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화 (251/256)

  

외전 6화.

[비는 그친 것 같은데, 그래도 강의실인가요?]

[A동 앞으로 오세요.]

[‘링크 : 르엘라 하카트 연구진, 전 세계를 뒤흔든 새로운 발견’ 나 가르치기도 바쁠 텐데 언제 이런 성과를 내셨을까?]

[강의 자체는 별로 안 바빠요.]

[사진 멋있게 나왔던데요.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쳐다봤네.]

[그런가요? 확인 안 해서 몰랐어요.]

[그럼 다른 뉴스 기사도 안 봤어요?]

[왜요?]

[보지 말라고.]

[‘링크 : <화제, 단독 인터뷰> 나람 케이슨, 나는 그 사람을 잊지 못해…….’ 이건 봤어요.]

[봤다니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나랑은 이제 조금도 관계없어요. 그딴 잡소리 신경 쓰지 마세요.]

[네.]

[그냥 그렇다고요.]

[알았어요. 괜히 댓글 보지 마세요.]

[상관없어요. 백만 명이 떠드는 것보다 지금 한 명이 신경 쓰여서.]

* * *

[뭐해요? 어디예요?]

[연구실에서 연구하죠. 무슨 일 있나요? 이렇게 밤중에.]

[비가 많이 와서요.]

[수업은 내일 오후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비가 오니까 메시지를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무슨 소리죠?]

[아니, 하고 싶더라고요.]

[대체 왜요?]

[이제 비가 오면 생각이 나서?]

* * *

[뭐해요? 어디에요?]

[기숙사 아파트요. 무슨 일 있나요? 수업도 한참 남았고 비도 안 오는데.]

[그냥 생각나서 연락했어요. 수업이 없고 비가 안 와도.]

* * *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아셰는 르엘라의 연구실을 보고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르엘라, 혹시 장미 꽃다발에 편집증 같은 거 있었어? 오랫동안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몰랐네.”

연구실 여기저기에 장미꽃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숫자를 세어 보다가 포기한 아셰는 어깨를 으쓱하며 르엘라 앞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니면 편집증을 가진 스토커라도 붙었어? 연구 결과라도 내놓으래?”

르엘라는 아무 말도 없이 아셰에게 주스를 한 잔 따라 주었다. 금발 머리를 늘어뜨리고 몸에 꼭 맞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아직 어린데도 몹시 예뻤다. 반짝거리는 그녀의 푸른 눈을 보면서 르엘라는 문득 루벤의 살짝 위로 올라간 눈매를 떠올렸다. 어쨌든 그들은 이복 남매였고 확실히 얼핏 닮은 구석이 있었다.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니?”

발랄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르엘라는 아셰가 이런 얼굴로 자신을 찾아올 때는 마음의 풍파를 어쩌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뭐. 엄마가 좀.”

아셰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나보고 직접 아메탄 저택에 가서 받아오라고 하더라.”

“너보고?”

“어쩔 수 없지. 아버지…… 그러니까 회장님은 의식이 없으시고, 테스티가 엄마를 보면 가만 두지 않을 텐데 절반이라도 아메탄 피가 있는 내가 요구하는 게 맞지 않겠어?”

아메탄 가문에서 생활비를 넉넉하게 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분명 샤틴은 또 과한 쇼핑으로 인해 돈이 모자랐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본가에 네가 갔다 왔어?”

“응. 가서 돈이 부족하니 좀 더 달라고 했지. 내가 말하면서도 면이 서지 않아서 상당히 모멸스러웠지만…… 다행히 다니엘은 내게 잘해 줘. 그 오빠마저 없었더라면 진짜 힘들긴 했을 거야.”

아셰는 리젠과 동갑인 중학생이었다. 르엘라는 연민의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뭐, 나쁘지만은 않았어. 이것저것 소식도 듣고 왔거든. 루벤이 이번엔 졸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윌리엄이 불안해 미치려고 한다는데.”

르엘라는 루벤의 이름이 나오자 은근히 의식이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메시지에 그녀 역시 적응해 버려서인지, 온갖 신경이 루벤에게 곤두세워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잘못 파악한 아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루벤이 좀 힘든 학생이긴 하지? 왜 정석적으로 후계자 가도를 밟아 온 윌리엄이 저렇게 경계하나 싶지? 근데 내가 그래도 좀 관계자로서 가만히 살펴본 바로는, 루벤은 실제로 꽤 난 인간이야.”

“그래?”

“지금 대학도 졸업 못 해서 별다른 직함이 없지만, 어린 인턴들 몇이랑 기획했던 프로젝트가 수익률이 엄청나게 좋대. 윌리엄이 몇 개의 계열사를 굴려서 얻어 낸 수익보다도 높다던데. 윌리엄이 모범적으로 무슨 결정을 내린다고 하면, 루벤은 좀…… 무모하고 엉뚱한데 그게…….”

“…….”

“젊은 임원들 사이에서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아버지의 방식은 아버지의 세대에서만 유효하지, 이제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아셰.”

르엘라는 아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넌 아직 중학생이야. 조금 더 천천히 철이 들어도 돼.”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그럼 좀 더 철딱서니 없는 말해도 돼?”

