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5권) (245/256)

  

1화.

프롤로그

법무국 앞에 국왕이 직접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베카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법무국장과 의논해야 할 일이 있나 보다, 하고 사례집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건성으로 일어나 직원들 중 가장 끝에 조용히 서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을 뿐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국왕, 다니엘을 직접 맞이하여 긴 인사말을 건네고 있는 법무국장 오렘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던 이베카는 맨 처음에는 발끝만 쳐다보느라 국왕의 표정도 살피지 않았다. 국왕의 뒤에 있는 호위무사, 안리크를 바라볼 때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젊은 국왕, 다니엘 라티니스 아메탄은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조각같이 생긴 미남이었다. 흰 피부에 깎아 놓은 것처럼 대칭이 완벽한 그의 이목구비와 훤칠한 키, 부드러운 말투와 당당한 풍채는 귀족 영애들에게 언제나 화제가 되곤 했다.

이베카는 호기심에 못 이겨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왕의 금빛 머리카락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자신의 가족들이 가진 금발보다 훨씬 더 반짝거려서 찬란할 지경이었다.

‘예쁘다.’

가까이서 젊은 왕을 본 이베카의 첫 소감이었다.

‘진짜로 동화 속에서 튀어 나온 것 같아.’

오렘의 길고 긴 인사말을 미소를 띤 채 예의 바르게 듣고 있던 다니엘은 오렘이 국장실로 안내하겠다고 하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법무국장님. 제가 용건이 있는 직원이 따로 있어서요.”

“예? 직원이요?”

“근무 시간 중에 죄송합니다만 용건을 전하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을 듯합니다. 요 앞 정원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지요.”

이베카는 속으로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볼 일이 있는 직원이 있다면 그냥 부를 것이지 이 작은 법무국에 직접 찾아올 이유는 무엇일까?

다니엘은 누구에게나 공손했고 친하지 않으면 무조건 존대를 썼다. 그런 그는 산하기관 직원들 사이에서도 ‘어려운 사람’이라고 통했다.

법무국의 특성상 오래 근무한 중장년층이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다니엘을 두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라며 ‘사람 좋아 보인다고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4년 전만 해도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돌던 소문인 ‘다정하고 선량하며 부드럽기 그지없는 천생 왕자님’이라는 평가와 정반대의 의견이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이베카 데 에셀번.”

다니엘의 상냥한 대답에 이베카는 다시 아래로 향하려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국왕이 자신을 찾아 법무국에 왔다고? 그녀의 보랏빛 눈과 국왕의 푸른 눈이 그대로 부딪혔다.

그녀의 의아한 눈이 어쩔 수 없이 다니엘에게서 멀어져 그의 뒤에 서 있던 호위무사, 안리크에게 향했다. 안리크는 무표정으로 그저 다니엘의 등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국장님의 허가도 받았으니, 그러면 잠시 이쪽으로.”

이베카는 다니엘을 따라 작은 법무국 건물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멀리 갈 생각은 없었는지, 법무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정원에서 멈췄다. 이베카는 그의 뒤에 죽 늘어선 호위 행렬을 보며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다니엘은 그녀와 마주서서 빙긋 웃었다. 이베카는 따라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이베카는 산하기관인 법무국 직원이기도 하지만 아메탄 왕국의 수도, 아메니티에서 꽤 영향력이 큰 에셀번 백작가의 셋째 딸이기도 했다. 그리고 썩 마음에는 안 들지만 약혼자도 있었다.

“바쁘실 테니 용건만 간단히 하도록 하죠.”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었다.

“텔시 집안에 약혼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사랑하시나요?”

“아…….”

이베카는 보랏빛 눈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젊은 왕이 찾아와 약혼자에 대해서 묻다니? 그녀는 너무나 이상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뻣뻣하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법무국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수사국에서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국 직원이었을 때의 기억이 모두 지워졌습니다.”

