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꿈속의 기분> 시리즈 AU 특별외전
“제기랄, 내가 대체 왜 이 나이에 여기를…….”
여름 냄새가 가득한 캠퍼스를 걸으며, 루벤은 짜증난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는 그보다 한참 어린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방학 계획이니 인턴십이니 하는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지만 그 싱그러운 분위기마저도 기분이 나빴다. 그가 휘적휘적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캠퍼스를 가로지를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루벤 아메탄 아니야?”
“맞아, 나 인터넷에서 본 것 같아.”
“저번에 파파라치한테 사진 찍힌 것도 봤어. 나람 케이슨이랑 사귄다며?”
“미쳤어. 나이 차이가 얼마야?”
“사귈 수도 있지, 뭐. 아메탄이 가진 돈이 얼만데. 나람이 더 달려들었을 거다.”
“그래도 결국 최종 승계자는 윌리엄 아니겠어? 난 그냥 요란하기만 한 빈 깡통 같던데.”
하나하나 대꾸해 주거나 닥치라고 면박을 주는 것도 귀찮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오늘이 계절 학기 첫 날만 아니었으면 아무나 붙잡고 화풀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졸업을 위해 대학으로 복귀한 첫날부터 또 인터넷에 사진이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지.’
모든 일은 그의 아버지가 오랜만에 정신이 든 이후 던진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아메탄 그룹의 온갖 계열사 경영권을 두고 열심히 그의 뒤에서 온갖 공작을 부리고 있던 그의 친모, 테스티는 이때다 싶어 그를 대학 캠퍼스에 다시 집어넣었다. 테스티 역시 그가 무기한 휴학 중인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린 듯했다.
“E동 303호…….”
이미 강의 시작 시간은 5분을 넘겨 있었지만 그는 느릿느릿 여유 있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처음부터 대학 졸업장을 따지 않으려던 건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졸업하고 지긋지긋한 학생 신분을 벗어 버린 뒤 여행이나 실컷 다니려고 했다. 대강대강 느슨하게 학교를 다니던 그는 C와 D를 적절히 섞어 가며 졸업을 향해 착실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학기의 ‘식물 분류학’이라는 과목에서 F(미이수)를 받아 버렸다.
그마저도 성적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가 이의 신청 기간까지 놓쳐 버린 그는 망연히 그 한 과목 때문에 한 학기를 더 다니거나 계절 학기를 들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해야만 했다. 당연히 졸업할 줄 알고 바로 여행 계획을 다 짜 놨는데…….
뒤늦게 F를 확인하던 날 밤, 그는 다른 대륙으로 향하는 크루즈선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돌아서서 계절 학기를 신청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던 그는 욕설을 한번 지껄이고 그냥 크루즈선에 몸을 담았다.
그 사실을 뒤늦게 테스티가 알았고…… 그녀가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며 펄펄 뛰었을 때는 루벤이 세계 일주 같은 것은 굳이 대학 졸업을 하지 않아도 다닐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한 후였다.
그는 그렇게 한 과목을 남겨 두고 휴학생의 신분으로 5년 넘게 버텼다. 그리고 그 사이에 테스티가 결국 제펠탄의 호적에 자신을 올리는 것을 성공해 냈다. 그러니까 식물 분류학 한 과목이 F라는 건 딱히 루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은 셈이다. 그는 나름대로 잘 살았다. 물론 그와 경영권 다툼을 할 대상인 윌리엄에 비하면 스펙이 조금 딸리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제 와서 대학 졸업이 요구되다니…….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숫자 3을 누르는데, 같이 탄 여학생이 후다닥 핸드폰을 들었다. 거울 너머로 여학생의 핸드폰에 뜬 인터넷 기사가 보였다.
[루벤 아메탄, 드디어 캠퍼스에 모습을 드러내]
언제 또 사진이 찍히고 이렇게 빨리 기사들을 쓰는 건지, 원.
루벤은 자신의 유명세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는 애초부터 ‘갑자기 돈벼락을 맞게 된 사생아’ 따위의 아주 불쾌한 꼬리표를 달고 세상 사람들에게 강제로 선보여졌다. 하긴, 아메탄이라는 거대한 기업에 갑자기 나타난 후계자 후보에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가십거리는 다 달고 있었으니.
아버지의 대중없는 중얼거림과 친모의 성화.
그게 과연 그의 이 귀찮은 발걸음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나.
‘노친네의 잡소리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 때려 치고 이번에도 장렬히 F를 받아 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그의 뒤에 아까 그 여학생의 시선이 꽂혔다.
문이 닫힌 303호 앞에서, 그는 시간을 확인한답시고 핸드폰을 꺼냈다. 이미 수업 시간은 10분이 지나 있었다. 메시지가 주루룩 쌓여 있었다.
[오늘 수업 시작인데, 꼭 졸업해야 한다. 알겠지?]
친모의 줄기찬 연락 두어 개.
[어디십니까? 도착하셨습니까? 제발 연락 좀 주십시오.]
어떻게 잘 따돌린 친모의 하수인 연락 서너 개.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요? 답이라도 해 주시면 좋겠어요.]
며칠 만에 온, 그러나 한참 동안을 망설인 내색이 분명한 나람의 연락 하나.
루벤은 그 어떤 것에도 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문을 열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쏟아질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강의실에 아무도 없었다.