“그럼.”

“난 요새 그런 생각을 했어. 테스티가 얄미워서 루벤이 진짜 아메탄을 먹는 건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람은 진짜 배 아프지 않을까? 그 여자, 괜히 시끄럽게 들쑤시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드네.”

나람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르엘라는 속에서 이상한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 국민이 알고 있는 그의 스캔들 대상. 물론 2년 만에 루벤이 전격 부인 기사를 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후계자 가도에 오르려고 한다면서 정략혼을 위해 정리한 것이라고 판단한 사람들도 있었다.

“뭐, 나람 입장에서는 나름 참사랑이었던 것 같긴 한데. 마지막 인터뷰 보니까 제발 돌아와 달라고 비는 수준이더라고. 지저분하게 그게 뭐람.”

“그 둘은…….”

르엘라는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 정말로 연인이었나?”

“아, 아냐. 애초부터 연인일 거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이번에 가서 제대로 들었어.”

아셰는 가볍게 부정했다.

“그 기획사 사장이 좀 악질이라서 배우 지망생들 술자리에 밀어 넣는 인간이었는데 루벤이 우연히 보호해 준 거래. 의외로 루벤은 그런 쪽에 있어서는 깔끔해. 윌리엄이 뒷조사를 엄청 했는데 마약이나 도박 기록도 전혀 없었어. 생긴 거랑 말투 보면 무슨 뒷세계 큰손 같은데 말이야.”

아셰의 말에 누그러지는 마음이 있어서, 르엘라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대체 루벤이 뭐라고 중학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바보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무 곳에나 시선을 두어도 장미꽃투성이였다. 르엘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살짝 생각에 잠겼다. 루벤은 그녀의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될 때마다 안기는 온갖 새로운 장미 꽃다발부터 어느새 일상을 파고드는 메시지까지.

루벤의 말이 맞았다. 싫어하지 않아서 익숙해지다 보면 결국 좋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이제 루벤이랑 수업도 거의 다 끝나 가지 않아?”

“응. 세 번 남았어.”

르엘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는 첫 시간 이외에 한 번도 늦지 않았다. 퀴즈도 거의 다 만점이고, 표본도 모두 다 다른 종의 장미지만 어쨌든 모두 다 제출했다.

출결을 어떻게든 다 맞춰서, 마지막 수업 두 번을 나오지 않겠다고 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비행기 표도 예매해 놓았다고 했지. 사실 르엘라도 그 부분을 감안하여 마지막 두 번은 거의 중요도가 없는 수업으로 재배치해 놓았다.

그렇다면 내일이 실질적으로 마지막 수업인 셈이었다.

“장마가 끝났나 봐. 이제 비가 잘 안 오네.”

아셰는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르엘라는 이번 여름에 줄기차게 쏟아지던 비를 기억했다. 수업 시간 전에 비가 올 때면 어김없이 오던 메시지가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그 시간이 되면 휴대폰을 계속 흘깃거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수업 시간이 아닌 시간에도 비가 오면 연락이 왔고.

그래서 비가 오면 그 남자의 생각이 났고.

“그러게.”

르엘라는 천천히 대답했다.

“이제 계속 맑을 건가 봐.”

그런데 이제 그 남자는 맑아도 메시지를 보내온다.

그래서 이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저녁에도 그의 생각이 났다.

* * *

“……그래서, 양치 식물군은 이렇게 정리되는 것입니다.”

르엘라는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나서 시계를 보았다. 요즈음은 계속 날씨가 맑아서 죽 야외 수업이었고, 이제 끝에서 세 번째 강의가 끝날 시간이 되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출국은 내일인가요?”

“……네.”

루벤은 괜히 옆의 사철나무 잎을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르엘라의 담담한 말에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어디 가는지 안 물어봐요?”

“어딘가 가겠죠.”

“매정하네.”

그녀가 비키라는 듯 루벤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반말 썼는데 왜 지적 안 해요?”

“뭐, 이제 끝이니까.”

“……끝…….”

그는 큰 덩치로 오솔길을 막은 채 비키지 않은 상태로 중얼거렸다. 르엘라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살짝 웃었다.

“F는 안 드릴 테니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 거예요. 졸업 축하해요.”

“졸업식엔 어차피 안 갈 겁니다. 내일 새벽에 출국하면 가을까지 안 돌아올 테니까.”

루벤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내뱉듯 말했다.

“졸업식 가 봤자 사진이나 찍히고 조롱이나 당하겠지. 기사거리 던져 주고 싶지 않아요.”

“그렇군요. 졸업하실 땐 장미 꽃다발이라도 드리려고 했는데.”

“농담도 할 줄 아네요?”

“농담 아니었는데요.”

“그럼 졸업식 참석해야겠네. 교수님이 주는 꽃다발 들고 사진 찍히면 악플 백만 개가 달려도 흐뭇할 것 같은데.”

“그런 것 때문에 자꾸 해외로 도시는 거예요?”

르엘라는 담담하게 물었다.

“자꾸 사람들이 귀찮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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