그녀가 차분하려고 애쓰면서 설명했다. 권력의 중심이라고 평가되는 수사국은 여러 가지 비밀을 다루는 산하기관이다. 그 때문에 중간에 적을 옮길 때에는 평생 감시받거나 그 동안의 기억을 모두 삭제 당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녀는 기억을 모두 삭제하는 것을 선택했고, 기억 삭제 마법은 수사국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이브나의 고대 마법이었기 때문에 마력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에도 강력하게 발현되었다. 다니엘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인지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약혼자라며 그가 있었고…… 아직은 잘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 말에 다니엘은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하고나 결혼해도 괜찮다는 말로 들리는데.”

다니엘의 말에 이베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귀족가에서 태어났으니 집안에서 정해 준 혼처와 맺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대학을 거쳐 산하기관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귀족이어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베카는 영악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셈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본디 가고 싶었던 길이 있었으나 그것이 실패한 마당에 굳이 미련을 두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미 인생을 체념한 그녀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

“주어진 탄생과 운명에 의무를 다해야죠.”

안리크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고, 이베카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다니엘의 말만 기다릴 뿐이었다. 다니엘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러면…….”

늘어지는 다니엘의 말에 이베카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물처럼 푸른 눈에 갈색 법무국 제복을 입은 이베카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저와 결혼하는 건 어떻습니까?”

“……네?”

이베카는 너무 놀라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속삭이듯 반문했다. 다니엘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눈을 뗄 수 없이 잘생긴 얼굴이었기 때문에 더 현실성이 없었다. 반짝이는 금발 머리에 조각같이 준수한 얼굴, 유리알을 박아 놓은 듯 푸른 눈동자. 3왕자가 그림처럼 잘생겼다는 소문이야 마지막 기억인 열여덟 살 전에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잘 모르는 텔시 집안의 약혼자나, 잘 모르는 국왕이나 비슷하지 않을까요?”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고, 이베카는 당황스러워서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저, 저, 전하…… 이, 이것은 저 혼자 결정할 사안이…… 저는 말씀드린 대로 귀족가의 여식이고 제 혼사는 저의 의지가…….”

“원래 에셀번 백작가에 직접 혼담을 넣을 생각이었지만.”

모든 상황에 현실감이 없었다. 이베카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아서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전에 당사자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녀에게 약혼자에 대한 것을 직접 묻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배려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그저 사람을 시켜 에셀번 백작가에 혼담을 넣으면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데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셀번 백작이 그의 셋째 딸을 국왕에게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의견이 낄 자리는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몰락 귀족인 텔시 집안과의 약혼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성사된 것과 마찬가지로.

“약혼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니 다행이군요.”

“전하.”

이베카의 눈이 황급히 그의 뒤에 있는 안리크를 향했으나 안리크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은 채 묵묵히 무표정만 지킬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재빠르게 말했다.

“대체 저를 왜…….”

“그 이유는 에셀번 백작에게 들으세요. 충분히 알고 있을 겁니다.”

그가 부드럽게 이베카의 말을 끊었다. 아버지에게 들을 수 있는 이유라면 분명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인 의도란 뻔했다. 에셀번 백작가는 대표적인 중립파였다. 이베카의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얼굴에는 놀랍도록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대에게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으로요?”

“산하기관인 법무국을 그만두지 않는 것.”

이베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당연히 그녀는 혼인한다고 해서 법무국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약혼자부터가 약혼이 결정되자마자 산하기관을 그만두었기에 그녀 역시 마음속으로 포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법무국을 계속 다닐 수 있게 해 준다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100년 전, 이브나 왕비 역시 행정국에 계속 근무했다고 하죠.”

하지만 전왕비 테스티는 산하기관에 입사하기도 전에 선왕의 비로 들어갔는데…… 전적으로 왕비의 산하기관 출근은 왕의 허가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팽팽 돌았으나 다니엘이 그녀를 원하는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막연히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중립 귀족가의 지지와 법무국의 특정 업무가 필요하다는 것.

당연하겠지만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거나 하는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전개는 아닐 것이다.

“더 할 말 있나요?”

다니엘은 예의를 갖추면서도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분명히 했다.

“약혼은 파기되고, 곧 국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곧……이요?”

“열흘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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