“늦으셨군요.”
아니, 학생들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강의실 구석 교단에 체구가 자그마한 여자 하나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강의 계획서는 보고 오셨나요? 지각 3회에 결석 1번으로 치고, 결석 3번이면 미이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벤은 눈앞에 있는 작은 여자의 모습 자체가 얼떨떨하기도 하고, 이토록 큰 강의실에 둘이 서 있는 이 상황이 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세상을 떠돌며 대학과 한참 멀어진 그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찌나 TV고 인터넷이고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는지. 하지만 그의 유명세와는 아예 결이 달랐다. 추문과는 전혀 관계없는, 고고하면서도 어딘가 멀어 보이는. 그런 먼 세상의 명성이 그녀에게 따라다녔다.
“뭐 하십니까?”
그리고 그 여자, 르엘라 하카트가 얼굴의 반을 가린 안경을 치켜 올리며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앉으세요.”
딱딱하다 못해 무뚝뚝한 말투가 귀에 꽂혔다.
* * *
“르엘라, 제발 부탁한다.”
르엘라는 무표정으로 그녀의 은사, 블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난 그 자식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어차피 한 명 신청이잖아요. 폐강하세요.”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총장한테 바로 압박이 왔어.”
“총장님이 학부생이나 듣는 식물 분류학 수업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당연히 총장은 관심 없지. 포인세티아와 라플레시아를 갖다 줘도 구분 못할걸? 하지만 후원금에는 관심이 지대하다고.”
블랑은 르엘라에게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이었다.
“젠장, 그 자식이 아메탄의 피를 이었을 줄 알았다면 절대 F 같은 건 안 줬을 거야.”
“F는 왜 주셨는데요?”
“딱 이수할 정도로만 출석하고, 강의실 오면 처자고, 표본 과제는 딱 하나 내고, 시험 점수도 엉망이었어. 누가 봐도 그냥 D나 주세요, 이런 태도였다고. 그런데…….”
“그럼 D나 주지 그러셨어요. 그거 먹고 떨어지라고.”
“……그 꼴이 너무 보기 싫었어. 딱 이수만 하겠다는 그 널브러진 태도가. 딱 보니 졸업 학년인데 F를 띄우면 찾아와서 빌 줄 알았지. 이건 이수 못하면 졸업을 못하는 전공 필수 과목이니까. 그런데 그 이후로 졸업도 안 하고 이 과목 하나 남겨 둔 채 계속 휴학 중일 줄이야.”
“그 휴학 중에 일이 난 거군요.”
“그래, 일이 난 거야.”
블랑이 이마를 짚었다.
아메탄은 전 세계에 지부를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창립자이자 CEO인 제펠탄 아메탄은 세계 부호 5위 안에 들어갔으며 본인도 언론에 노출되는 걸 좋아하다 보니 굉장히 유명했다. 꽤 이른 나이부터 지병을 앓았지만 안정된 후계인 윌리엄과 다니엘 형제가 있어서 아메탄의 주가는 견고히 방어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제펠탄의 부인인 스잔나가 죽고 제펠탄은 즉시 재혼했다. 상대는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이었던 테스티였고 그녀는 제펠탄 사이에 이미 장성한 휴학생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아메탄의 성을 달게 된 그 사생아가 바로 루벤이었다.
제펠탄에게는 이미 유명 배우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셰라는 혼외자 딸이 한 명 있긴 했다. 그러나 그 딸은 그저 후원만 받고 있을 뿐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는데다가 그가 아닌 친모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친모와 함께 호적에 오른 루벤은 하루아침에 전 세계적인 재벌가의 후계 중 하나가 되었다.
“난 아직도 그 자식의 눈이 기억나.”
블랑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권태롭기도 하고, 무심하기도 한데 잔뜩 불만이 가득한 눈빛이었어.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특유의 위태로운 분위기가 있었다고. 눈매도 날카롭고 말투도 거칠고. 아니나 달라? 유명해지니 안 좋은 소문만 질질 끌고 다니잖아.”
“그래서 대놓고 훈계는 못 하시고 F를 주신 거군요. 교수님의 안목과 대처가 어찌나 훌륭하신지 새삼 놀랐습니다.”
“그래, 마음껏 비꼬아도 되는데…… 강의는 네가 해라.”
“전 약학 대학 소속입니다. 세부 전공이 식물 분류학이 아닌데요. 자연 과학부 학생의 자연과학 기본 전공을 제가 왜 가르칩니까?”
“그래도 며칠만 책 보면 나보다 더 잘 가르칠걸. 생명 과학 학위도 있잖아, 왜 그래.”
“아니, 다른 강사들은 뭐 하고…….”
“다들 일정이 있고 바빠. 오죽하면 내가 다른 단과대 소속인 네게 부탁을 하겠어?”
르엘라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이번 계절 학기의 식물 분류학 신청자는 이 과목을 반드시 재수강해야 하는 단 한 명, 루벤 아메탄뿐이었다.
전공 필수 과목인데도 불구하고 신청자가 극도로 적은 것은 이 과목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직접 식물을 채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봄이나 가을에 등산을 하고 싶어 하지, 더운데다가 장마까지 겹친 여름에 산을 오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블랑 역시 그냥 숫자만 채우려고 명목상으로 열어 두었다가 상당히 낭패를 당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