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5화 (250/256)

  

외전 5화.

“멀어요?”

“아뇨. 20분 정도 걸리나?”

“가죠, 그럼.”

르엘라는 이 문답 자체가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 억지스러운 문답에 끌려가면서도 처음 그를 보았을 때처럼 난감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보았던 의외의 성실성과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친밀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건물 밖에 세워져 있는 오토바이를 본 순간, 르엘라는 어이가 없어 팔짱을 끼고 세찬 비 사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그 20분이?”

“네, 이거 타고 20분.”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안 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비 오는 날 타고 달리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고 엄청 시원한데. 난 나름 안전 운전하는 사람이고 이래봬도 무사고니까 걱정 마시고. 하지만 무서우면 안 타도 돼요. 그런 의사는 당연히 존중해 드리지.”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위험하니까 혼자서라도 이런 날에는…….”

루벤은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멍하니 물었다.

“설마 지금 나 걱정해요?”

르엘라는 당연하다고 대답하려다가 장난기가 없는 그의 표정에 살짝 놀랐다.

“내가 오토바이 타다가 빗길에 뒈져 버리면 그럴 줄 알았다고, 역시 아메탄의 앞날이 밝다고 재미있어 할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

그저 침묵으로 부정을 표현하는 르엘라를 루벤은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 내가 악플을 좀 많이 봐서.”

“…….”

“교수님도 딱히 나를 좋아할 이유는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좋아할 이유는 없는데, 그렇다고 딱히 싫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제가 가르쳐야 할 학생이고요.”

르엘라가 내뱉은 다음 말은 조금 충동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가죠.”

“……네?”

“그 이름 모를 식물 보러.”

“무서우면 안 타도 되는…….”

“저는 이런 것에 별로 겁이 없습니다. 게다가 안전 운전한다면서요. 헬멧 어디 있죠?”

“어…… 진짜 괜찮아요? 이런 날은 위험하다고 방금 말했으면서…….”

르엘라가 처음 보는 루벤이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먼저 함께 타자고 여기 데려온 것이 무색하게 그의 귀가 살짝 벌게져 있었다.

덩치는 산만 해서, 죽 찢어진 불량스러운 인상을 한데다가 말버릇도 썩 고상하지 못한 남자가 그녀 앞에서 수업 때보다 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제가 오토바이 타다가 빗길에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많으니 적어도 기사에 잘됐다는 댓글이 달리지는 않겠군요.”

담담하면서도 거침없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결심했다는 듯이 헬멧을 꺼내 그녀의 작은 머리에 씌워주었다.

“꽉 잡아요. 약학계의 보석을 뒤에 태운 이상 세상 누구보다도 안전 운전할 테니까.”

“네.”

이렇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면, 젖는 게 귀찮아서 별일 없으면 절대 연구실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르엘라는 생각했다.

역시나 오토바이가 출발하자마자 사정없이 빗물이 내리쳐서 순식간에 쫄딱 젖고 말았다. 난생 처음 타 본 오토바이는 무섭기도 하고 또 그만큼 스릴 있기도 했다.

“시원해요?”

앞에서 루벤이 소리치듯 물었다.

“주말에도 연구실에만 박혀 있다면서요!”

대답도 듣지 않고, 그가 말을 이었다.

“수업 시간에라도 이런 일탈을 해 봐야지!”

그녀가 침묵을 지키자, 그가 한참 있다가 덧붙였다.

“요!”

르엘라는 루벤이 앞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가 자신의 얼굴에 걸린 미소를 보면 능글맞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 욕심 하나 더 부려도 돼요?”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살짝 아쉬웠다. 르엘라는 난생 처음 느껴 보는 속도감과 평상시와 다른 일탈에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다른 사람이랑 나랑 똑같이 생각해 줘서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인 채 헬멧 안에서 웅웅거렸다.

“이젠 나를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더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요!”

* * *

수업 전이 아니라, 수업 후에 메시지가 온 것은 처음이었다.

[감기 안 걸렸어요? 비 너무 많이 맞은 건 아니죠?]

르엘라는 샤워 후에 메시지를 확인한 뒤 짧게 답장했다.

[괜찮아요.]

루벤이 그녀를 끌고 가서 물어본 식물은 어이없게도 은행나무였다. 이쯤 되면 그냥 아무거나 핑계를 댄 것이 맞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몰랐죠. 은행나무가 이렇게 생겼는지.’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학생을 더 다그칠 명분이 없었다.

어쨌든 단풍이 들지 않은 은행나무 잎은 초록색이었고 가지는 갈색이었으니까.

학생이 학생의 신분으로 던지는 질문에는 모두 다 답을 해 줘야 한다는 것이 어쨌든 고지식한 르엘라의 원칙이었다.

[연구실이에요?]

[아뇨.]

[그럼 어디예요?]

[대학동 가족 기숙사 아파트요.]

[가족이랑 같이 살아요?]

[어린 조카랑 둘이 살아요.]

[어, 거기 화단에 장미 막 심어져 있고 거기 아닌가? 교수들이 애들 데리고 많이 살던데.]

[제 아파트는 아니에요.]

르엘라는 자꾸만 쏟아지는 질문에 메시지를 보내며 언제까지 답장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고모? 무슨 일 있어? 왜 자꾸 핸드폰만 봐?”

거실에서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그녀의 조카, 리젠이 눈을 깜빡이며 대뜸 말을 걸어 왔다. 그녀의 오빠가 떠안기다시피 넘기고 간 조카는 일찍 철이 든 모범생이었다.

