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4권) (243/256)

프롤로그

마력의 신 엔리히는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대륙의 대다수 땅을 차지했고, 패배한 신들은 가장 황량하고 황폐한 사막 한스팀으로 쫓겨났다. (중략) 패배한 신들의 후손은 마력이 아닌 신력을 사용하며 부족을 이뤄 오랜 기간 동안 사막 변방을 떠돌았으나, 한스팀 왕조가 대대적으로 ‘패배한 신들의 부족’을 정벌하기 시작하며 그대로 쫓기게 되었다.

<대륙의 역사> 중 발췌, 이단 아르마스 엔리히 저

* * *

“안 돼, 서명 안 해 줘.”

“결재 올라가려면, 선배님의 서명부터 받아야 하는데요.”

류스카는 린의 결재판을 받지도 않은 채 차갑게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린은 분노를 참아 내는 얼굴로 찬찬히 말했다.

“무슨 내용인지 보지도 않으시고요?”

“……뻔하지.”

시간이 지나도 그의 책상 앞에서 린이 미동도 하지 않자, 재무국의 사람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제국의 내란 때문에 바빠서 미칠 지경인 산하직원 사람들 눈에는 결재판을 받지도 않는 류스카나,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린이나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류스카는 한숨을 쉬며 펜을 책상 위에 던졌다.

“외교국 전입 요청이지?”

“네.”

드디어 류스카의 눈을 마주 본 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린의 굳은 표정을 본 류스카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앞에 서 있을 뿐인데도 그녀는 온몸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상처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의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대학 시절만 해도 린이 이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류스카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내란 때문에 외교국만 바쁜 건 아냐. 재무국 역시 일손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라고. 우리도 지금 매일 야근인 거 안 보여? 절대 안 돼.”

“그건 선배님이 판단하실 일은 아니고요. 재무국장님이 판단하시겠지요.”

린은 결재판을 다시 내밀며 턱을 치켜들었다.

“선배님은 서명부터 해 주시면 돼요.”

“네가 외교국 지망이었던 건 알지만…… 성적 때문에 떨어진 거니까 포기하지 그래?”

“네. 낮은 성적 때문에 억지로 여기 밀려 들어왔죠. 다시 상기시켜 주실 필요는 없어요.”

류스카의 빈정거림에 린이 입술을 깨물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결국엔 재무국 사람들이 그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채고 자신들끼리 뭐라고 하다가,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도 처음 한두 번이지, 워낙에 말이 많이 돌던 사이라면 알아서 눈길을 돌리는 법이다. 린의 도전적인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형편없는 인재이니까, 재무국장님도 제게 미련이 없지 않겠어요?”

류스카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이 모든 것은 외교국에서 전입TO를 한 명 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외교국의 이아크 텔시는 류스카의 대학 동기인 하급 귀족으로, 결국엔 귀족 여자를 물어서 약혼한 뒤 평민들이 대부분이던 산하기관에 사직서를 내 버린 것이다. 아마 몇 년 후부터는 귀족 회의에서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아크가 그렇게 살든 말든 류스카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그래서 외교국에 전입TO가 생겼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제국의 내란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외교국은 다음 신규를 받을 때까지 여유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당장 다른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전입TO를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적에 밀려 재무국에 몸담고 있던 린의 입장에서는 이 TO를 덥석 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잘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자리로 가 봐.”

“뭘 몰라요? 저는 이제, 순진해 빠져서 선배가 갖고 놀기 딱 좋던 신입생이 아닌데요.”

“여하튼 안 돼.”

“……제가 아직도…….”

류스카가 다시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리자, 린은 못 참겠다는 듯이 그의 책상에 결재판을 올려놓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선배님 눈빛 한번 받고 싶어서 안달하던, 시험 전날에도 선배님이 부르면 정신없이 달려 나가던, 선배님의 속삭임 한번에 침대로 기어들어 가던 그 멍청한 여자애로 보이세요?”

분명히 린은 류스카와 눈만 마주쳐도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순진한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에게 차가웠고, 언제나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물론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류스카 본인이었다.

“피차 매일같이 보는 게 불편할 텐데, 대체 왜 안 보내 주겠다는 거예요?”

“난 안 불편해. 넌 불편해?”

린이 조용히 분노를 참는 것이 책상을 건너 느껴질 정도였다.

“저는…….” 

그녀가 이를 갈았다.

“불편한 걸 넘어서, 선배님이랑 마주치는 것도 싫은데요.”

