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화 (247/256)

  

외전 2화.

신청자를 보고 블랑이 기겁하여 폐강을 시키려고 했더니 아메탄에서 후원금을 가지고 모종의 압박을 해 온다며 총장까지 나섰다. 분명 지금 순식간에 아메탄의 실세가 되었다는 테스티의 입김일 것이 뻔했다. 블랑은 한 명을 데리고 수업을 하기도 싫었거니와 그게 루벤 아메탄이라면 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응? 제발 부탁이야. 하긴 해야 되잖아, 우리 학교에서. 응?”

“…….”

“그리고 르엘라 하카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개차반도 너한테는 좀 수그러들겠지. 세기의 천재 르엘라 하카트인데.”

르엘라는 그녀가 고학생일 때 적극적으로 장학금을 알아봐 주고 여기까지 이끌어 준 은사를 모른 척할 성정이 되지 못했다. 블랑은 자연 과학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복수 전공 중이던 그녀의 뒤를 봐주었으며 이후 협력 연구에서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냥 대충 하고 넘겨. 휴강도 팍팍 하고. 서로 편하잖아? D 정도 먹고 떨어지라고 해.”

“……알겠습니다.”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 말고. 절대 책임감 같은 것도 가지면 안 돼. 응?”

그녀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한 사람을 위한 강의 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고지식하고 책임감이 투철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아주 꼼꼼하게.

그리고 이번 계절 학기 그녀의 유일한 학생은 그 강의 계획서를 읽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첫 수업부터 10분이나 늦었기 때문이다.

* * *

“……아니, 학생이 왜 나밖에 없는…….”

“한 명 신청했으니까요.”

르엘라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당황한 기색의 루벤을 빤히 바라보았다. 10분이나 늦게, 그 어떤 교재도 가져오지 않은 채 어기적어기적 걸어온 꼴을 보아하니 대충 뒷자리에서 널브러져 있다가 갈 계획으로 온 듯했다.

“수강 신청할 때 인원을 확인하지 않았나요?”

“신청도 아랫사람이 했는데 내가 그딴 걸 확인할 리가.”

루벤은 난감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중간 즈음에 앉아 팔짱을 꼈다. 르엘라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강의실을 가로질러 그의 앞에 PPT 인쇄물을 갖다 놓았다.

“알고 있겠지만, 이 수업은 직접 식물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야외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꽤 됩니다. 표본 과제도 하셔야 하고요. 블랑 교수님은 보통 50개를 시키시는데, 장마철이 겹치는 것을 감안해 저는 30개로 줄였습니다.”

“아,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르엘라의 설명을 건성으로 듣고 있던 루벤이 그의 앞에 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불량스럽게 말했다.

“학생도 나 하나밖에 없으니 대충 하자고. 표본 20개, 시험 두 번.”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 같은 어조였다.

“나머지는 수업했다 치고. 내가 식물 이파리 몇 개 모른다고 해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르엘라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 종이 한 장을 더 내려놓았다.

“강의 계획서입니다. 인터넷에 올렸는데 확인하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촘촘하게 짜인 표를 흘끗 보며 루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건 그냥 작년하고 다 똑같이 복사 붙여넣기 하는 거 다 알아요. 이 바닥 한두 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올해는 서로 짜고, 아니 상호 합의 간에 그냥 대충…….”

“올해 처음 만든 건데요.”

“네?”

“전 이 강의 처음 맡아 봅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짠 수업입니다.”

“……수강생이 나뿐이었다면서요? 아, 이번 학기부터는 식물 분류학 수업을 맡으시나? 이상하네. 내가 기사에서 읽기로는 전공이 이쪽이 아니라 약학이었는데.”

르엘라는 불량한 태도의 루벤이 자신의 전공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살짝 놀랐으나, 다시 태연하게 대응했다.

“이번 계절 학기만 맡는 겁니다. 블랑 교수님께서 사정이 생기셔서.”

“나를 마주칠 엄두가 안 나서 튄 건 아니고?”

“뭐, 그것도 개인 사정에 포함될 수는 있겠죠.”

르엘라의 딱딱한 말에 루벤은 천천히 강의 계획서를 집어 올려 턱을 괸 채 차근차근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럼 이 빡빡한 걸 나 하나만을 위해서 작성했다고?”

“네.”

“혹시 취미가 시간 낭비인 건 아니죠?”

“네.”

“모르긴 몰라도 범국가적인 인재인데 엄청 바쁘지 않나? 근데 고작 한 명을 위한 학부 강의 하나를 위해서?”

“네.”

“블랑한테 말 못 들었나? 뭐 사기당한 거 아니에요? 나 그렇게 수업에 성실한 놈 아닌데.”

“불성실함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을 들었습니다.”

자꾸만 표정이 바뀌는 루벤에 비해 르엘라의 무표정은 시종일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과 커다란 안경, 작은 체구를 보며 루벤은 의자에 흐느적거리듯 늘어붙었다.