“예전에는 집에 와서도 계속 논문만 보더니.”

“아, 아냐. 수업 때문에 확인할 것이 있어서.”

르엘라는 리젠의 순진한 질문이 더 이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너야말로 시험 기간도 아닌데 왜 벌써부터 계속 책만 보고 있어?”

“아.”

리젠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학생이 왔는데 좀 심상치 않아.”

“이 시기에? 곧 고등학교 지원서 써야 되는데?”

“고등학교 배정 때문에 지방에서 급히 올라온 것 같아. 근데 좀 짜증나. 카이든 루스라고, 뭐 유서 깊은 집안 자제라는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떤 애인데 그래? 네가 딱히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못 본 것 같은데.”

“말수도 적고 무뚝뚝하고 완전 재수 없어.”

리젠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반장이잖아? 그래서 담임 선생님이 내 옆자리에 배정하고 잘 챙겨 주라고 하셨거든? 내가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볼 때마다 눈길 한번 안 주고 ‘알아서 해.’라는 거 있지?”

르엘라는 이야기에 몰입한 조카를 보며 슬쩍 웃었다.

“물론 다른 애들은 다 잘생긴 전학생 왔다고 좋아하지만, 난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그래?”

“저번에 기하 과목에서 쪽지 시험을 봤는데…… 나보다 잘 본 거 있지? 뭐, 하지만 생명과학 보고서 점수는 내가 더 높았어. 논리학 에세이는 동점이었고, 체육 시간에는 각각 남녀 1등을 하긴 했지.”

“음.”

리젠이 계속해서 온갖 과목의 성적을 읊기 시작하자, 르엘라는 은근슬쩍 물었다.

“너…… 걔 되게 신경 쓰는구나?”

“아냐! 무슨 소리야! 그냥 라이벌이라서 그래!”

리젠은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지만, 르엘라는 왠지 ‘이것 봐라’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놀리듯 말했다.

“너 지금 걔 얘기로 밤도 샐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건 걔가 너무 짜증나니까 그렇지!”

딱히 짜증나게 행동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리젠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했다. 르엘라가 씩 웃으며 더 놀릴지 고민하는 와중에,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잘 자요. 밤에는 커피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르엘라는 가만히 별것 아닌 그 메시지를 보고 있다가 답장했다.

[굳이 쓸데없는 메시지는 보내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에 대한 답변 메시지는 바로 왔다.

[쓸데없다니. 난 이 짓으로 밤도 샐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르엘라는 살짝 굳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놀리듯 메시지가 바로 하나 더 도착했다.

[요.]

그날 이후, 지루한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오늘은 강의실이죠? 비가 계속 올 것 같은데.]

[네. 강의실로 오세요.]

[연구 중이에요? 수업 준비 중?]

[연구 중이니 방해하지 마세요.]

[네, 표본 하나 만들어 갈게요.]

* * *

[오늘도 하루 종일 비가 온대요. 강의실이죠?]

[네.]

[표본 두 개 만들어 갈게요.]

[또 장미는 안 돼요. 그리고 꽃다발 사 오지 마세요.]

[종이 다른 장미예요. 지난번엔 노란 장미, 이번에는 파란 장미. 그리고 꽃다발 몇 개는 더 있어도 될 정도로 연구실 넓던데?]

[요?]

* * *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그래도 강의실이죠?]

[캠퍼스는 좀 돌아다녀도 되겠어요. K동 앞으로 오세요.]

[일단 표본실에서 만나서 같이 갈까요? 표본 좀 만들었거든요.]

[장미는 아니죠?]

[카네이션이랑 접붙인 장미래요. 아직 창가에 자리 있던데.]

[꽃다발은 애인에게나 주지 그래요?]

[애인 없는데.]

[‘링크 : <속보> 나람 케이슨, 루벤 아메탄과 열애 중’]

[아, 교수님도 인터넷은 하시는구나. 2년 전 기사인데 어떻게 찾은 거예요? 나 안 싫어해서 인터넷도 안 하시는 줄 알았지.]

[요.]

* * *

[오늘은 무조건 강의실이다. 우산 챙겼어요? 보통 큰 우산 아니면 다 젖을 것 같은데.]

[강의실로 오세요.]

[오늘 뉴스 봤어요?]

[아뇨.]

[‘링크 : <속보> 루벤 아메탄, 나람 케이슨과의 스캔들 전격 부인. 2년 만에 결별설도 아니고 교제설부터 부인한 까닭은?’]

[이걸 저한테 왜 보내는 거죠?]

[2년 전의 잘못된 정보를 알고 계시는 것 같아서. 근데 생각해 보니 전 국민이 그렇게 알고 있더라고. 정정하는 김에 모두에게 알렸죠. 또 엄청 시끄러워질 거 각오하고.]

[그러시군요.]

[사실 한 사람만 알면 되는 거긴 했는데, 괜한 오해가 덧붙여지는 건 싫어서.]

[네.]

[이따 봐요. 표본 또 가져가요.]

[설마 또 장미 꽃다발인가요? 이제 정말 둘 데가 없어요.]

[오래된 건 버려야죠. 첫날 놓아 둔 거 버리고 새로 꽂으면 돼요.]

[안 사 올 생각은 안 하나요? 돈이 아깝기도 할 텐데. 그리고 난 장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보다보면 정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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