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8화 (253/256)

  

외전 8화.

그녀는 아주 평범한 장미꽃다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미꽃이 좀 익숙해졌다면, 반말하는 어린 남자도 좀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에 부풀어 하는 말이었는데.”

딱히 남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르엘라의 인생은 지금껏 연구였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 남들이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것,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한 답이 있는 것.

루벤은 그 어떤 범주에도 들지 않았다. 사실 그와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들은 빈말이라도 그와 잘 지내라고 해 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그가 연관이 되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바보같이 되물었다.

“혹시…… 저를 좋아하세요? 대체 왜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여자를 좋아하는 게 처음이라. 교수님은 어때요?”

“…….”

“싫지 않으면…….”

그가 받으라는 듯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게 처음이라면서 저 사람은 어쩜 저렇게 확신에 차 있을 수 있지. 르엘라는 가만히 숨만 쉬고 있다가, 문득 그녀가 이 꽃을 거절하고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거절할 수 없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한순간에 당신이 마음속에 박혔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작은 손을 들어 꽃다발을 받았다. 곧 루벤의 커다란 손이 엉겨 붙었고 손가락이 맞붙자 순식간에 열기가 올랐다.

“그 뒤로 내내, 나 오랫동안 당신 눈에 담았어요.”

루벤이 거친 호흡 속에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손을…… 글자를 쓰고, 식물 이파리를 만지고, 꽃을 잡아 보여 주던 이 손을 얼마나 잡고 싶었는지…….”

공익을 위한 연구를 한다, 이 사실 하나만 염두에 두고 달려왔던 인생이었다. 복잡한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벤 역시 단순한 한 명의 학생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인생 자체가 너무나 복잡한 남자가 그녀의 삶에 얽히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힐끔힐끔 메시지를 기다렸던 것, 비가 온다는 말을 얼핏 들었을 때부터 그의 생각을 시작한 것, 메시지가 오자마자 ‘오늘 휴강입니다.’라는 단호한 답을 하지 못하고 달려왔던 것…….

그녀는 단단하게 잡힌 손을 빼내지 못했다.

* * *

[자요?]

[아뇨.]

[조카는 자나?]

[네.]

[잠깐 나와요.]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였다. 르엘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히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나오라는 건지 장소가 다시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든 생각에 베란다 바깥을 내려다보니 아파트 바로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황급히 옷을 걸쳐 입고 나가니, 그가 장미 한 송이를 든 채 씩 웃으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주소는 어떻게 알고…….”

“화단에 장미 없는 가족 기숙사 중에 불이 켜져 있는 집이 있는 아파트는 하나뿐이길래.”

“제가 자고 있으면 어쩌려고 한밤중에 그런 메시지를 보내셨어요?”

“그럼 잘 자나 보다, 하고 혼자 좋아하면 되죠.”

“그럼 헛걸음인데.”

“왜 헛걸음이야. 보고 싶은 마음에 충실했던 나의 소중한 추억이지. 모욕하지 말아요.”

“……그럼 앞으로 보고 싶으면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올 거예요?”

“아니.”

그는 그녀의 손에 장미꽃 한 송이를 쥐어 주며 킬킬 웃었다.

“그럼 연구실에 하루 종일 내가 앉아 있어야 하는데, 대학원생들이 기겁하지 않겠어요?”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진짜 못 참을 때만 올게요. 그리고 이런 한밤중이어야 사람도 없고 쓸 데 없는 사진도 안 찍히지. 어차피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아직 교수님이 마음의 준비가 안 되지 않았을까?”

“무슨 마음의 준비요?”

“안 좋은 일로 기사 나는 거.”

르엘라는 문득,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비난을 받아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고난과 역경은 있었어도 그녀의 ‘고매하고 철저히 학문 중심적인 가치관’ 앞에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인생 내내 비난을 받았던 사람이다.

“복잡한 내 인생에 끌어들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래서 나도 이제 더 제대로 살아 보려고.”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더니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뭐든지 거침없던 남자의 손길은 마치 겁 많은 아이 같았다.

“어머니가 뒤에서 나 차기 회장 만들려고 지저분한 일을 맡고 있는 것 알고 있죠? 난 사실 좀 다른 의미에서 재미있을 것 같아 가만히 모른 척했거든. 하지만 이제 정말로 회장이 될 거야.”

“……왜요?”

“어설프게 유명하면 욕밖에 안 먹어.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걸 누구나 부럽게 만들고, 당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그리고…….”

루벤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아무 대가 없이 대학에 연구비 지원 팍팍 할 거예요.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연구만 할 수 있도록.”

