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249/256)

  

외전 4화.

어느 순간부터 세상은 그에게 이유 없이 적대적인 사람과 대가를 바라고 호의를 퍼붓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의 앞에서 윌리엄도 아메탄도 테스티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기준에 미치지 않으면 조금의 편의성도 봐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확연한 개인의 ‘특수함’조차도 수업 내에서 판단해 버리는 사람.

모든 부와 권력을 뒤로하고 고고한 학문의 길을 선택하여,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유명한 사람. 그리고 그 유명세에 조금도 반박하지 못할 만큼 가까이서 보니 더 철저하고 꼿꼿한 여자.

정석적으로 열심히 사는 그 여자 하나만큼은 막 살면서 이슈를 몰고 다니는 자신을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을 ‘평범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수업이든 뭐든 단둘이 있을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의 세부 전공도 아니면서, 르엘라는 매번 수업에서 최선을 다했다. 루벤은 초록색 잎들에 둘러싸인 그녀의 작은 체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뚝뚝한 어조로 한 사람만을 위한 강의를 차분하게 해 나갔다.

“그러니까 이건 꽃잎이 아니라 잎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볼 수 없는 식물이니 표본을 만들려면 지금 채집해도 좋아요.”

“……이걸로 안 만들어도 되는 거죠?”

“뭐…… 그렇지만.”

“그럼 뭐, 나중에 만들죠. 그냥 30개 다른 꽃으로 만들어 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여름철이니 장미 같은 걸로 해도 되겠는데, 뭐.”

“장미는 꽃잎이 많고 가시가 있어서 표본으로 만들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 빌어먹을 강의 계획서에 장미가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

“……되긴 되지만, 보통 표본을 만들 때는 보다 더 다양하고 접근성이 낮은 식물이…….”

“아, 된다는 거네. 어쨌든.”

“뭐.”

르엘라는 피곤한 기싸움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하나 정도는 만들어 보시든가요.”

“장미 별로 안 좋아해요?”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죠.”

“왜? 보통 연인들 사이에 가장 흔한 꽃 선물이 장미일 텐데. 상당히 식물 차별적인 인간이시군.”

“그냥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커피 좋아하고 핫초코 싫어하는 거랑 비슷한. 그러니까 장미꽃은 애인에게나 선물하세요.”

“아…… 애인.”

루벤이 느릿하게 턱을 들며 나른한 표정을 해보였다.

“그딴 건 없으니 표본이나 만들어야겠군.”

르엘라는 문득 그의 스캔들 대상인 나람을 떠올렸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학생과 교수 간에 불필요한 화제였다.

“교수님은 애인이 계신가……요?”

“없습니다.”

“눈이 높은가…… 어떤 남자가 좋아요?”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오죠?”

“지금 취향에 대한 대화 중이잖아요? 장미 싫어하고 커피 좋아하고 핫초코 싫어한다며. 남자 취향 정도는 충분히 맥락에 맞는 얘기 아닌가?”

“한 번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지만 방금 깨달은 바에 의하면…….”

르엘라가 수풀 속에서 걸어 나와 다음 식물을 향해 이동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일단 반말하는 어린 남자는 정말 최악인 것 같군요.”

* * *

[오늘 수업은 어떡할까요? 비가 올 듯 말 듯한데.]

[4시부터 비가 온다는데 어떡합니까?]

[지금은 비가 쏟아지는데 곧 그친다더군요. 어떡하죠?]

맑은 날에는 별달리 문제가 없는데, 장마 기간이라 비는 계속해서 오락가락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충실하게 핸드폰에는 루벤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생각보다 루벤이 정말로 성실해서 다행이라고 르엘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대충 일기예보나 수업 진도 등을 고려해서 그날그날 수업 형태를 답장해 주었다.

그녀는 한 사람을 데리고 수업을 한다는 건, 그 사람을 상대로 정말 많은 말을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집요하게 엉겨 붙는 그의 시선을 당연히 여겨야 하는 게 맞는데, 가끔은 문득문득 의식되어 발목이 간지러워지곤 했다.

단둘이 하는 수업이라는 건 꽤 이상해서, 르엘라는 전혀 잡담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그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기묘한 일이었다. 친해지다니, 그것도 여러모로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과. 그것도 사제 지간에.

하지만 그런 묘한 감정은 굉장히 사소한 순간에 문득 느껴지는 것이었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루벤의 푸른 눈이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거나, 그래서 살짝 말을 끊으면 그의 눈이 아주 살짝 휜다거나 그런 일들.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고 하면 불량한 자세로 짝다리를 짚은 채 기다렸다가 말없이 강의실의 불을 꺼 준다거나, 그녀의 키가 닿지 않는 식물들에 대해 설명할 때면 무심한 태도로 나뭇가지를 잡아 당겨 그녀의 시야에 보이게 해 준다거나.

비가 오는데 수업을 어떻게 할 거냐는 메시지에 답을 하면 또 다시 답이 와서 메시지를 꽤 오랫동안 주고받는다거나 하는 정말 소소한 순간들에서 르엘라는 그와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그 소소한 순간들이 쌓여 생긴 미묘한 친밀감이 살짝 불편하게 느껴질 즈음, 어느 날 비가 정말 폭우처럼 쏟아졌다.

[오늘은 무조건 실내 수업이겠네요.]

[네. 표본실로 오세요. 표본 제작법에 대해 수업할게요.]

[저 표본 만들 줄 안다니까요. 예전에 배웠어요.]