“뭐, 한 사람의 말은 그냥 넘겼다고 칩시다. 그런데 기사도 안 읽나? 오만 매체에서 씹어 대는 게 나야. 그런데 나 하나를 대상으로 진짜 이런 수업을 하겠다는 게 진짜 진심이에요? 일단 핸드폰 켜서 루벤 아메탄 한번 검색해 보시지?”

“…….”

“자,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떤 대화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힐 것 같은데. 내가 어떤 놈인지 자기소개도 충분히 한 것 같고.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처음부터 다시 한번 의논해 봅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르엘라가 불량스럽게 앉아 있는 루벤을 내려다보며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적할 것은 좀 하겠습니다. 일단 블랑이 아니라 블랑 교수님입니다. 설마 제게도 수업 도중에 르엘라라고 부르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사제 관계이니 꼬박꼬박 말은 높여 주셨으면 하는데.”

휴강은 최소 8회, 이쪽도 최소한의 기준에 맞추어 노력하는 척은 할 테니 대충 D 정도만 줘도 된다는 타협안을 생각하던 루벤은 질렸다는 얼굴로 르엘라를 바라보았다.

“나머지는 강의 계획서 그대로입니다. 특히 출결에는 신경 써 주세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딱딱함에 루벤은 황급히 말했다.

“나 하나인데 폐강 안 된 걸 보면 이 학교에서 나를 졸업시키려고 안달인 것 같은데. 진짜 또 F 줘도 괜찮겠어요? 어차피 여기서 교수할 거잖아. 입지에 문제 생기고, 뭐 그러는 거 아닌가? 그 전에 알아서 기는 것이…….”

“입지요?”

사진처럼 계속 똑같은 표정만 짓고 있던 르엘라의 얼굴에 문득 웃음이 스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르엘라 하카트예요.”

루벤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르엘라 하카트, 그와는 다른 의미로 온갖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세기의 천재. 월반을 거듭해 어린 시절에 약학 대학에 입학함은 물론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학부생 때부터 온갖 상을 휩쓸었다.

약리학은 물론 화학과 생명 과학까지 범위를 넓힌 그녀는 공동 연구를 통해 온갖 질병에 효과적인 약물을 개발해 내기 시작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온갖 제약회사와 화장품회사 등에서 그녀를 탐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를 절대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상 깊게 다가갔다.

르엘라 하카트는 국가의 자랑이자 국민의 동경을 받는 존재였다. 한결같이 꼿꼿하고 수수한 모습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요새 어린애들 사이에서 다시 ‘과학자’라는 장래희망 열풍이 불게 된 것이 르엘라 하카트 덕분이라는 말까지 돌까.

그러므로 루벤이 그녀에게 입지 운운한 것은 그야말로 비웃음을 받아도 쌀 정도의 발언이었다.

그 모든 사실들을 자신의 이름 하나로 압축하여 루벤을 제압한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게 꼬박꼬박 존대하라고 했을 텐데요. 예의를 갖춰 주시길 바랍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걸로 아는데…… 4살이었던가……요.”

“대체 그게 왜 지금 중요하죠?”

르엘라는 냉정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오만 매체에서 씹어 댄다느니, 루벤 아메탄을 검색해 보라느니 하는 소리도 상당히 거슬립니다. 앞으로도 수업 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건 또 왜……요?”

“학생에게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은 교수자의 기본입니다. 제가 그 기본을 무시할 것이라고 여기는 듯해서 상당히 기분이 나쁩니다.”

요컨대, 딱히 루벤을 좋게 평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객관성을 의심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루벤은 아까 전처럼 그녀에게 불량스럽게 비꼬듯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태도가 전혀 그를 위하는 것 같지가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믿음이 갔다.

어쩌면 이 꼬장꼬장한 여자는 정말로 갑자기 아메탄에 몰염치하게 들이닥친 문제투성이 혼외자가 아닌,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그를 보고 있을 것 같다는 믿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루벤은 화들짝 놀랐다.

좋게 봐주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 봐준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순식간에 얌전하게 굴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야외 채집을 가야 하는데 장마 때는 확실히 서로 번거로울 것 같아 강의 계획서 끝에 보면 세부 일정 변경 가능, 이라는 단서를 달아 놓았습니다.”

르엘라는 강의 계획서 맨 끝을 짚으며 말했다. 루벤의 시선이 르엘라의 작은 손을 향했다.

“강수 확률이 80% 이상이거나 비가 올 경우에는 실내 수업, 그 외에는 야외로…….”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은데. 기준 시간이나 지역 잡기가 애매하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 동네에는 비가 안 오는데 캠퍼스에는 비가 오면 어쩔 겁니까?”

“음, 그럼 기준은…….”

“학생이 나밖에 안 되는데 뭘 그렇게 번거롭게.”

루벤은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강의 계획서 상단에 있는 그녀의 번호를 느릿하게 눌렀다.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잔뜩 쌓인 핸드폰 액정 위로 그의 손가락이 시간을 들여 ‘르엘라 하카트’를 입력하고 ‘저장’하는 모습까지 르엘라의 시선에 박혔다.

“강의 30분 전, 비가 올 것 같거나 비가 오면 메시지를 보낼게요. 오늘 어떡할 거냐고. 그때 어디서 수업할 건지 알려 주면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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