 배우답게 누구나 한 번은 돌아볼 정도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화려한 옷차림새가 인상적인 여자였지만, 루벤의 표정에는 짜증만이 가득했다.

“내가 널 만나 준 건, 생각해 보니 적당히 이별 얘기도 하지 않은 것 같아서야. 사실 귀찮아서 기자들 통해 얘기한 거지만 너도 염치가 있다면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저, 저는…….”

나람은 살짝 말을 더듬더니, 눈물을 애써 참아 가며 말했다.

“물론 은혜는 잊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이후 인터뷰도 그런 내용으로 낸 거고요…….”

몇 년 전, 무명 배우였던 나람은 억지로 재벌가의 술자리에 접대 목적으로 불려 갔다. 어느 회장이라는 어느 늙은이의 손길을 자신도 모르게 거부했다가 형편없이 손찌검을 당했다. 그러나 업계의 큰손이라 불리며 군림하던 사람이라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그녀를 감싸 주지 못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루벤이었다. 그는 다른 방에서, 이딴 접대 더럽다고 화를 내며 나오던 도중에 복도까지 뛰쳐나온 상태로 맞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손 떼, 영감. 최상의 컨디션이어도 제대로 서지도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힘까지 빼서 뭘 대체 어쩌겠다고.’

그는 경멸의 눈빛으로 그 회장을 한번 바라보고, 방 안을 훑다가 그곳에서 방관하고만 있던 윌리엄을 발견하곤 눈길을 한번 준 뒤 피식 웃었다.

‘너, 너! 이 건방진 사생아 따위가…….’

그 회장이 삿대질을 하면서도 위압적인 루벤의 덩치를 보며 차마 덤벼들지 못하고 있는데, 루벤이 턱을 치켜들며 나람에게 말했다.

‘건방진 사생아가 보기에도 너무 역겨운 장면이라 끼어들 수밖에 없었어.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난 더 이상 안 들을 건데, 따라 오려면 따라 오든가.’

나람은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황급히 그 회장에게 달려가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이건 당연히 아메탄의 의견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저 자식은 거의 통제 불능이고…… 아, 아마 저 여자애와 알던 사이일 겁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 이렇게 주제넘게 나설 리가 없지요.’

한순간에 숨겨진 자식에서 후계자 궤도에 오른 것도 모자라 풍운아적인 언행으로 세간의 관심이 쏠려 있던 루벤과 무명 배우 나람의 스캔들이 터진 것은 다음 날이었다. 나람은 그 스캔들 뒤에 윌리엄이 있다는 사실을 기획사 사장을 통해서 알았다.

그날 그 회장에게 했던 말의 면을 세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사업상 문제를 일으킨 루벤에 대한 보복성 기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기획사 사장은 이런 스캔들은 무명 배우에게는 오히려 완전히 득이 된다며 상당히 좋아하더니 나람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정정기사조차 내보내지 않았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나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루벤은 아니라고 하기도 귀찮았는지 별다른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나람은 얼마 안 있어서 그가 지금 여행을 위해 출국했으며 인터넷조차 되지 않는 오지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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