[그런데 왜 하나도 제출하지 않는 거죠?]

[뭐, 그럼 오늘 하나 제출할게요. 진짜 할 줄 아는데.]

메시지는 거기서 끊어졌다.

르엘라가 표본실에 먼저 도착하여 표본을 만들 준비물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있는데, 비 냄새를 확 풍기며 벌컥 문이 열렸다.

“저 안 늦었습니다.”

루벤은 마치 비에 젖은 커다란 사냥개 같은 뒷모습을 한 채 우산을 밖에서 탁탁 털고 있었다.

“마지막에 두 번 결석할 거니까 출결 문제는 분명히 해 두죠. 난 이미 비행기 표 예약까지 해 놨어요. 끝에서 두 번째 수업 날짜 기준으로.”

“네, 제가 일찍 온 거예요. 뒤에 두 번 빠진다는 거 잊지 않고 있어요.”

담담하게 말하던 르엘라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다가온 루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테이블에 툭, 하고 올려놓은 것은 커다란 장미 꽃다발이었다.

“……이건 왜 들고 온 거죠?”

“표본용.”

루벤은 씩 웃으며 장미 꽃다발 속에서 한 송이를 뽑아 들었다. 르엘라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 장미는 표본용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게다가 식물 표본 과제라는 것이 주변의 식물들을 채취하라는 의미이지, 꽃집에서 이렇게 개량된 꽃을 사 오라는 뜻이 아니었다.

길가에 널린 것이 들장미인데 굳이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꽃다발을 사 들고 와서 또 그중 한 송이를 뽑아 표본을 만들겠다니 작정하고 자신을 골리려는 의도 아닌가.

그런데 그녀의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눈치챈 루벤이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입니다?”

존대를 안 해서 르엘라의 표정이 굳었다고 판단한 루벤은 성의 없게 덧붙이고 나서, 르엘라가 준비해 놓은 표본지와 가위 등을 가지고 표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블랑에게서 표본 만드는 법을 배웠다는 것은 사실인지, 금방 장미 표본 하나가 만들어졌다. 자신의 이름과 담당 교수 이름, 제작 날짜를 아래쪽에 기입한 루벤이 르엘라를 보며 씩 웃었다.

“거봐요, 잘 한다니까. 내가 의외로 헛소리를 안 하는 타입이거든.”

“…….”

“더 안 배워도 되죠? 이제 29개는 다음번에 만들고 일단 나갑시다.”

“어디를요?”

“일단 교수님 연구실?”

“왜요?”

“음…… 면담 신청?”

되는 대로 나오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르엘라는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한숨을 쉬었다. 고지식한 그녀는 학생이 면담 신청을 한다는데 매몰차게 거절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 수업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바로 앞이잖아요.”

공교롭게도 표본실 앞은 르엘라의 연구실이었다. 루벤은 꽃다발을 다시 집어 들고 제가 마치 연구실의 주인인 양 성큼성큼 걸어 표본실을 나간 뒤 자연스럽게 연구실 문 앞에 섰다. 문 앞에 ‘르엘라 하카트’가 쓰여 있으니 아니라는 말도 못하고 르엘라는 열쇠로 자신의 연구실 문을 열었다.

“오.”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루벤은 건들건들 걸어 들어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엄청 깔끔하네요. 성격 보이네.”

“여기 앉으시고, 면담하고 싶은 내용부터 말해 보시죠.”

“와, 컵 정도는 하나 사시죠? 대학 로고가 박혀 있는 컵을 쓰다니. 교수 월급 박해요? 음, 커피 좋아하시는구나. 원두가 신선해 보이네.”

“…….”

“요.”

르엘라가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자, 그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을 멈추고 화제를 돌렸다.

“음, 일단 이건 여기에 놓는 게 좋겠군요.”

루벤은 재주 좋게 어디선가 빈 통을 찾아서 꽃다발을 넣어 창가에 세워 두었다. 르엘라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그가 능청맞게 말했다.

“이걸 다 표본으로 만들 수는 없잖아요? 똑같은 장미들이라 30개로 인정 안 해 줄 게 뻔한데.”

“그런데 왜 여기다 놓는데요?”

“그럼 버려요? 나 이제 나갈 건데.”

“수업 아직 안 끝났어요.”

“그러니까 교수님이랑.”

“제가 왜요?”

“교수님도 내가 함부로 살던 양아치 주제에 아메탄 먹으려고 눈이 뒤집힌 주제 모르는 놈이라 같이 있기 싫어요?”

“네?”

르엘라는 아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벤은 어깨를 으쓱했다.

“수업 아직 안 끝났으니 질문이라도 받아주는 게 어때요? 이게 내 면담 내용인데.”

“……해 봐요, 질문.”

“내가 지나오면서 이상한 식물을 하나 봤는데, 그게 뭔지 너무 궁금하더란 말이에요. 아주 너무 호기심이 넘쳐서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말이야.”

“어떻게 생겼는데요?”

“잎은 파랗고, 가지는 갈색이었어요.”

루벤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도 르엘라는 웃음기 없이 물었다.

“사진 찍어 오지 그랬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럼 다음에 찍어 오세요.”

“다음에 없어지면 어떡하죠? 그 불쌍한 식물을 누가 꺾어 버린다거나, 뭐 그래서.”

루벤은 능글맞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같이 가는 게 어떨까요? 시간 많이 남았으니.”

“…….”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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