“그건 제 삶의 몫이니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그냥 내 옆에 있는 게 미안해서, 뭐든지 해 주고 싶어서……. 그리고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들쑤시는 건 아니에요. 말했지만 나는 아메탄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름 신념이 있다고.”

“뭐, 네…….”

“꽤 오래 걸리고 시끄럽겠지만, 계속 곁에 있어 줘요. 사실 그냥 외국으로 도망가서 시끄러운 사람들 잠잠해질 때까지 단둘이 실컷 붙어 있고 싶지만, 당신에게도 소중한 것들이 많으니까 참는 거예요. 그러니까…….”

르엘라는 조용히 그의 열띤 말을 듣고 있었다. 발이 둥둥 뜬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인상이 날카롭긴 하지만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다. 입이 험하긴 해도 그만큼의 퇴폐적인 매력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재벌가 총수의 아들이고 여자를 만나는 데에 그다지 어려움이 있을 리 없었다. 당장 나람 같은 예쁘고 어린 배우도 눈물로 끝까지 돌아와 달라며 굴욕의 인터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르엘라는 사근사근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그에게 딱히 잘해 준 적도 없었다. 대체 그런데 왜 그가 자신에게 저렇게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갑자기 폭풍처럼 밀려오는 이 남자의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에서, 혼란한 마음속에 그의 절실한 말만 가슴에 박혔다.

“절대 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아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 다 평생 갚을게요. 옆에만 있어 줘요. 난 그거면 돼.”

마음을 고백한 이후,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물론 연구실에 잔뜩 장미꽃을 보내곤 했다. 어차피 그는 항상 르엘라 생각이지만, 르엘라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하려면 주변에 자신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물이 많아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었다. 르엘라는 차마 민망하여 ‘이런 것 없어도 당신 생각이 난다’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것이 연애라면 그녀의 인생에서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달콤하기 그지없는 시간들이었다.

수업이 아니어도 서로를 일상에 얽어 가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학점이 나오던 날,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어린 짐승처럼 엉겨 붙어 끙끙거렸다.

“B라니…….”

“표본 다양성이 떨어지고, 퀴즈 점수도 애매하고, 리포트도 성의가 묘하게 없는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졸업은 할 수 있잖아요.”

“하긴.”

루벤은 한숨을 섞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내 대학 성적 중에서 굉장히 좋은 축에 속하긴 하지. B 정도만 되어도. 교수님은 다 A죠?”

“말이라고요. 아, 조만간 학회가 하나 있어요. 외국에서.”

르엘라의 담담한 말에 루벤이 즉시 대답했다.

“어? 나 따라갈래요.”

“어디인지 듣지도 않고요?”

“상관없어요. 그냥 따라갈래. 밤에 자유 시간은 있죠? 아무리 학회라도.”

그는 신나서 말했다.

“난 어딜 가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내요. 그게 내 장점이거든. 당신이 학회에서 어려운 소리 할 동안 나는 제일 멋있는 곳을 물색하며 돌아다닐게요. 그럼 다 끝나고 나서 딱 거기로 내가 모셔다드리는 거지.”

학회에 가서 뭔가 구경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 해 봤던 르엘라는 문득 그와 함께 간다면 아주 다른 느낌의 출국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평생 학회 쫓아다니면, 일부러 세계 일주 할 필요도 없겠네.”

“……평생이요?”

“당연하지. 아, 물론 휴가 때는 내가 더 좋은 데도 데려갈게요. 연구만 하느라 바깥바람도 못 쐬는 것 같은데 사람이 쉴 땐 쉬어야 돼. 같이 사는 조카가 마음에 걸리면 같이 가고.”

“…….”

“대신 신혼여행에는 동행시키면 안 돼.”

르엘라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가 결국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자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제멋대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무채색이었던 그녀의 인생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대답 안 해요? 설마 독신주의자? 사실 내가 그런 비슷한 거였는데, 완전 생각이 바뀌었거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건 무조건 다 할 거라고요. 미리 경고해두는데 결혼 싫다고 해도 엄청 조를 테니 그렇게 알아요.”

“독신주의자 비슷한 거였는데 왜 바뀐 거예요?”

“난 나랑 결혼할 여자한테 잘해줄 자신이 전혀 없어서 늘 불쌍하다고 생각했거든.”

루벤이 즉시 대답했다.

“근데 당신한테는 최선을 다해 엄청 잘해줄 것 같은 확신이 있어서.”

건들거리면서도 거침없는 그의 말에 르엘라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리젠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안 돼요. 그 전에 하자고 하면 정말 신혼여행 때 리젠을 데려갈 거예요.”

“어…….”

루벤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하긴…… 해 주는 건가?”

“왜요?”

“나만 미친놈처럼 달아올라서 날뛰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감격스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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