직장 사수만 아니었어도 린은 아마 류스카를 한 대 치고도 남았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류스카는 그 서류에 서명을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린은 분노를 눌러 참는 얼굴로 결재판을 다시 집어 들었다.

직속 사수인 류스카가 서명을 해 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주임에게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임은 류스카에게 서명을 받아 오라고 다시 보낼 것이 뻔했다. 린이 쌩한 눈으로 그를 째려보고 나서 뒤를 홱 돌아 자신의 자리로 가서 신경질적으로 앉았다.

그제야 류스카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린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훨씬 더 익숙했다. 몸에 꼭 맞는 제복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 꼿꼿한 자세와 집중할 때마다 살짝 기울이는 머리 각도까지. 사실은 제복 아래 숨겨져 있는 부드러운 살결까지도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류스카, 정말로…… 정말로 내게 목숨을 빚졌다고 생각하거든…….’

그는 찬찬히 서랍 속에서 외교국 전입TO 서류를 꺼냈다. 전입TO 공고는 한 명뿐이었고, 내란으로 인해 가장 복잡할 시기의 외교국에 지원할 사람은 그의 생각엔 거의 없었다.

‘린을…… 린을 부탁한다.’

그의 짙은 잿빛 눈이 한동안 멈춰 있었다. 오래전, 그의 손을 붙잡고 부탁하던 양어머니의 할딱대던 숨까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 아이만이라도 살아야 해. 한스팀에 가면…… 그 아이는 쫓기게 될 거야. 혹시라도 남은 가족을 찾겠다고 한스팀에 가면 안 돼. 이곳에서, 자신의 출생 같은 건 잊고 아메탄의 국민으로 살라고…… 그 아이를 살려 줘. 부탁이야.’

그는 린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린은 사표까지 던지고 한스팀으로 떠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아메탄의 삶에 그 어떤 미련도 없다.

‘약속해 줘, 류스카…… 린을 지켜 줘. 그 애는 한스팀에 가면 안 돼…….’

류스카는 자신이 린의 뒷자리여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라도 그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모든 것을 잊지 않는 그가 언제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양어머니의 마지막 유언뿐만이 아니었다.

‘서, 선배님…….’

교복을 입고, 달뜬 숨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왕립마법대학의 신입생 린 아시에의 상기된 얼굴을 그는 언제든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이성 교제도, 관계도 금지인데…….’

그녀의 교복 단추를 푸르는 그의 손을 차마 막지도 못하고 그녀는 울상으로 속삭였었다.

‘교칙은 어기라고 있는 거야. 네가 신입생이라서 모르는 건데, 몰래몰래 다 비밀로 사귀고 그래. 대학 밖에 있는 우리 또래들은 이미 다 결혼했어.’

그가 그녀의 흰 목에 입을 맞추자 툭, 하고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이 떨어졌다. 한 고아 여자아이가 알고 보니 외국의 귀한 핏줄이었고, 온갖 모험을 거쳐 원래 약혼자와 결혼하는 내용의 동화책이었다. 그는 그 동화책을 은근슬쩍 발로 밀어 뒤로 걷어 냈다. 그녀의 몸이 바짝 긴장한 것을 느낀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차피 수사국 갈 건 아니잖아? 외교국은 컷이 높지 않아. 만에 하나 걸려서 징계 좀 받더라도, 무난히 들어갈 수 있어.’

파르르 떨리던 린의 속눈썹까지 그는 모두 기억했다. 그를 바라볼 때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연한 갈색 눈동자까지. 지금은 그 눈동자가 그를 경멸하듯 바라보더라도, 그 옛날 기억들이 그녀에게는 모두 지우고 싶은 어두운 역사라 할지라도 지난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류스카는 바라보고 있던 서류에 신입생 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아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팔을 감으며 기대 오던 따뜻한 체온. 밤이슬을 맞은 풀냄새가 상쾌했고, 그녀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꿈결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이 모두 잠든 밤, 가만히 서로에게 기대어 아무 말 없이 둥근 달만 보고 있어도 좋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던 시절.

‘만일 애인이 생긴다면, 잘생기고 멋있고 영리했으면 좋겠다, 이런 누구나 하는 상상이…… 그 상상이 이루어진 거예요.’

그때 그녀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던 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단 예감을 했기 때문이다. 몽롱한 과거의 기억이 차가운 그녀의 말에 뒤덮였다.

‘저는 이제, 순진해 빠져서 선배가 갖고 놀기 딱 좋던 신입생이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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